20230602a 울산강의-역대기상(21강) 18장 6절 : 언약의 사람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8장부 19장, 20장까지 하겠습니다.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 또 모압을 치매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그렇게 돼 있어요. 13절에 보면,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9장에 보면 암몬 자손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과 역시 다윗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장에 암몬 자손, 19장 16절에 보면 아람 사람이 또 이스라엘 앞에서 패합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패하고, 에돔 패하고, 암몬 패하고, 아람 나라까지 패했다. 이것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이게 지중해고 이스라엘 덩어리 있는데 이쪽에 블레셋, 이쪽에 에돔, 이쪽에 모압, 여기 암몬, 여기 아람, 지금 시리아. 모압, 암몬은 지금 요르단. 에돔은 이스라엘, 블레셋 역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렇게 돼 있어요.
다윗이 블레셋 치고, 에돔 치고, 모압 치고, 암몬 치고, 아람 치고. 다윗이 암몬 칠 때 자기가 다윗에 시비 건 것 생각나서 돈 주고 아람 나라 용병과 연합으로 다윗에 대적하려다 둘 다 작살났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역대상 18장에서 20장까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역대상 18장 13절에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왜 이기게 하셨는지 그것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다윗이 이런 나라 한 것은 예선전이에요. 예선전에서 이겼지요. 다윗은 같은 인간들과의 이김을 통해서 다윗은 이긴 자가 돼요. 어떤 이긴 자냐? 인간을 이긴 자가 돼요. 인간을 이긴 자는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 최종 결승전에 나갈 자격이 됩니다. 다윗이 이런 나라 다 이기고 그래서 인간나라에서는 최고 승자로 부각을 시켜놓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과 최종 결승을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18장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종을 삼았다고 돼 있는데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겼잖아요. 다윗이 이겼으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긴 쪽을 영웅시하죠. 진 쪽을 악한 자로 규정하는 법, 전쟁을 해서 이긴 쪽, 진 쪽을 여기다가 법적 가치를 부여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졌다는 것을 악해서 졌다는 말이고, 이겼다는 말은 잘나서 이겼다는 셈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을 다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의 모든 다툼은 그 의미는 법적 범주 안에서의 다툼이 됩니다. 법적 법주, 법리적, 법률적 범주 안에서의 다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한테 이기면 그게 구원이 됩니까, 구원이 되겠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기게 하신 이유는 백날 이기고 다윗이 백날 주변 나라를 처부서도 이거는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내가 누구를 종을 삼았다, 누구를 포로를 삼았다, 누구를 격퇴했다. 집에 누가 도둑이 왔다? 그러면 뭉둥이 들고 격퇴했으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입니까,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아니죠. 집에 모기 있는데 모기 잡았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도둑이 들어왔을 때 격퇴하게 되면 자기가 뿌듯해지지요. 이겼으니까. 이긴 쪽은 영웅이 되고 진 쪽은 악한 자가 됩니다. 이긴 쪽이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살만해도 이겼다, 라는 쪽으로 이게 빠져요. 진 쪽은 죽을 몹쓸 짓을 해서 죽어야 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더구나 이게 싸움이잖아요. 다툼이 싸움이 되잖아요.
싸움이 돼버리면, 이 사람이 몹쓸 짓을 해서 죽어야 했다, 여기에 뭐가 추가 되느냐 하면 내 손으로 죽여야 했다, 이렇게 돼요. 여기 내 손으로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영웅이 되고, 내 손에 죽는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반드시 죽어 마땅한 악한 자가 되는 거예요.
애들이 하는 컴퓨터게임에서 전쟁놀이하고 사람 죽이는 게임 있잖아요. 그 게임 놀이할 때 거기에 깊숙이 빠져들 때 인간에 형성되는 마음가짐이 이런 법적인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내가 이기는 것은 무조건 정당하고 나는 져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고 나를 반대하는 자는 조기에 이 세상에서 죽어 마땅한 악한 자가 된다는 의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붙기 전에 하나님과 대결하기 전의 예선전이에요. “인간 대표 나와!” 그 대표자 뽑는 예선전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승자가 됐거든요. 승자란 뭔 뜻이라 했습니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야 될 자로 등장된 거예요. 그 다윗과 하나님과 최종 결승전을 붙습니다.
