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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4 18:52:45 조회 : 43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2장 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언급함으로서 의도적으로 패 갈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할 거야’ 이런 뜻이죠.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기존의 이 세계에서 바리새인의 논리와 신학이 하나님의 관한 모든 이야기가 먼저 전제적으로 확 퍼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거에요.


전제가 뭐냐 하면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보시기에 전제가 유대 사회의 전제가 뭐냐? 바리새인의 신앙관, 이게 다 퍼져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바리새인 신앙관 이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바로 예수님 하시고자 하는 말을 그냥 하시면 되지 않겠느냐. 그럼 우리가 알아들을 텐데’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난 주일학교 설교도 했지만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지요. 아담을 창조하시고. 자, 아담의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어느 정도로 좋으냐를 하나님 스스로 이 좋았다는 이 개념을 하나님 스스로 이걸 승화시킵니다. 초월시키죠.


그러면 아담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어요.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다고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그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저주받는 자로 태어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어요. 그 계기가 선악을 아는 나무를 과실을 먹지 말라 라고 할라고 하시면서 그 먹지 말라는 그걸 계기로 해서 아담은 죄를 짓게 됩니다.


선악과 나무 없었으면 죄라는 성립이 없지요. 나무를 안 심었으면 선악 나무를 안 심었으면 죄라는 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선악 나무를 심었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죄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실려고 하는 거에요.


아담으로 죄를 짓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이 사실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것이 손상되겠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아담은 망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것은 비록 아담이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그 자체는 완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아담의 자리를 없앰으로서 그 뒤에 준비된 아담이 전면에 나서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그 원리 원칙에 대해서 첫 번째 아담을 죄로 없애버리고 죄가 없어져야, 죄가 발생 되서 이것이 죽어줘야 비로소 그 뒤에 준비된 아담,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전 우주를 통치할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아담의 자리가 없어지는 일과 연동하여 병행하여서 준비된 아담이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이 죄지은 아담의 자리가 연속적으로 어디까지 퍼졌는가? 바리새인의 나라, 바리새인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나라, 이 나라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죠.


왜냐하면 바리새인이 죄를 지적함으로서 그 배후에 진짜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수님의 복음의 세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있어요. 예수 믿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없애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언급을 해요. 그분은 뭐로 모르느냐 하면은 죄가 없어지면 의도 같이 없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그럼 왜 그분은 우리가 죄 없어지면 주께서 주신 의만 나타나니까 우리 구원해 주시지 않겠느냐 그 생각을 왜 하느냐 하면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의 의식이 뭐냐 하면은 개인 구원입니다. ‘개인 구원’.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의 세계에 있는데 아담의 후손들의 특징은 뭐냐? ‘나만 구원 되면 되잖아’ 쪽이에요. 지금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지요. 내가 구원받으면 되잖아.


그래서 복음의 세계는 이 바리새인들이 ‘나만 구원 받으면 되잖아 내가 율법대로 지키면 되잖아’ 라는 식의 이것을 주님께서는 그걸 뭐로 봤습니까? 외식, 다른 말로 하면 기만 또는 위선 또는 속임수로 보는 거에요. 주님께서 왜 그런 식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왜 그걸 하나의 위선으로 보시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어떤 믿음의 성과를 내었다는 것을 일체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세계의 개인은 오직 한 분으로만 국한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한 분의 공로로 그 세계가 펼쳐집니다. 산 위에 저수지 댐이 터지면 그 물이 그 산 밑에 있는 여러 농가에 골고루 퍼지듯이 위에서 오는 주님의 개인의 성과가 물이 흐르듯이 은사가 흘러서 구원 받아야 될 그 사람들에게 주게 됩니다.


주게 되면 거기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이루었다 라는 현상으로서 구원이 등장하는 거에요. 현상. 현상이니까 뭡니까. 내 소유가 될 수 없지요. 현상이니까. 어떤 조명을 내 얼굴을 딱 비치면 나는 빛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그 빛에 의해서 드러난 현상입니까? 너희는 빛이요 할 때 우리가 빛을 소유하였습니까? 아니면 빛이 복음의 빛이 우리 얼굴에 비친 거에요? 비친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있어야 돼요. 바리새인이 꼭 있어야 되고 마귀가 있어야 되고 불신자가 있어야 되고 우리 인간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인간이 어떤 차원에서 지적을 받아서 그들의 한계를 들추어지면서 ‘너는 아니야’ 라는 그 작업을 바로 이들이 있음으로서 이 죄인들이 있음으로서 이게 실시가 돼요.


