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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 20:16:02 조회 : 43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2장 18절부터 보겠습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인간이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 말씀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은 ‘성경은 나로 인하여 더 얻을게 없다. 나로 인하여 더 얻을게 없다’를 확정 짓는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말씀을 하신 분이 말씀만 던져놓고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 하신 분이 자기가 그 말씀을 하시면서 이 땅에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애들 어릴 때 바닥에다가 오징어 게임 비슷한 거 1,2,3,4 이렇게 해놓고 돌을 던진 아이가 그 돌을 찾아서 한발로 서서 돌을 찾잖아요. 돌을 던진 아이가 돌을 회수하기 위해서 다시 그 자리에 한쪽발로 뛰지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함께 오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 지켜서 더 얻을 것은 없어요. 그럼 우리의 일상은 뭐냐 하면은 내 것이 얻을게 없으면 우리는 평소에 나서지 않는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의 취지만 알아버리면 세상 편한 삶을 사는 거에요. 나로 인하여 얻을 것 없고 주님에 의해서 얻을 것밖에 없으니 얼마나 편한 삶입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이 말씀 찾을 때 그 말씀의 내용이 두 진영으로 되어있어요. 말씀의 내용이. 이래서는 안 된다와 이래야 된다. 두 개에요.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러해야 된다. 딱 이 두 진영. 그렇다면 인간들의 몫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의 역할은 이래서는 안 된다 역할이 인간들의 역할입니다. 인간들의 역할, 이래서는 안 된다. 그게 오늘 아까 읽었던 그 말씀이잖아요.


어때서는 안 된다고요? “네가 농사가 잘 되서 곡식 크게 짓고 네가 말하기를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여러 해 동안 편히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돼있다”라는 역할은 누가 한다고요? 이래서는 안 된다 쪽에 속한 인간들이 그걸 이 역할을 해야 돼요.


이래야 된다는 역할은 우리 인간은 못해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역할만 해요. 우리가 하는 것이 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은 모르고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너는 이래서는 안 된다의 역할이야 라고 이렇게 알려주는 것. 그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네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이 이 말씀의 역할이지요.


그러면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데 왜 인간은 왜 하느냐? 이것은 인간들의 요구 또는 요청이 있어요. 이게 운명이든지 신이든지 누굴 대상하던지 간에 인간은 자꾸 뭔가 요구하고 요청해요.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네 라고 계속해서 그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과 이래야 된다는 주님 쪽이죠. 주님의 역할이죠. 주님의 요구와 요청이 서로 충돌합니다.


이 충돌하는 이 경계선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말씀의 의미가 규정이 돼요. 의미가 규정이 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의 표현이 해서는 안 될 것을 표현했고, 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다 라고 말씀의 경계선을 통해서 두 개의 판이 서로 충돌한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 인간들 요구사항 요청에 맞는 어떤 신을 원하는데 메시야를 원하니까 인간들 눈에는 인간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이렇게 돼요. 예수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왜? 찾아가도 못 알아보니까. 알아보지를 못해요.


그것은 인간들이 그들의 요구와 요청에 부합되는 신과 메시야를 따로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에.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란 우상을 돌파해야 돼요. 우상을. 제가 서울강의할 때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을 강의 녹취하시는 분이 그림을 그렸지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 실어놨는데.


십자가로 뚫어서 사진 뒤에는 십자가 튀어나오도록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말씀. 이게 뭘 뚫었다 했습니까? 율법, 문서화된 율법. 율법을 십자가로 뚫은 거에요. 찢어버린 거에요. 빵꾸 낸 겁니다. 율법 빵구 났으니까 율법은 쓸 데가 없어요.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은 이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율법대로 되는 그러한 신과 메시야, 하나님과 메시야를 원했던 자,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었어요. 그들은 아담의 후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고 날고 기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백날 해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안목 바깥으로 못 넘어갑니다. 똑같은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담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연구한 그 연구의 범위 내에서 우리는 노력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 지혜의 최종 정점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구축해놓은 그 지혜 밖으로 못 나갑니다. 왜 그런가?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아마 그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 있다면 그 똑똑한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 살해 됐을 거에요. 그들보다 더 IQ 높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한테 십자가에 죽었을 거에요. 철두철미하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바로 율법을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으로 그들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원했던 것은 그들이 진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었겠어요?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죠.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죠.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믿겠다는 본인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믿겠다는 본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거에요.