결승전 붙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월급 받고 떵떵거리고 살아도 그게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 살아서 돈 잘 벌어서 그렇게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가난하면 구원됩니까? 가난해도 구원이 안 돼요. 이래도 구원 안 되고 저래도 구원 안 돼요. 구원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본인이 교회 40년 오래 다녔다고 구원될 것이라고 본인을 속이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거 교회 다녔지 구원된 게 아니에요. 애 잘 키우고 돈 벌었지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구원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겁니다.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그리고 그걸 대표해서 다윗이 오늘 본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다윗은 이겼다, 근데 다윗은 구원은 안 됐다. 다윗은 모든 주변나라를 다 이겼어요. 주변나라를 다 이긴 다윗이 구원이 안 된다면 다른 나라, 블레셋, 에돔, 모압, 아람 나라는 역시 구원이 안 돼요. 인간 나라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 나라를 다 이기고 삼킨 다윗이 구원이 안 된다면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이방민족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경은 인간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거예요. 강의 여기서 끝내야 돼, 끝내버려야 돼요.
그래서 뭐가 돼요? 구원이 왜 불가합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되묻지요. “너, 그러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로 폴짝 뛴다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거는 교회가 사기를 쳐서 그래요. 땅에서 살아봤다 땅에서 살다 땅에서 흙이 되는 거예요. 무슨 하늘로 가요. 언감생심, 바랄 걸 바라야지.
거울을 보세요. 본인이 구원될 사람인지. 내가 구원될 상인가? 아니에요, 구원될 상 아니에요.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은 없습니다. 인생 살만큼 살다가 그냥 공동묘지에 화장터에 가는 거예요. 끝이에요. 게임오버,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 봐도 구원이 안 되는 게 뻔한 데 무슨 억지를 부립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안 된다잖아 안 된다잖아, 안 돼.
“안 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구원됩니까?” “너 좀 맞아야 되겠다. 맞아야 말 통하지.” 구원이 안 된다는 데 무슨 구원을 어떻게 해달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남한테 이기고 잘 살면 승리자고, 가난하면 패배자고 그렇게 승자, 패자 가다가 둘 다 죽는 거죠. 여기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왜 인간은 구원이 불가능하냐?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승리와 자기의 살아남에 대해서 법적인 의미와 엮여져있기 때문에 법구조라는 밀림 속에 완전히 옴짝달싹 못하게 촘촘하게 법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관계가 없어요. 모든 게 법적인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법률사무소 상담해서 “변호사님,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 당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으면 변호사가, “반소하세요.” 반대로 고소하라 이 말 아닙니까. 내세우는 모든 대책이 전부 다 법적이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것 알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어 헤어져야 되는데 꼭 이혼해야 됩니까? 어떻게 합니까?” “상관녀한테 고소하면 천오백 받습니다.” 이 뭔 이야기에요? 법적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가정은 뭐였다? 꼭 일이 터져야 법이 나옵니까? 가정은 평소에 뭐로 엮여져있습니까? 법적 관계로 엮여져있다는 것이 헤어질 때 숨어있는 관련성이 연관성이 그제야 티를 내는 거예요.
형제가 자식이 둘, 세 명 됐을 때에 애 하나는 공부 잘해서 미국 가 있고, 둘째도 공부 잘해서 싱가포르 가 있고 늙은 부모는 한국에서 누나가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가 미국에 있는 싱가포르에 있는 동생들에게 “아버지 돌아가셨다. 빨리 오너라.” 가보니까 형제들이 몰랐던 사실, 아버지가 10억짜리 보험과 함께 숨겨놓은 50억짜리 빌딩이 있었다. 그렇게 될 때 형제우애는 좋아질 수 있습니까?