이들 없이 따로 주께서 마련하는 게 아니고 이들을 없앰으로서 복음의 세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의 세계는 이 없애야 될 인간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겠지요. 그 공격받는 대표적인 그 사상과 철학이 뭐냐?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 그들의 자기의 기만과 자기 속임수와 자기 위선을 언급했고 바리새인들은 그걸 그들의 이러한 외식, 그러니까 예수님 평가하기에 그들의 자기 기만을 그 당시의 유대 사회에 보편적 신앙관으로서 이미 유포를 쫙 깔아놓은 거에요. 그것도 권력으로 쫙 깔아놓은 겁니다.


깔아놨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하시는 것은 그 바리새인의 그 의견에 대해서 누구도 군말 못하고 그게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누구나 인정을 이미 한 상태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섬깁니까 안 섬깁니까?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섬겨요 안 섬겨요? 막 바알 믿고 부처 믿고 이렇습니까? 아니지요. 바리새인들은 뭘 안 섬긴다? 우상을 안 섬긴다.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안 섬깁니다. 누가?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안 섬겨요. 우상을 안 섬기는 대신 뭘 섬깁니까?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도 누굴 섬겼어요? 여호와죠. 여호와를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자체를 뭐로 봅니까. 이걸 하나의 위선으로 보는 거에요. 위선. 바리새인은 이 우상이라는 것을 안 섬김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을 대표하는 모든 인간은 신을 섬길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우상도 안 섬길뿐더러 우상을 안 섬긴다는 말은 신을 안 섬긴다는 말이고 신을 안 섬긴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신을 섬기는 그 방식에 대해서 내가 나를 섬기는 방식을 이어서 신을 섬기는 거에요. 여호와를 섬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섬긴다는 방식으로 자기를 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외에 누구를 섬길 방법도 없고 반길 마음도 없고 자기 말고 다른 대상을 섬길 줄을 몰라요. 그게 부처가 되든 예수가 되든 뭐가 되든 그거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로서 나를 발전시킬까 하는 그 방안으로 신을 자기 세계에 도입시킨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결론은 인간은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 아니 섬길 줄을 모른다. 왜? 개인주의니까.


개인주의의 결과가 개인 구원이에요. 개인 구원. 뭐 어쨌든 간에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잖아요. 그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선악과 따먹고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잖아요. 신이 둘이 될 수가 없어요. 하늘의 태양이 두 개가 아니잖아요. 신은 오직 내가 신처럼 내가 이미 신으로 작정해놓고 그 다음에 어떤 부처를 섬기든 예수를 섬기든 그거는 나도 신이고 당신도 신이라고 해줄게 하는 서로 동등차원에서 하는 거에요.


왜 이게 바리새인이 외식이 되느냐? 복음의 세계에서는 주와 함께 해야 돼요. 누가 깨지겠습니까? 개인주의가 일체 용납이 안 됩니다. 주와 함께. 아까 유투브 찍을 때 언급했어요. 종속, 종속자. 아시죠? 인간은 그냥 그릇에 불과합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에 불과해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모조리 다 외식이고 악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드는 자기 일들 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그냥 무심코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일이 되느냐? 복음의 세계와 충돌을 일으키는 주와 함께 라는 새로운 복음으로 제시된 주의 일을 훼방하고 모독하고 방해하는 일이 나의 모든 평범한 일입니다.


평범한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 이 말이에요. 평범한 나의 일이.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누구 잘되기 위해서? 죽 써서 개 주기 위해서 하지는 않잖아요.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일의 혜택과 이득이 누구한테 옵니까? 내가 예수 믿고 헌금하고 모든 혜택이 누구한테 온다? 내가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다는 그 아이디어 때문에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외식이고 그게 위선이고 기만이고 거짓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지고 자기 기만이라고 이야기하느냐? 그 내용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소설인데 소설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한데 어떤 여자 분이 주인공이 목걸이를 훔쳤어요. 누구 목걸이를? 자기 목걸이를 자기가 훔칩니다.