여기 물이 있거든요. 자, 물이 있다. 목이 마르다. 내가 원하는 물이 아니다. 그러면 물 바꿔야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춘향전에 변사또가 변사또의 생일 때 그 고을의 기생들이 왔을 때 한 명 왔습니까? 여러 명 왔습니까? 여러 명 왔지요. 거기에 사또 밑에 이방이 여자 하나하나를 소개합니다. “사월이~~” 소개하거든요. 그때 사또가 “엥!엥!” 하고 고개 돌렸잖아요. “춘월이~~~” “엥!” 하고 고개 돌린다고요.


주도권은 선택을 하는 사또가 본인이 요청하고 요구하고 싶은 바가 있어요. 거기에 부합되는 수발 드는 기생이고 싶다 이 말이죠. 더는 없느냐? 더는 없느냐 하니까 성경적이네. 이새의 아들 7명 외에 더는 없느냐? 뭐 꼬마가 하나 있는데 양 치러 갔습니다. 그 놈 대령하라 이거랑 똑같은 거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무시하는 게 아니고 아니까 자기가 확보한 그 정보와 부합되는 메시야가 아니면 메시야가 아니라고 여기는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결국은 그 바리새인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고 머리를 짜내도 십자가 사건을 부정할 수 있는 그런 심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이라면 예수님과 마주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에요. 이 충돌판. 그게 십자가가 모든 의미의 최종적인 겁니다.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나올 이유가 인간에서 나올 것은 다 가져와.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깊은 곳 이쪽에 가져와. 그게 예수님이에요.


저쪽에서 포카 할 때 콜 해서 저쪽에서 한꺼번에 다하고 이쪽에서 다해서 마지막에 까게 하는 거에요. 자, 까자 까. 누가 이겼는지 한번 까자. 에이스하고 텐 갖고 있으면 보니까 9 갖고 있으면 깔 때 손목에 뭐 하나 기어 나오지요. 슥 바꿔치기 해서 이겼다 하고 몽땅 다 가져가잖아요.


인간은 자기 지혜를 부정하기 싫어요. 하나님하고 겨누고 싶어요. 자기 우수함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면 그거 보태서 역시 우리가 하는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에게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아니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를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굳이 하나님 안 믿어도 하나님마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나는 내 스스로 자족스럽단 뜻이에요. 아쉬운 게 있더라도 견딜만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이쪽, 인간들의 심보를 가장 솔직하게 그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돼요.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을 믿지만 이건 뭐 어디까지나 이거는 취미고 나중에 한 20년 50년 믿어도 그거 뭐 이거 믿은 거 무효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챙길 건 챙겼다라는 자기 단도리가 돼있는 상태에서 교회 나오고 예수 믿습니다. 자기가 알지요. 아무리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내 목숨을 다 걸만큼 그 만큼 가치는 안 된다는 걸 본인이 알고 그걸 남들에게 속이고 신앙생활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 와도 별 아쉬운 게 없는 거에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뭐. 온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뭐. 와야 오는 거지. 안 와도 상관없는 자기의 대책은 다 세워놓고 그냥 한번 믿어볼까 이런 거에요. 생명보험회사 망했다고 자살하지는 않잖아요. 그냥 혹시 돈 주면 고맙고 안줘도 남의 돈 가지고 돈 떼인 것은 아깝지만. 그만큼 인간들은 극단적이고 싶지 않아요. 극단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대비책, 방어책은 다 챙겨놓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은 서로 상호 대립돼있다는 거에요. 대립된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신과 메시아를 아는 이상 절대로 예수님 쪽으로 건너올 재주는 전혀 없는 거에요. 전혀 없습니다. 주께서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예수님 자신을 구원할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이 자기 구원 안에 그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져버린 거에요. 다 이루어진 거에요. 다 이루어졌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구원되잖아요. 그럼 예수님 자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이러해야 된다, 이러해서는 안 된다 둘 다 다 들어있지요. 왜? 그래야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가 드러나니까요.