누나가 말하기를 “너희들 외국에 나가있을 때 병든 부모님 내가 다 건사하고 케어했다. 법적으로 친히 봉양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지분이 주어지는 게 보장돼 있어요. 따라서 빌딩과 보험은 내가 챙긴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그 동생 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형님, 그건 아니지요.” 나오지요. 아버지가 유산 없고 돌아가면 그렇게 친하고 사이좋든 그 형제간에 아버지가 재산과 유산을 남기는 순간 그때는 무슨 관계에 들어갑니까? 법적인 관계에 들어가요.
법적인 관계에 대해서 그 부모의 재산에 대해서 자기 지분을 얻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살아남기 위해서, 에요. “누나만 잘 사냐? 나도 넉넉하게 좀 살자. 요새 싱가포르 물가 비싸서 못 살겠다. 아버지 유산 나눠서 나도 같이 넉넉하게 살자.” 누나가 하는 말이, “네가 왜 살려고 하는데?” 살아남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 의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튼튼하고 건강하고 여유롭게 살아남는 것이 인간세계 법적인 세계에서는 영웅이 되는 거예요.
가난하고 병들면 이 인간세계에선 뭐가 돼요? 패배자가 돼요. 패배자는 뭐로 취급된다? 악한 자로 취급돼요. “너 같은 인간은 굶어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굶어죽게 하는 거다.” 악한 자로 규정된다고. 가난한 자는 악한 자, 부한 자는 의로운 자, 정당한 자, 영웅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형제 다섯 명 가운데서 누구 하나 사회적으로 유명인사 되면 그 부모들이 다른 형제들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 뛰어난 형제를 부모가, “내가 너 하나 낳은 것, 그것 하나 잘했다.” 해서 붕붕 막 띄우지요. “말년에 내가 네 덕을 보는구나. 난 네가 될 줄 알았어. 될 놈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내가 알아봤어.” 이렇게 형제 다섯 명 가운데 유독 유명한 돈 잘 버는 걔만 붕붕 띄운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의롭다, 악하다를 인간세계에서는 힘 있다, 힘 없다로 이미 규정을 하고 그런 법적인 범주를 형성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 법적인 촘촘한 관련성이 있는 자는 구원받은 수가 없습니다. 그 세계 속에 들어가고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법적으로 꽁꽁 묶여있는 데 그런 법적인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으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질 않아요. 구원을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법은 인간에게 억압을 주지만 인간에게 또 뭐도 주느냐 하면 보상을 줘요. 그래서 법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힘들어도 법대로 살려는 이유가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게 있기 때문에 역경과 어려움을 겪어내어서 그 보상을 실제적으로 오래 건강하고 여유롭게 부자 되어 살아남는 걸 보상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영웅, 어려운 가운데서도 승자가 돼버리면 그 자체로 자기한테 보상이 되고 자기가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본다. 이 체계가 뭐냐? 법적 체계에요. 법률적 체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은 단란한 가정이라 하는데 세상에 단란한 가정은 없습니다. 어떤 가정도 단란한 가정은 없어요. 법적으로 법이 있기 때문에 그냥 참고 견디는 거예요. 단란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법적으로 내심 아주 힘들게 참는 거예요. 조금만 계기가 탁 핀이 빠져버리면 수류탄 같아. 이참에 우리 갈라서자.