자기 목걸이를 자기가 훔치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왜냐 하면은 이 목걸이가 자기 돈을 다 써서 산 귀한 목걸이가 아니고 자기 삼촌하고 같이 동업해서 산 목걸이에요. 보관은 자기가 했고 삼촌은 멀리 있고.


그런데 자기가 돈이 필요해서 이 목걸이를 비싼 목걸이를 돈 주고 팔아버렸어요. 이제 문제가 커졌습니다. 삼촌이 와서 우리 같이 산 목걸이 잘 있냐? 물으면 답변 못하잖아요. 그래서 가짜 목걸이 유리 목걸이로 딱 대체해놨어요. 대체해놨는데 삼촌이 와가지고 야 나 돈 쓸데 있다 우리 목걸이 팔아야 되겠다. 그 목걸이 다음 주까지 내놔라. 돈이 궁해서 안 되겠다. 우리 목걸이 좀 팔아가지고 돈 좀 써야겠다 이렇게 하니까 그 여자 분이 자기 집에 들어가서 몰래 자기 목걸이를 훔쳐가 버려요.


왜? 삼촌한테 우리가 산 목걸이 절도 당해서 잃어버렸다고 할려고. 그 목걸이 소설의 핵심이 뭐냐 하면은 이게 가짜라는 것이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목걸이를 귀하게 외부에 알려버리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일을 들키면 안 되잖아요.


들키기 싫어서 뭐냐 하면은 오직 하나님만 충성한다는 믿음으로 바깥에 드러내는 거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 이게 자기 기만이고 외식이고 속임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을 알아요. 이 바리새인의 공동체는 개개인의 구원들이 모인 공동체에요. 그 공동체가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전부 다 각자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그냥 모여 있는 거에요.


그들이 모였는데 생각들이 똑같아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여호와를 믿자는 거에요. 여호와를 경배하고 숭배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 이스라엘의 본분이고 도리라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호응했겠습니까? 그 바리새인의 신앙관에 누가 거기서 동조했겠어요? 전체 유대민족이 다 동조했겠지요.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조를 한 거에요.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나 바리새인이나 공통점이 뭡니까? 무슨 구원? 개인 구원이기 때문에. ‘개인 구원’. 개인 구원에 왜 여호와를 왜 거론하고 하나님 섬기느냐? 인간의 우상을 섬기는 심보가 이미 구약에 나왔습니다. 우상은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우상을 섬기는 그 마음가짐이 아주 단촐하게 잘 나와있어요.


출애굽기 32장 8절 복음을 아는 사람들끼리만 유명한 구절이에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 밑에서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자, 분명히 그때 송아지는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하나로 합해가지고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서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게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4절에 아론이 주도적으로 선동해가지고 금가락지 빼가지고 이 신이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낸 신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왜 아론이 이걸 왜 선동했느냐 하면은 모세는 올라간 지 너무 오래 되서 올라갈 때 그 장비 같은 것 양식을 계산해보면 이제는 그 사람은 모세는 죽었어요.


이걸 이제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것을 산 자가 용납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지요. 죽은 조상에게 제사는 드리지만 그건 조상을 위함이 아니요 제사 드리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잖아요. 교회 가서 예수님을 섬길 때 죽은 예수님을 위함입니까? 살아있는 나를 위함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 제가 저 살기 위해서 저 지키기 위해서 하는 어떤 조치도 제발 주님 저한테 행하지마소서 그런 간절함으로 주님을 믿습니까? 제가 제발 저를 패대기쳐주세요! 주님 섬기는데 제 존재가 가장 큰 방해물입니다. 이걸 그냥 언제까지 주께서 지켜보실렵니까! 패대기 쳐버려야지. 그저 주님 섬기는데서 방해되는 저를 제껴버리고 주님만 영광 받아달라고 그래서 교회가십니까? 그래서 예수 믿습니까?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하는 것은 그걸 하지 아니하면 자기한테 손해된다는 생각을 때문에 그 일을 해요. 개인 구원의 특징이 그거에요. 나한테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되면 안하겠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엄연히 살아있는 것은 본인들이 살아있는 거에요. 살아있는 본인과 그 집단 유대나라 그것을 존속하기 위해서 그걸 살리기 위해서 구약에 율법들을 자기한테 적용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이걸 몰라서 그래요.


