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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 20:16:33 조회 : 46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하나의 그 남자의 자부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염려하고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안에 염려가 출렁이고 걱정 근심이 출렁이기 때문에 그걸 나름대로 해소를 할려고 선악체제가 가동이 돼요. 착하게 살면 바르게 살면 뭐 복이라도 오겠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는 때려 죽여도 개가 안 될려는 거에요. 무의미한 존재, 다시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개는 개거든요. 사람 취급 못 받잖아요. 내가 어떤데 왜 내가 사람 취급을 못 받아. 여기 내부적으로 강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는 말은 주의 말씀에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는 말은 이미 강한 반발이 그동안 숨어있었다는 뜻이거든요. 숨어있었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과 복음이 딱 오니까 그게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거에요. 튀어나오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부터 내가 내뱉은 어떤 말씀도 그걸 충족시킬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것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음을 주께서 스스로 증명해나가시는 거에요. 구원은 예수님 자신만 구원하지요. 다른 사람은 구원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또 염려하느냐 되어 있지만 29절에서는 근심이라는 말 나와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절에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 점을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설명은 어렵지 않습니다. 망나니처럼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술 먹고 돈도 안내고 식당에서 행패부리면 어떻게 하지요? 경찰이 와서 잡아가지요. 잡아가서 어디로 갑니까? 유치장에 집어넣지요. 이걸 가지고 사회로부터 격리라고 합니다.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자, 이게 유치장입니다. 여기 여러 범죄를 저지른 사람 있습니다. 이 사람들 그냥 놔둡니까 아니면 새로운 주체를 주입시킵니까? 어떻습니까? 주입시키죠. 새로운 주체를 주입시키는 거에요. 이 사람들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 그 방법은 이 유치장 안에서 술과 담배를 금해버려요. 술, 담배는 이 사람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이게 보람이고 희망이에요. 돈 버는 이유가 술, 담배할려고 돈을 벌어요. 술, 담배할려고.


술은 현재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나로 만드는 물리적 방식이거든요. 담배도 마찬가지고요. 술, 담배 이거 전부 다 안 좋은 것을 모방한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 사람이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지었습니다. 뜻은 ‘내 아들에게 교훈한다’ 잠언 비슷하게 내 아들에게 교훈한다 그런 뜻인데요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써놓은 거에요.


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람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기능을 탁월하게 개발하게 되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 가운데서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지적 탁월성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성격적 탁월성이 있는데 지적은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 교육을 받으면 된다.


자, 인간이 어떻게 행복하게 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인간의 판단력,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개발하면 된다는 거에요. 자기의 숨어있는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개발하면 돼요. 개발하는 방법은 지적 교육을 받는 거에요. 두 번째는 성격적 탁월은 뭐냐 하면은 교육을 받아서는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이거는 뭐냐 하면은 좋은 성격을 뭘로 바꾸느냐? 습관으로 바꾸는 거에요. 습관으로 바꾸면 되는데 성격을 습관으로 받으려면 이거는 개처럼 훈련받으면 된다는 거에요. 훈련받으면 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든지 뭐가 있다? 이성이 있고 이성이 지금 개발 안 되서 그런데 이성만 개발한다면 여기 유치장에 있는 개망나니 같은 이런 사람들도 어떻게 됐다? 인간이 훌륭한 시민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라고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에게 뭘 주느냐 하면은 희망과 정당한 목표를 제시, 제공한 거에요. 이 방법밖에 없다. 인간은 행복이 최고 목적이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개발해야 된다. 그리고 이성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지금 그들이 개발 안 해서 술, 담배를 찾았다.


그런데 이들이 술, 담배를 찾는 것은 그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술과 담배를 먹는 그 가정환경과 분위기에 의해서 잘못된 습관들인 거에요. 그러면 유치장에서 뭐부터 끊어버립니까? 술과 담배를 끊어버리는 거에요. 끊어버리고 시민사회에서 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남들에게 피해가 어떤 피해가 주어지는가 이걸 이성적으로 호소하면서 그걸 교육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은 전부 다 하나같은 동일한 주체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걸 어떻게 한다?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서 이렇게 훈련시키면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이성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들풀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니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성은 뭐냐? 인간의 품위죠. 인간의 품위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다. 이게 바로 교육의 모토가 되어야 된다. 모든 인간 교육의 모토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 이 지옥 갈 사람, 복음을 모르는 사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만 모르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모르면 어디가 틀린 게 아니라 다 틀렸어요. 뭐가 틀렸을까요? 지금 이 사람,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요소를 빼먹었느냐 하면은 악마 요소를 빼먹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악마는 평소에는 안 나타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만 악마가 나타나요.