디모데전서에 보면 감독자들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린다고 돼 있지요. 그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게 가정 자체가 단란해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법적인 구조는 날아가 버리고 그 가정의 구성원들이 복음적 구조로 대체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법적인 보상을 원하고 그 보상은 어디로 돌아온다?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승리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거는 공식처럼 명심을 해야 될 문구를 제가 적겠습니다. 이거는 명심 안 해도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꼭 외울 필요 없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이 또는 이 사태가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모든 인간세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심지어 부모자식, 가족, 남편아내 할 것 없이 모든 교인들, 교우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오직 이 하나밖에 없어요.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듣는 사람은 그냥 안 들어요. 속으로 “목사님, 이 복음 알면 나한테 무슨 이익 옵니까?” 도대체 왜 이익을 자꾸 계산하지요? 달리 하면 물어보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꾸만 계산하는가? 여러분 계산하는 인간이 천국 갑니까? 천국에 불가능해요. 천국에 불가능해도 인간은 자꾸 계산만 해요. 천국은 가고 싶은데 나는 계산하는 인간, 항상 건드리면 뭔가 말이든 행동이든 스쳐지나가든 무슨 일이 주어지게 되면 제일 먼저 나서서 보여주는 반응이 뭐냐? 이 일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당신과 만남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당신을 남편으로, 당신은 아내로 맞이했을 때 도대체 그다음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 그게 계산이죠. 한 30년 살았습니까? 계산해요. 당신과 30년 살아서 나한테 이익이 계산해보니 얼마 나오는지 보자 이거에요. 왜 계산하지요? 왜 이익이냐 이것부터 먼저 자기가 자기한테 그걸 걸 왜 묻습니까, 묻는 이유가 뭐죠? 복음이고 성경이고 말씀이고 다 핑계에요. 그건 다 가식이고 진짜로 우리 안에 흐르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내가 승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승자가 되면 그건 내가 이익 본 거고, 계산해서 별로 손해 봤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역대상 18장에 다윗이 블레셋을 이겼지요. 그 뒤에 에돔을 이기고, 모압을 이기고, 암몬을 이기고, 그다음에 아람을 이기고, 이기고 할 때에 13절에,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왜 다윗을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는가? 최종적으로 전체를 다 이긴 다윗, 세상을 이겼지요. 그러나 다윗은 구원은 불가능해요. 그 최종적으로 이긴 그 다윗과 하나님 나랑 결전의 마지막 싸움을 붙자.
그래서 다윗의 임무는 뭐냐 하면 인간은 왜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냐, 그걸 보여주는 의무와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신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이기는 자가 영웅이 되는 세계기 때문에. 그래서 이 땅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이길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이길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이 땅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살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켜요. 공부를 하면 무식에서 유식으로 바뀌겠지요. 유식으로 바뀌면 이 땅에서 이길 자격을 획득한 게 되고, 이길 자격이 있는 자만이 살게 된 것이 이 세대의 이 세상의 정의에요. justice 이게 공정입니다, 정의입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활동과 조직의 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체계, 그런 범주의 세계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다윗은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이겼다. 이겼는데 전쟁에 이겼으니까 이긴 자에요. 전쟁에 이긴 자입니다. 전쟁에 이긴 자와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구원에 관계도 없고 구원되지도 못할 짓을 다윗은 왜 평생 했을까? 그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영웅이 된다고 해서 그게 구원이 되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시범자로 다윗이 뽑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걸 이겼는데 결국 다윗은 누구와 패배하느냐? 주님한테 패배하고 그것은 곧 주님과의 결별을 의미하고 그래서 다윗은 이 땅에서 영웅이 되고 이긴 자인데 구원되지 못한 자로 하나님 앞에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그런 역할까지 다윗이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란 그거에요. 이스라엘 역사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법에서 나온 것은 법이다. 여기다 육에다 하나 더 집어넣읍시다.
육에서 나와서 할 줄 아는 것은 육적인 일, 살아남는 것, 계산하는 것, 나한테 무슨 이익이 오느냐, 그것 하는 것 육에서 나와서 육의 방식으로 살다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나 더 집어넣으면,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갔다가 도로 어디로 옵니까? 육으로 오지요.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 말은 기어이 나는 이 땅에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승자가 되어야 된다. 그걸 어디서 가져오느냐? 법에서 와서 할 줄 아는 게 법적인 조치, 법적인 생각에서 마지막 어디로 가겠어요? 법에서 와서 법으로 가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번에 갈라디아서 합니다, 수련회. 3장에 보면 법아래 있는 자는 어떤 자이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저주 아래 있는 자다. 그러니까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지요.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떤 일이 났더라도 이 일 뒤에 나한테 돌아오는 콩고물은 이득은 어떤 것을 자꾸 계산만 하는 이러한 나는 나 이퀄 곧 뭐냐? 저주 덩어리.