사는 게 욕심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사는 게.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게 욕심인 것을 몰랐던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고 주님도 살아있고 이게 겸상이 안 되는 겁니다. 같이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했지요. 아담을 제낌으로서 배후에 누가 나온다? 예수님 나오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건 제끼는 게 없잖아요. 그냥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 소유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거밖에 안되지요. 내가 살아있고 예수님 살아 있고 이런 경우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나를 죽일 때만 그 현장에 주님이 우리 육체에 나타나는 겁니다. 나를 죽이고.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돼 이유가 있지요.


우리가 내가 있으면 나는 끊임없이 나는 위선과 그리고 기만과 속임수를 우리한테 할당할 수밖에 없어요. 늘 우리에게 할당해야 돼요. 왜? 세상 돌아가는 것, 세상 돌아가는 것이 개인이 중심이니까.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되니까요. 내 중심으로.


그런데 막상 세상은 내 뜻대로 내 중심으로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마치 내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할라고 그렇게 시도합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해서 기만에 대해서 주께서 언급을 하시는 것은 오늘날 성도에게 동일한 멘트로 매일같이 언급하는 그 내용을 바리새인에게 먼저 푹 쑤시고 들어간 거에요.


이걸 지금까지 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했습니다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일은 모조리 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 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주의 일을 거론해도 결국은 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안 되지요. 한 60억만 하면 갑자기 60억 생깁니까? 안되잖아요.


그럼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니까 나는 세상 전체를 볼 때에 그다지 가치 있지 않지요. 가치 있지 않으니까 이게 화가 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내가 가치 있는 것처럼 속여야 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가치 없으면 가치 없는 것으로 그만 두면 되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 귀하다고 내가 말하지 못하니 내가 예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섬기는 나를 귀한 존재로 봐주기를 바라는 것 그게 바로 출애굽기 32장에서 했던 이스라엘의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아론이 주도해서 뭘 만들었습니까?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걸 송아지라고 한 적 없어요. 그 송아지가 아니고 뭐다? 그게 여호와에요. 왜? 모세는 죽었으니까요. 지금 죽은 자에게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재 모세는 40일 금식. 인간이 어떻게 40일 해요. 아무것도 안 가져간 사람이 40일 동안 연락 안 되어보세요. 세상에서도 아들 40일 동안 안 오면 가출 신고해서 제사지내죠.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여기 살아있는 것은 누가? 각자 각자가 갖고 있는 누가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여호와! OK! 금가락지 빼내. 하나님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돼요? 내가 여기 살아있는 내가 가치 있고 의미 있기 위해서는 여호와와 나와 어떤 연락 체제가 있다는 것을 그걸 확인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그 기만의 힘인지 모르지만 위선의 힘이지만 어쨌든 힘이잖아요.


속고 속는 이 세상, 서로 속지만 둘 다 속는데. 나만 쓰레기인가? 뭐 이런 식으로. 그 속는 그 힘으로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의 세계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주님의 세계에서는 인정한 적 없어요.


주님의 세계에서는 누굴 만나든 만남과 만남은 말씀을 집어넣고 만나야 돼요. 그 말씀이 뭐냐? “너 위선자지?” “그래 어떻게 알았지? 나 위선자야.” “너 기만하지?” “어떻게 알았어? 나 기만해.” 이 말씀을 가운데 두고 드디어 복음의 세계가 형성됩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제껴버립니다. 우리가 제낄 때 내가 먹고 마시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의 일이 아니었고 영화 촬영 누구 일이었습니까? 주의 일이죠.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왜냐? 세상은 내 뜻대로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을 하거든요.


자, 주께서 선하게 이끄셨다. 누구를? 죄인 된 아담의 후손을. 왜? 나를 죽이는 그 작업을 통해서 그 현장에 네 일은 없고 다 예수님 나의 일인 것을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나를 죽이고 주님이 사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일을 하시는 것, 그게 복음의 세계고 말씀의 세계에요.