내가 누구한테 당했는지 당했다는 그 공로가 아버지 앞에 유일하게 의로 인정받는다면 누구한테 당했는지 같이 있어야 되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역할도 예수님 안에 들어와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주 너무 간단하죠. 이 같은 말이 뭐냐 하면은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부르러 왔다. 같은 말이에요. 달리 말하면 내가 의사로 의사되기 위해서는 멀쩡하다고 여기는 자를 뭐로 만들겠다? 기어이 환자로 만들어서 나의 의사됨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사용하겠다는 이런 뜻이에요. 참 쉽죠 잉?! 굉장히 쉽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22절부터 보겠습니다. 결론은 굉장히 쉬운데 이 말씀은 굉장히 22절부터 34절까지 길지만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 말씀이 너무너무 어려운 말씀인거에요. 이 말씀이. 이 말씀이 왜 어려운 말씀되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이 바리새인 같은 사고방식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를 내가 괜찮은 하나님을, 하나님 쪽에서 괜찮은 말씀 하게 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괜찮은 말씀하게 되면 넙죽 그 말씀을 내가 지켜서 기어이 내가 나를 구원받는 나로 만드는데 이런 말씀보다 더 쉬운 말이 어디 있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에요.


“그래 참새 키우시고 까마귀 키우시는구나. 주여 저 한번 키워주소! 저 믿습니다! 키워주소! 됐다 됐어! 드디어 구원받았어!” 얼마나 쉬워요. “저 까마귀 될래요. 김 까마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아멘! 대번 준비됐던 아멘 튀어나오지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저 믿습니다! 됐지요?


내가 원하는 구원을 너무나 쉽게 들어주셔서 정말 상투적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배웠다고 신학교 갔다고 아는 게 아니고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이 말, 그 말이 더 어려운데. 너무너무 쉬운 거에요. 자신의 노림수가 들통나버린 거에요. 충돌판이 하나도 없어 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마지막 의미가 주님이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내가 이러하고 싶은 것이 드디어 달성했다는 나의 의미로 종결되면서 구원받았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구원 받았다고. 그러니까 뭐가 날라갔어요? 충돌판, 걸림돌. 다른 세 자로 하면 십자가가 날라가 버린 거에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모든 걸 관통하잖아요. 이것 보세요. 율법이고 뭐고 모든 걸 관통하잖아요. 찢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예수 믿는 마음은 안 찢길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는 빵꾸 안날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찢을려고 들이대니까 어어어~~~저 부활 믿을래요. 십자가 믿습니다. 빨리 부활주세요. 부활의 새 생명 주세요. 그 부활의 새 생명 안고 있다고요 거기서.


마치 그 솔로몬 시대의 요압인가 죽인다고 하니까 그 성전의 언약궤 붙들고 있다가 살라고 언약궤가 모든 죄를 용서하는 솔로몬이 가차 없이 끄집어내서 죽여버렸어요. 한번 봅시다. 요압이고 아비나단이고 그 구세력들. 요새말로 하면 좌파들. 요압을 죽이잖아요. 그렇죠? 그 2장 28절에 나옵니다.


왜 죽어야 되는가? 주께서 주신 새로운 추가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죽인 거에요. 추가되는 새로운 계시. 옛날의 계시를 붙드는데 그 계시는 뭐냐?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의 뜻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적용하는 그 인간을 그 다음에 나오는 새로운 계시가 죽여버리는 겁니다.


마지막 계시가 여러분 뭔지 아시죠? 십자가죠. 내 살과 내 피. 내 살과 내 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살거나 구원받을 자격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구원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때문에. 곧 예수님이 남기신 그 말씀을 구원한다는 말은 말씀을 다 이루시려고 오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셨어요. 홀로. 다른 이름 말고 예수님 본인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홀로 이루신 그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이에요. 다른 데는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 홀로에서만 구원이 나오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예수님 홀로하셨다는 고백만 나올 뿐이죠.


그럼 너는 뭐했는데? 나는 뭐 이래서는 안 된다 그것만 했지 뭐. 그래서 내가 한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에요. 내 자신에게 더는 얻을 것이 없다는 아까 그 말이 그 뜻이에요. 내 자신에게 더는 얻을 것이 없는, 내가 기도했다고 헌금했다고 더 얻을게 안 나와요.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현실인가? 무엇이 실제인가? 옛날 신학자들은 그걸 연구했는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실체고 무엇이 실제냐 무엇이 현실이냐 뭐 여러 가지 단어를 용어를 써가면서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진짜냐 하면 이건 진짜에요. ‘죽음’.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공평해요.