어제 대구강의 때 이야기했지요. 사울의 악신은 다윗이 등장할 때만 등장했다고요. 다윗 보고 창으로 찍을려고 했잖아요. 평소에 창 던지는 게 취미라서 잘못된 이성 가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이성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일려고 했던 건 이성이 아니에요.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귀신들린 자로 규정할 정도로 자기는 판단력, 명쾌한 아주 훈련 잘된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을 가지고 산 사람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는 개 같은 사람이었어요? 침 질질 흘리고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본디오 빌라도 그 총독 엘리트잖아요. 본인이 귀신들렸단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상상도 못하지요. 이렇게 명석한 이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귀신들 리가 없잖아요.


세이건, 코스모스란 책을 지었던 유명한 천문학자 세이건. 다윗 이후에 가장 칭송받는 사람들. 상 받은 이런 사람들 수학박사, 자기가 귀신 들렸다 하겠어요? 윤석열 귀신 들렸다 이야기하겠습니까? 한동훈이 귀신들렸다 생각 하겠어요? 못하잖아요. 귀신이 인간의 이성한테 벌벌 떠는 그런 귀신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은 이미 악마의 손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복, 더 나아가서 자기의 행복이죠. 사적인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원수로 적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성향을 띠고 있어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은. 김정은이 바보입니까? 김일성이 바보 아니잖아요. 히틀러가 바보에요? 스탈린이 바보입니까? 무려 오천만 명이나 죽이는 스탈린이 바보에요? 신학교 나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히틀러가 훌륭한 책을 지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또 믿음으로 산다고요.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잖아요. 독일 분위기가.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이성적으로 살아도 예수님 보시기에는 근원적인 근본적인 염려와 근심에서는 인간이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근심과 염려에서.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이주 이성적이고 명석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평가를 했는지 사무엘하 12장 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한 이야기에요.


12장 9절에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여기 9절에 보면 그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지적하면서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업신여겼지요” 인간의 이성적이고 판단을 갖고 있는 그 다윗이 결국 뭐를 건드렸다는 말입니까? 촘촘한 하나님의 말씀의 망에 거기에 고압선 흐르는 말씀을 턱 건드린 거에요.


창세기 2장에 그 에덴동산에 그 고압선이 있었지요. 건드리면 안 되는 것, 따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지 말아라”,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왜 따먹지 말 나무를 줬느냐?” 라고 인간이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것 외에 다 먹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의 염려와 근심이 생기는 이유가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뭘 해도 염려와 근심이 되는 이유가 이 세상은 내 중심을 위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어진 짜여진 이 세상에 내 중심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게 안 건드릴래야 안 건드릴수가 없는 거에요.


술 먹고 와가지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고 보니까 남의 집이라. 너무 술에 취해가지고. 이상하다 옷이 내 옷이 아니네. 슬리퍼가 내 슬리퍼가 아니네. 그건 자기 집이 아니거든요. 귀신들려서 그렇지. 술 귀신들려서 그런 거에요.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질문 한 꼬라지 보면 잘못한 거에요. 질문을 잘못하고 있는 거에요.


“왜 이거 못 따먹게 합니까?” 그거는 귀싸대기 맞아야 돼요. 남의 집에 와서 행패부립니까? 왜 못 따먹게 합니까? “따먹으라고 했잖아 다른 거.” “그거 말고요. 그건 기본이고요.” “누구 맘대로 기본이야 누구 맘대로.” 주의 말씀을 다윗은 건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이스라엘 왕이에요. 죄인의 왕이 되는 거에요. 죄인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 미국에 만화영화에 보게 되면 톰과 제리도 그렇고 또 여러가지 만화영화에 보면 나오는 동물들이 망나니처럼 거칠 것이 없어요. 산에서 스키를 타고 와서 스톱을 해야 되는데 스키를 너무 타가지고 남의 집 안까지 해가지고 하얀 눈 몰고 와가지고 온 식탁에 눈으로 하는 거 있지요. 그 광경을 하면서 나무 부러트리고 창문 깨고 촛대 다 망가지고 치고 치고 하지요.