더 축소하면, 나는 곧 저주다. 이 저주, 박 저주, 최 저주, 김 저주. 나는 곧 저주에요. 저주가 저주 값을 하면서 칠십이고 팔십이고 살아가는 거예요.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하면 대번에 나오는 게 참석해서 나한테 이익이 뭔데? 계산합니다.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참석하면 하나님이 복 주나?
성경공부를 하고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출발 자체가 육이고, 육이니까 마지막 어디로 돌아가느냐? 본인에게로 돌아가요. 천국이고 구원이고 관심도 없고 내가 이 땅에서 내가 너한테 이겼잖아. 이겼다는 쾌감과 정복감 다윗처럼. 그 정복감에 도취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18장 13절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다윗도 이기게 하잖아요.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는데요. 우리 애가 공부 잘했어요. 그래 애 공부 잘한 것과 자기 구원받는 것과 자기 애 구원받는 것과 관계있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이런 내가 생각하고 사고방식과 모든 행동은 전혀 모든 게 구원 안 되려고 환장한 행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구원에 불가능한 태도만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모든 게 주변이 법적인 의미로 체계화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저주 아래 있다고, 이왕 말 나온 김에 내가 알기론 갈라디아서 3장 10절인데 요즘 맞는 게 없잖아요. 이건 맞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율법을 대하면서 자기가 바로 하고 싶어도 내 죄가 우세한 것을 보이는 걸 통해서 자기가 율법 아래서 화로다, 내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저주 아래 있는데 무슨 복을 기대합니까? 저주 아래 있어야지요. 그건 당연한 거거든요. 주께선 모든 일을 당연하게 처리해요. 저주 아래 있기에 그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이겼다,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역대상 19장에 보면 거기서 암몬 자손과 전쟁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근데 사무엘하 이 대목에서, 역대상 19장에서 암몬과 전쟁하게 된 경우가 암몬 쪽에서 오해를 해서 그래요. 아버지 죽었다고 조문 보냈더니만 스파이 보냈다고 해서 그 외교사절을 아주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다윗의 화를 돋우어서 어쩔 수 없이 다윗이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게 됐어요.
여러분 번거롭겠지만 사무엘하 보겠습니다. 방금 역대상 19장 1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사무엘하 10장 1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해서 다윗이 좋게 좋은 손을 내밀었는데 오해해서 다윗이 보낸 외교사절을 볼기짝을 자르고 해서 수치스럽게 치욕을 안겨서 돌려보내고 그래서 전쟁하는 이야기에요.
역대상에서는 나중에 19장에서 요압이 암몬 자손을 이겼다고 돼 있지만 19장, 20장에 그렇게 돼 있지만 사무엘하 11장에 이렇게 돼 있어요. 중요합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1절)
그러니까 전쟁 중에 있어요. 전쟁 중에 있는데 계속 다윗 쪽이 승리를 해요. 그러면 인간들 보기에는 이 전쟁에 대해선 다윗이 승리자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을 수 있는데 그다음에 2절에,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사무엘하 11장 2절. 지금 다윗은 여유만만해요. 요압이 전쟁을 잘해서. 그런데 저녁때에 보니까 저 아래쪽에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데 너무 아리따워 보여서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과 함께 동침을 했습니다.