아무리 내가 진짜다 진짜다 우겨도 모든 인간은 차이 없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죽음이 진짜죠. 그 죽음을 확대시켰습니다.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불심판으로 바꿨어요. 뭐가 진짜냐? 불심판이 진짜죠. 불심판 앞에 차이를 논한다는 것은 이건 웃기는 이야기에요. 불심판 앞에서 한 달 수입을 논하고 불심판 앞에서 자기 아파트 평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차피 다 탈 건데요.


그래서 내가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우리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같이 결합이 된 사람 같으면 내가 죽는다,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어를 ‘내가’로 두지 말고 ‘죽음’을 주어로 죽음이 어디서 오는가를 봐야 돼요. 어디서 오는가. 이것부터 해야 성경해석이 돼요. 죽음이 어디서 오는가? 너, 나 차이 없이 똑같이 오는 죽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오지요. 네가 날 죽였잖아. 거기서부터 오는 거에요. 예수님 죽은 것은 언약이죠. 언약에서 오는 거에요. 언약이 뭐냐? 십자가. 십자가에 언약이 왔기 때문에. 도대체 이렇게 잘 나가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훌륭한 내가 왜 죽어야 되지? 그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이 십자가를 인간의 능력으로 건너올 수 없기 때문에 죽어야 되지요. 죽어야 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대구강의 요약하면서 우리아 장군의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에게서 오는 거죠. 그래서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언약이 살아있으면 되는 거죠. 언약 안에서 우리가 호명당하고 호출 당했잖아요. 너는 내 백성이라고.


그럼 언약 살아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 주와 함께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아 장군은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거에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아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취미고 내 단도리 다 했고 밉다가도 하나님 없어도 뭐 사는데 지장 없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뭐냐 하면 죽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죽는다 이 정도로 생각하는데 죽음이 왜 오느냐는 생각 안하고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살아있잖아요. 자기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 현실을 단기적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장기적 현실은 죽음까지 계산해보면 인간은 인간이 아무리 길게 살아도 죽는 순간은 죽는 순간이에요. 나는 96세 살았다 라고 하지만 송해가 죽는 그 순간은 그동안 죽음이 살아왔다. 주어가 바뀌죠. 송해가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네 안에서 살아왔다. 너는 껍데기야 껍데기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누구도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의 제대로 의미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다” 의미를 아시는 것도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너희에다가 건방지게 우리 자신을 집어넣을려고 합니다. 아 구원받기 쉽네. 십자가 안 믿어도 까마귀로 여기면 김 까마귀면 구원 받네 이렇게 된다고요.


24절에 까마귀를 생각하라 하니까 저 까마귀에요. 까마귀도 하나 해야 되고 1교시 까마귀 생각 2교시 십자가 생각 3교시 부활 생각. 이수할 과목이 한 두 학점이 아니에요. 많아요 지금. 자기도 나중에 헷갈릴 거에요. 인간은 십자가를 모릅니다. 몰라도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만 알면 돼요. 굳이 나까지 십자가 알 필요 없습니다. 주님만 십자가 알아서 그 십자가 집어넣으면 되는 거에요 우리를. 그만한 능력 주님한테 있습니다. 그만한 능력. 우리가 워낙 무식하니까.


우리의 죽음은 뭐냐? 십자가에서 오는 거죠.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는 거에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전부 다 십자가 그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살아도 십자가를 위해 죽어도 십자가를 위해 죽는다. 주의 행하신 일을 위해서 죽는다.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25절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이 이야기 듣고 성질 급하면 저도 동의해요! 이런다고요.


그럼 동의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이야기는 너희들이 이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네가 모른다는 거에요. 왜 모르는가? 의미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대립된 충돌, 마주칠 때 의미가 되는 것이지. 이거 쉽네! 백합 되면 되잖아. 이 의미는 무슨 의미를 놓치느냐 하면은 주님이 죽어야 될 의미를 빼버리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요. 의미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대로 안 지키면 된다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이 말씀대로 지적받으면 돼요. 지키지 말고 지적받으면 돼요 이 말씀을. 어제도 지적받고 오늘도 지적받고 내일도 지적받겠지요 뭐 이런 식으로. 말씀으로 지적받으면 돼요. 이걸 지킬 생각하지 말고. 왜? 우리 본심은 뭐냐? 내가 요청한, 나 잘해주는 내가 원하는 기준을 충족해주는 그런 메시야, 그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내가 꾸준히 원하고 있으니까요.