사는 게 욕심이거든요. 사는 게 욕심이기 때문에 안 죽을려고 하는 것도 이게 욕심이고 그 욕심이 욕심 아닌 것처럼 위장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되는 겁니다. 그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주의하라 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지금까지의 강의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모두 다 개인주의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떤 일을 해도 인간 사회에서 이 개인 사회에서 이 개인의 공동체에서는 전파되는 것, 전파되는 정보, 모든 지식이나 지혜 이거는 누굴 증거하기 위함입니까? 각 개인을 증거하기 위함이죠. 인간 사회에서는.


누굴 만났을 때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내가 흡수하고 흡수하게 되면 누구한테 이익입니까? 나한테 이익이잖아요. 이게 개인주의잖아요. 상대도 또 다른 사람한테 배웠을 거에요. 전부 다 개인주의잖아요. 그러면 인간사회에서 전파되고 전파되고 계속 유통되고 있는 것은 뭡니까? 각 개인을 증거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한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일은 이 세상 전체가 각각 인간 잘났다 인간 훌륭하다 와 누구 대단하더라 누구 뭐 수영 200m에서 은메달 땄고 쭉 나오거든요. 한 뭐시기 누구는 18살인데 피아노 1등하고 대단한 거 나오지요. 전부 다 인간 개인을 증거하잖아요. 아이고 부럽다 대단하다.


그런데 뭐가 신기하냐 하면은 복음이 전파되는 게 신기한 거에요. 전부 다 개인주의자 밖에 없는데 전부 다 유월절 칼날로 천사가 와서 개인을 다 죽여버리고 그 배후에 주께서 일하심을 드러낸다는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너무나 신기한 일이에요. 이 신기한 일을 여러분들이 맛 보고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복음이 안 기쁘다는 것은 그거는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고 이 복음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요렇게 복음을 아주 모독하는 방식으로 이걸 가공시켜서 받아들이면 이거는 결국 이거는 나는 예수 잘 믿는다는 자기 개인주의 자기 영웅담을 전파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복음만을 전파한다는 것은 아 이거는 그야말로 주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복음은 인간의 방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파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2절 넘어갑니다. 2절이 뭐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제끼는 거에요. 복음은 바리새인에게 위선을 지적했던 그 지적이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현장에서 모든 아담들을 향하여 이브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러면 그 바리새인에게 지적했던 그 지적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죽음 없이는 주님의 살아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죽음 없이는. 복음이 와서 아담에 속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이게 되고 그러면 그 현장에서 누구만 살아납니까. 주님의 살아있음이 드디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 복음의 나라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죽었을 때 나의 믿음은 살아있을까요? 그것도 죽어질까요? 부정될까요? 어떻습니까? 나의 믿음도 같이 날라가 버리죠. 나의 믿음이 개인적 믿음이잖아요. 개인주의 믿음이잖아요. 나의 믿음 가지고 다른 사람 구원하는 거 아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잖아요. 차이 있잖아요. 내 믿음은 나에게 이익이지만 주님의 하신 일은 자기 백성을 살리잖아요. 어느 믿음의 질을 동원시키겠습니까 주님께서. 주님의 믿음을 동원시키죠. 그러면 뭐가 방해되겠어요? 나의 믿음이 방해되겠지요. 에이 네 믿음 밟아버리죠.


그럼 내 믿음 밟아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믿음 있는 사람 돼요? 믿음 없는 사람 돼요? 없는 사람 되지요. 믿음 없어서 구원 받는 겁니다. 믿음 없어서. 여러분들이 남한테 나 믿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에이~ 그것도 자랑이냐?!” 그것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어요.


금식은 음식을 안 먹는 거잖아요. 그렇죠?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을 안 먹는 것을 금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금식은 음식을 안 먹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먹는 그것이 금식이에요. 모든 걸 다 먹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가까운 환경과 주변 환경과 먼 환경을 구분할 수가 있는데 내가 여기 있다면 이 가까운 환경은 가까운 것들이 내 중심으로 이렇게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있는 환경, 지평선 넘어 멀리 있는 환경을 이 자체를 뭐로 규정하는가? 죽어야 될 죄로 규정하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이 가까운 환경에서 유대인들을 자기 사람 만들어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 유대 나라를 굳건히 할려고 하는 거에요. 이게 가까운 환경이에요.