자, 지금 이 사무엘하 11장 이 대목, 한쪽은 전쟁 중인데 전쟁에 승리하는 것과 다윗이 구원받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다윗은 승리자지 구원된 자는 아니에요. 요새 말로 하면 다윗은 부자에요. 하지만 구원된 건 아니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 가난한 자나 부자나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조리 다 구원에 불가능합니다. 구원이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뭘 보이느냐 하면 불가능한 것이 다윗을 통해서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다윗 개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보디빌딩 하는 사람들 체육관에 이런 운동기구가 있어요. 손으로 무거운 쇳덩어리를 드는 거예요. 캐틀 벨Kettlebell. 캐틀 벨이 지 혼자 방방 뜁니까? 무거운 쇠인데 안 뛰지요. 캐틀 벨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여기에 누가 와서 손으로 이걸 들어줘야 돼요. 손잡이를 들어줘야 돼요. 이게 바로 매개체, 이게 매개자에요. 불가능한 쇠가 위아래로 내려올 수 있다는 이 쇠와 매개자의 손이 연결돼야 돼요. 결합돼야 돼요. 매개자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쪽은 철저하게 뭐냐 하면 구원 불가능함이 도드라지게 등장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도 이 캐틀 벨이 알아서 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런 경우 있으면 안 돼요.
지금 인간세계에서는 다윗이 주변나라를 이겼어요. 하나님이 이기게 해줬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윗을 생각할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대단해요, 영웅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교회도 나오고 장로인데 한 달 수입이 오억이고 너무너무 잘 살아. 사람들은 그 사람보고 뭐라 합니까? 복 받았다, 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자도 지금 구원에 불가능하고 그 부자 장로도 구원에 불가능해요.
다른 걸 봐야 돼요. 넉넉하게 산다고 해서 복 받은 게 아니에요. 복은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성, 구원에 대한 불가능성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게 복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무식한 자는 이길 자격이 없고, 이길 자격이 없는 자는 살 자격도 없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살 자격 없고 무식하다 이 사람들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불가능성을 습득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사람대우 못 받아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주 받게 하는 합당한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라고 받아주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강도질해서 마지막 십자가라는 처형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내리는 정당한 조치를 저에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 눈에 뭐가 보이느냐? 옆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다가오는 거예요.
왜? 내 법적인 체제, 법적인 의미가 이제는 거덜 났거든요. 내 법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제는 기댈 게 전혀 없음을 아무리 계속하고 나의 이익은 뭐냐, 백날 해도 법적으로 너는 더 이상 챙길 게 없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 “저분은 의인인데 왜 우리처럼 죄인도 아니고 의인인 분이 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지? 맞다, 그거구나.”
주께서 이야기하시는 대신,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께 부여받은 그 일이 불가능한 것을 들어 올리는 중보자, 매개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것이 눈에 싹 들어오지요. 눈에 들어오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나는 절대로 구원될 생각도 없고 구원되어서도 안 되고 천국 가서도 안 되고 난 지옥 마땅한 존재란 것을 이게 기쁨으로 확 느껴져요.
비로소 그 강도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동시에 천국 갈 길도 알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알았던 거예요. 나는 내 계산할 가치도 없는 존재, 나는 이미 하나님과 단절돼 있다. 단절돼 있으니까 중보자가 와서 캐틀 벨을 잡아당기듯이 주께서 잡아당길 때만 비로소 나는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강도가 이야기했어요. 땡겨주이소.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땡겨주이소. 오천 땡기라, 그런 것 말고 그냥 땡겨달라는 거예요.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지? 강도 주체에. 네가 니 땡겨줄게.” 그래서 구원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합니다, 백날 외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요. 그거는 하나의 이렇게 하면 일종의 꼼수거든요. 저의 겸손함을 봐주시옵소서,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꼼수엔 주껜 통하지도 않아요. 꼼수 쓰고 금식하고 낮추고 하는 것, 그것 또 계산하는 거예요. 이런 기도가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올까? 법적인 의미.