십자가가 없는 나로 죄인 만드는 그런 하나님 말고.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이렇게 칭찬해주고 우쭐대게 만들고 장려하게 하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고 있잖아요. 내 가치를 살려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디 건방지게 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여기 31절에 봅시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 나라를 구한다고 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 말씀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립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나라 구하는 게 뭐냐? 우리가 하나님 믿고 거기에다가 31절 말씀 그의 나라까지 또 구하고 더 보태가지고 보태면 완벽의 완벽을 기했으니까 이렇게 어지간히 해도 하자가 없겠지.


그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요 우리의 생각에 달라붙는 게 아닙니다. 안 달라붙어져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침을 당할 때 생겨나는 사건인데 어떻게 달라붙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준비했습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 반대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여러분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지요. 노래 가사 적어왔습니다. 좀 긴데요.


‘넌 모르겠지만 사랑했다 비정한척 했던 것 사과한다 남자란 이유로 널 떠나보내며 행복해지기를 바보처럼 기도했었다 흔들리는 날 잡던 두 손 이젠 독한 소주잔만이 날 위로해 두 눈 꼭감고 입맞추던 내 입술엔 해로운 담배 한 개피로 널 추억해본다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김장훈이 불렀던 ‘난 남자다’ 라는 노래입니다. 이 가사에 보게 되면 자기가 남자이기 때문에 쿨하기 때문에 이제 떠나보냈던 그 여자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잘 살아달라고. 이건 노래를 들어야 돼요. 나의 사랑 이젠 이게 발음 잘해야 돼요. “긋~바이~” 너를 보내고 나는 괴로웠어. 독한 소주와 해로운 담배 한 개피로 널 추억해본다. 그 정도로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내가 너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너의 미래에 대해서 다 기도하고 내가 후원하고 행복을 빌께. 왜? 나는 남자이니까.


그 뒤에 가사 보면 절절해요. 좋은 음식 예쁜 옷 볼 때마다 가난한 우리 지난날 떠올라 아무것도 못해준 너의 생일 올 때면 해주고 싶어도 이제 너 내 곁에 없구나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노래 알아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너 하나만 행복하다면 미련한 여자였던 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못 견디게 그리워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La La La La La.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이게 바로 그 나라 의와 정반대되는 심보입니다. 나는 비록 너한테 못해줘서 미안한데 그 미안한 감정을 나는 남자니까 내가 갖고 있다고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잖아? 이런 거. 이 정도하면 괜찮잖아. 멋있지 않아? 성의를 표한 거 맞잖아. 그 나라와 의, 나 하늘 나라 압니다 이러지 말고 그 나라와 의에 반대가 뭐냐를 생각해야 돼요. 반대가 김장훈의 난 남자다 가사 그대로가 반대에요.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성의를 다 표해줬다. 더 뭐 어쩌란 말인가. 이거는 쉬는 시간에 한번 들어보세요. 발차기 하면서 불렀던 노래. 바로 남자의 객기, 허세와 허풍 그 안에는 자기 정당성, 이걸 가지고 로마서 10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자, 하나님의 의 맞은편에는 뭐가 있다고요? 자기 의가 있어요. 자기 의. 더는 못해. 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뭐 어떻게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사과할게. 내가 미안해.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비록 떠나갔지만 너는 행복하기를 내가 빌어줄게. 됐냐 이정도 하면. 계속 누구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방어하는 거에요. 자기 방어.


이미 자기 의가 장착되어 있고 자기 의를 계속해서 고이고이 유지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그런 예수를 원하는 거에요. 누가? 오늘날 교인들이요. 어떤 신학이든 좋은데 그 신학이 나의 최선을 향하여 내가 이렇게 열심을 다하여 섬기는 이것을 옹호해주는 그런 신학이라면 오케이 내가 흔쾌히 받을게. 그러나 나를 개무시하는 그런 것은 나는 거부하겠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7장 28절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떡은 자녀한테 줘야지 개한테 줄 게 아니다. 어디 개가 넘보냐 할 때 이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말합니다. 넘봤어요.