가까운 환경에 하는 행동에 대해서 지적받은 경우를 최근에 본 적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23세 미만 아시아 축구대회가 결승전이 벌어졌어요. 축구대회. 한국은 일본에 초장에 다 깨졌고. 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2:0으로 이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우즈베키스탄 홈구장인데 주최 측인데 사우디아라비아 2:0으로 이겼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가 태클 거니까 선수가 그걸 이렇게 축구장 푸른 잔디에 누워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시간 간다고 엎어있는 사람을 질질 끌고 경기장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에요. 파울 먹었어요. 심판이 시간 측정하니까 네가 나서지 말아라.


우리는 내가 하는 일에 방해되게 되면 선수고 뭐든지 간에 다 들어내요. 다 들어내서 내 중심으로 정리하고 구성할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데 인간 주변 환경이 있지요. 주변 환경. 이 주변 환경이 점점 더 인간들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연구를 많이 해서 현재 20세기 들어와서 2차 대전 이후에 21세기 들어오면 이 주변 환경에서 아주 철저하게 연구들을 많이 했어요.


그 연구들을 하고 분석한 그 한 가지 예를 제가 들겠습니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극작가가 있어요. 연극 극작가. 연극 각본 쓴 사람. 이 사람이 노벨문학상 받았어요. 이 사람이 한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에요. 이 사람이 왜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가. 이 사람 노벨문학상 받을 때 그 현장에 가지도 않았어요. 시시하다고. 사르트르도 노벨상 주는 거 안 받는다고 했어요. 왜 이렇게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 연극을 보게 되면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두 배우가 나오고 뭐하느냐 하면은 모자 벗고 모자 쓰고 신발 벗고 신발 신고 그래가지고 쓸데없는 농담이나 잡담 한심한 짓거리를 쭉 하면서 그 1막 끝부분에 어떤 소년이 나타나가지고 “고도가 곧 오십니다” 하고 1막 끝나요.


그러면 1막 끝나고 2막할 때 관객들은 고도란 분이 오시겠지. 고도가 오시겠지 하는데 2막도 쓸데없는 잡담하고 모자 벗고 쓰고 이래가지고 2막도 끝나고. 결국 그래가지고 3막 4막을 하든 소용없어요. 고도는 결국 안와요. 연극이 그게 끝이에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짓거리는 잡답이고 한심한 짓거리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직장 마치고 골프를 치던 지가 해외에 놀러를 가든 빌딩을 사건 뭘 하던 간에 현대의 작가의 눈에 그리고 현대의 철학가의 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21세기에 사는 부조리에요. 아무 의미라는 게 없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주식 투자에 성공했다. 그래서? 소고기 사먹겠지. 그래서? 뭔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이미 박탈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받은 거에요. 막연하게 그냥 오지도 않는 고도, 신이거든요. 그냥 오지도 않는 신을 그냥 기다리는 거에요. 그러다가 죽어요. 후손은 또 신을 기다리다 죽습니다.


종교든 철학이든 희망이든 행복이든 인간은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고 한심스러운 세월만 낭비하는 삶, 이게 인간의 주변 상황을 연구한 거에요. 오늘날까지 이렇게 연구한 겁니다. 오늘날은 이것보다 더 많이 연구했어요. 정신분석학. 이 비슷한 이야기. 상징 세계.


이 세상에 신이 있고 어떤 초월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을 할 때는 언어를 통해서 말을 해야 하는데 그 언어는 절대로 의미와 불일치돼요. 어떤 언어든 사랑이 뭐냐?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건 뭐냐? 이뻐하는 것. 이뻐하는 건 뭐냐? 사랑. 그럼 사랑은 뜻이 없지요. 뺑뺑이 돌잖아요.