사무엘하 11장에 다윗은 제3의 인물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왕이죠. 밧세바는 왕은 아니에요. 신하 부인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튼 왕은 자기밖에 없어요. 그리고 자기는 승자입니다. 최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승자는 다윗이에요. 왕이에요. 왕이라서 밧세바가 어떤 여자든 관계없어요. 왕이 지시하고 명령하게 되면 무조건 밧세바는 여기에 순복해야 돼요.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다윗은 다윗과 밧세바의 2자 관계, 두 사람의 관계 그것을 생각해서 나는 너보다 승자고 나는 너보다 높은 자인 것을 인식합니다. 나는 더 오래 살아야 되고 나는 더 정당해야 되고 나는 항상 의로워야 된다는 것을 밧세바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은 어디로 들어옵니까? 법을 실시하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게 어디로 들어와요? 법으로 들어오지요.
아까 제가 했지요. 법으로 들어온다는 말은, 나는 기어이 뭐가 된다? 기어이 승자가 돼야 된다. 오직 이 일념 외에는 다른 일념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지금은 어렵게 살아도 이 일념만큼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합니다. 어디 버릴 수가 없어요. 딱 들어붙어 뗄 수가 없어요.
누가 막 때리면 “너는 이렇게 얻어맞으니까 패자잖아.” “아니야. 나는 맞으면서도 때리는 네 주먹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는 나는 도인 같은 마음이 점점 더 생기는 걸.” 이런 쓸데없는 이야길 왜 합니까? 비록 육체적으론 약하지만 정신적으론 이겨보려는 그런 심보잖아요. 그걸 계산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부부사이든 가정사이든 모든 인간은 모든 의미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단독자들이고 개인플레이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모든 현실의 최종 승리자가 자기가 될 것이라는 그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겁니다.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 1931)라는 영화에 보면 어떤 눈먼 소녀가 힘들게 살 때 그걸 불쌍히 봤던 뜨내기 머슴아가 지가 힘들 게 힘들게 돈 모아서 소경이 구걸하는데 가서 조금씩 도와줘요.
부자가 아니니까 조금씩 도와주고 하는데 어느 날에는 진짜 목돈이 생겨서 그 소녀에게 줬고, 그 소년은 왜 돈을 주느냐 하면 수술만 하면 눈 뜰 수 있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서 수술 못해서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 소녀가 아무것도 보이질 않을 때 돈을 쥐어주는 거예요. 그 돈 모아서 소녀가 수술해서 눈을 떴어요. 그런데 그동안에 부자 돈 훔쳤다는 오해를 받아서 뜨내기 소년은 교도소 가버렸어요. 그동안에 소녀는 수술하고 번 돈으로 꽃집을 세웠단 말이죠.
눈을 뜨니까 소녀가 나한테 이렇게 눈 뜨게 도와줬던 그분은 분명히 익명의 자비심 많은 부자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부자께서 이제는 눈 떴으니까 날 찾아와서 만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풀려나와서 찾아보니까 소녀가 이제는 말짱히 눈 떠서 아담한 꽃집해서 잘 먹고 잘 살거든요.
차마 말은 못하고 있는데 소년이, “당신이 잘 된 것 보니 기쁩니다. 악수나 합시다.” 그러니까 소녀가, “어디 뜨내기가 허름한 게 나한테 어딜 악수를 청해.” 그래도 소원이니까 악수나 해보자. 악수하는 순간 전에 눈 감았을 때 있던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돈 줬던 그 돈의 감촉이 살아나잖아요. 그때 소녀가 하는 말이, “당신이 그 사람이었어요?”
차라리 눈이 감았으면 차라리 소경 되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어요. 소경이 눈을 뜨니까 환상을 하는 거예요. 어떤 부자가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요. 인간은 눈 떴으니까 도로 눈 감으세요. 그리고 내가 아무 능력 없고 나는 눈 뜰 수 없는 구원에 불가능 자에게 주께서 나에게 찾아와서 구원을 해줬을 때 우리는 바로 당신이군요, 나를 소경으로 간주해주신 유일한 분, 나로 하여금 무능한 자로 유일하게 간주해주신 분, 나로 죄인 중의 괴수요, 천하의 강도로 인정하시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10분 쉽시다.
|
첨부파일 : 20230602a 울산강의.hwp (58.5K), Down: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