다시 보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고 이래야 한다는 예수님 역할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는 인간의 역할이죠. 이 여인은 이래서는 안 된다에서는 뭡니까? 이렇게 했어요. “옳소이다” 했어요. 주님의 부정에 대해서 옳다고 이야기했어요. 내가 주님의 개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합당하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여인에게는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인간 보는 그 마음가짐이 여인에게 발생된 겁니다. 발생되지 아니하면 딸에게 있었던 이 악한 귀신이 떠나지 않아요. 귀신은 주님만 무서워해요. 주님만 무서워하기 때문에 주님과 동일한 어떤 마음이 발생되게 되면 귀신은 꼼짝도 못해요.


주님의 마음이 뭡니까? 너 죄인이야. 어딜 넘봐! 어디 구원을 넘봐? 영생을 넘봐! 이 개 같은 존재가! 라는 그 안목이잖아요. 그 안목에 대해서 옳소이다 하면 끝날 문제에요. 그래도 혹시 자녀가 먹다가 안 먹고 갖다버린 부스러기는 있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라는 말이요 뭐를 경유한 떡이에요? 이미 자녀가 먹고 여분의 것. 여분의 것이죠. 여분의 것이잖아요.


그 여분의 것은 어떤 자만 먹어요? 다른 사람이 그 더러운 것 먹겠어요? 누가 먹어요? ‘개’라고 자기가 개인 것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 주워 먹는 것을 주특기로 여기는 사람. 남 흘린 것을 자기 주식으로 여기는 사람. 그 자녀에게 준 떡이라도 주님이 준 떡이라면 영생의 쪼가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가 개라는 것은 관심 없고 저 떡이 어디서 나온 떡이냐가 저게 영생의 떡이다 하고 자기하고 바꿔치기가 가능해요. 자기 어차피 죽을 인간이니까. 지옥불에 갈 인간이니까. 바꿔치기가 가능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계획의 일부가 이게 노출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미국의 대법원에서 낙태죄가 일부 발표하기 전에 이게 뉴스가 되가지고 미리 빼돌려가지고 알려졌지요. 주님의 계획이 십자가 이후의 계획이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미리 빼돌린 셈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믿음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한 거에요. 바꿔치기가 가능한 겁니다.


왜? 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에. 개라도 뭐 점잖은 개? 개가 개지 뭐 점잖은 개, 훌륭한 개 뭐 그런 거 어딨어요. 개는 인간 아니라는 점에서는 똑같잖아요. 내가 주님 보시기에 인간 아닙니다 그 안목이 주님이 주신 안목에 의하여 비로소 이게 그런 고백이 나온다 이 말이죠.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이야기는 예수님하고 여자하고 이야기했는데 딸에게 있는 귀신이 나가버렸어요. 이 말은 여인이 훌륭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있어서 그 영적인 일에 귀신 쫓아내는 그 영적인 일에 있어서 여자를 파트너가 되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삼아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귀신이 이 여인의 딸에게 들어가도록 주께서 사전에 허락해놓고 들어갔던 귀신이 어떻게 빠져나온 그 경로를 통해서 주님의 안목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믿음은 이런 믿음이라는 것을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미리 흘린 거에요. 십자가 이전에. 십자가 이전에 그 흘린 사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48년 병자도 그렇고요. 그 베드로가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군데군데 흘렸는데 기적, 표적이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적과 표적. 떡을 주고 오천 명 나눠주고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누가복음 12장 봅시다. 26절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주께서 여기서 언급한 게 염려 언급합니다. 인간은 돌을 옮길 수가 있어요. 인간은 산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공사 건설사 와가지고 포크레인 파가지고 옳겨지지요. 아파트 지을 수 있어요. 인간은 홈런도 치고 높이뛰기도 하고 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높이뛰기 하면서도 염려하는 것은 인간은 염려하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흑인선수 아니면 1등 하는데 2등 했다고 메달. 우리나라 선수가 높이뛰기. 그 흑인선수만 아니면 금메달. 그 우리나라 선수가 충성! 하는 군인이 얼마나 염려했겠어요. 몇 년을 기다린 건데. 뭐 이 염려는 결국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뭐냐? 너희들 지금 염려하고 있다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a-이근호 목사.hwp (162.5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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