미장원 옆에 우체국, 우체국 옆에 미장원 이거 말 하나마나. 인간의 어떤 단어도 의미 없어요. 의미를 합치할 수가 없습니다. 전자는 뭐냐? 움직이는 입자. 왜 움직이느냐. 운동을 하니까. 왜 운동하느냐. 저쪽에서 밀기 때문에. 이게 뭐에요. 이게 물리학이에요.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물리학이든 화학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로켓트 올린다. 왜 올리는데? 올라갔어요? 올라갔다. 왜 올라가는데? 아무 의미 없어요. 너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부모가 이야기하죠. 왜? 그래야 네가 밥 빌어먹고 산다. 살아서 뭐하는데? 몰라. 네가 행복해야해. 행복이 언제 오는데? 이건 고도 오는 거랑 똑같아요. 행복은 언제 오는지 몰라요.


신발 벗고 신 신고 모자 벗고 모자 쓰고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위로 삼아 행복일 수 있는데 그 행복은 식상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행복이에요. 차라리 그거 말고 다른 행복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주변 환경, 인간은 개인주의는 자기 주변 환경에 족쇄에 묶여서 먼 환경을 볼 눈이 없습니다. 볼 눈이 없어요.


영국에 1600개의 교회가 문을 닫아요. 사람이 안 와서. 예배당 진다고 150년 걸렸는데 사람이 안와요. 200년 걸리면 뭐합니까.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바르셀로나 거기에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한 현대 건축물이 있지요. 교인 몇 명인데요? 성당 지어놔 봐야 소용없어요. 지금 프랑스만 해도 성당 400, 500개가 지금 매물로 다 내놨어요. 사람이 안 온다니까요. 교회도 사람이 안 오고 성당도 사람이 안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신의 개인주의에 있는 중력이 자기한테 갈수록 압축이 되어있어요. 그때 그때 즐거움이 끝나요. 심각한 교회, 예수님 그런 건 찾지도 않습니다. 개인주의가 점점 더 개인주의화 되거든요.


그래서 한 개인의 주변에 주변 환경, 이 주변 환경에서 점점 더 여기 압박이 가해집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깥에 있는 먼 환경에서 밀어버려요. 밀어버리면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주변 환경에 바리새인들은 이 유대 나라 질서만 잡히면 예수님이 뭐 하다가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먼 환경 주님의 복음 환경이 점점 압축을 하니까 이들이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위선과 허위가 점점 더 압축이 되겠지요. 압축이 되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믿은 게 아니에요. 뭐냐 정치, 권력을 믿은 겁니다. 이들은.


이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여호와보다 더 실감나요. 본디오 빌라도가. 이런 경우는 오늘날 신학교 나왔던 그 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합니까? 하나님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하지요. 실제로 그들 주변 환경은 노회입니다. 교단이에요. 신학교 가봐야 이게 실감나는데. 신학교 안 가봐서 이게 어느 정도로 노회, 교단이 심각한 줄 모르지요.


천주교는 기도문을 일괄해서 똑같은 모든 그 시대의 성당, 그 시간에 똑같은 기도문을 해야 돼요. 추기경의 기도문을 해야 된다고요. 지금 추기경이 좌파거든요. 천주교는 다 그래요. 우리나라 천주교는. 다 그 출신들이에요 그게. 그 주변 환경에서 이들이 예를 들어서 천주교면 천주교는 뭘 추구하느냐? 권력과 균형을 맞추는 거에요. 권력이 없으면 천주교회가 없으니까요. 천주교에 오지를 않으니까.


신부가 그 동네의 유지가 못되니까. 구민 체육대회 할 때 그 본부석에 신부가 앉아있어야 돼요. 큰 교회 목사랑. 개척 교회 목사는 못 앉고 큰 교회 목사는 앉아 있어야 돼요. 권력의 맛을 본 거에요. 이게 되가지고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그 자리를 못 내놓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71명이거든요. 산헤드린. 이쪽에 바리새인 35 이쪽에 사두개인 35 그 앞에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 재판 받는 겁니다. 이렇게 화기점처럼 이렇게 되어있어요. 반원에 35명씩 해가지고 71명.


이들이 여기에서 해가지고 예수님을 어디에 인수인계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현재 권력자에게 인수한 거에요. 이거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께서 먼 환경이 보이지 않는 희미한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위선자고 진짜 죄라는 누룩이 들어있음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주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a-이근호 목사.hwp (157.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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