그 모습이 우리 평소의 사는 모습이 그거에요. 주의 말씀 다 건드리면서 아주 발광하듯이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왜? 다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아까 재소자들,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 동일한 주체를 부여받는다 했는데 이 비슷한 경우가 남자들 군대에 갈 때입니다. 군에 가기 전에 어머님 보고 싶어요. 어머님 편지 할께요. 이렇게 하잖아요. 여자들은 잘 몰라요. 남자도 모르고 군대에 갔다 온 남자만 알아요.


어머님 훈련 마치고 어머님 앞에 멋진 남자로 보이겠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니까 사회와 격리되면서 군에는 네 과거에 있던 주체를 다 바꿔요. 새로운 통합된 하나의 주체로 로봇처럼 지시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무조건 따라야 될 기계로 인간들을 바꿉니다. 그게 조교들의 역할이고 그거 못하면 조교가 혼나지요.


그 방법은 뭐냐? 사람을 사람 대우 안 해줘요. 개보다 더 못하게 만들지요. 사회에서 어떻게 잘 나갔던 인물이 좋던 머리를 똑같이 홀라당 다 깎아버리고요.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렬한지 군대 제대하고 40년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에 막 나와요. 똑같아요. 사회에 있을 때는 어머니 제가 씩씩한 남자가 되어서 어머니 앞에 아들이 되겠습니다 했잖아요. 그것도 사회적 주체에요.


그래가지고 이걸 완전히 기계가 되가지고 이제는 훈련소 마치고 가는 곳을 자대, 본격적으로 근무해야 될 자대에다가 할당을 해요. 배치를 하는데 자대배치라고 합니다. 유명한 게 101보, 103보, 102보 이렇게, 보충지라는 뜻입니다. 파주 저쪽에 이렇게 가요.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거든요. 기차타고 가게 되면 간다고 알리면 가족들이 용산역에 여기 와가지고 닭 튀긴 것하고 고구마하고 사이다하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옛날 주체 같으면 반가운 어머니 얼굴 봐야 되잖아요. 기차가 가는데 높은 사람한테 해가지고 내 아이 이름이 누구누구인데 좀 이렇게 기차에서는 못 내리지만 창가에서 보게 해 달라고 하면 그 아들이 의도적으로 창가에 오지 않고 더 깊숙한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빠져 버려요. 기계이기 때문에. 내가 알던 아들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엄마하고 안 만날라고 숨어버려요. 친구들이 어떻게 하느냐? 너희 엄마 왔다고 창가에 강제로 창가에 엄마하고 만나게 해요.


그게 이 심보가 뭐냐? 인간의 심보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요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피해버려요. 통합된 주체, 악마한테 교육받은 이성적인 방향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옳다는 것, 자기 의롭다는 것, 나는 정당하다는 쪽으로 점점 더 숨어버린다니까요. 그래서 말씀가지고 쫓아가잖아요. 도망치기 바빠요. 말씀도 듣지도 않고 점점 더 말씀 없는 곳으로 가게 되면 뭐냐?


나는 남자다. 굿바이. 나는 남자다 술 한잔 먹고 나는 남자다 노래 부르면서 헤어진 여자한테 자기 정당성 이야기하는 것. 대중가요 다 그런 노래잖아요. 아니에요? 자기 정당성이에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 숨어있을 테니까 나를 찾아서 건드리지 말란 말이죠. 내가 나서기 전에 내가 내 쪽에서 나서기 전에는 네 쪽에서 찾아오지 말라는 거에요. 꼬깃꼬깃 숨는 거에요 이게.


누가 그렇게 그 동일한 주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파고들어갑니다. 땅굴 팔 때 기계가 있잖아요. 터널 팔 때 기계. 또는 석유채굴 할 때 위에서부터 스크류 해가지고 박아 넣지요. 이게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천리만리 도망간다고요. 나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들어가면 이 스크류가 파고들어가요.


이게 주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고 축복입니다. 아무리 도망가도 말씀 끝까지 따라옵니다. 따라와가지고 우리로 뭘 만드느냐. 우리를 죄인, 개 같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려요. 환자로 만들어버려요. 의사가 환자를 만나야 의사가 되기 때문에. 이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버려요. 여기 재소자들처럼. 이제는 더는 자기의 의로움과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용서하심만 내세우는 그러한 집단으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주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전부 다 찾아가지요. 찾아갈 때 인간은 주의 말씀이 와 닿으면 인간은 뭘 포기해야 되느냐? 자기의 자부심을 포기해야 돼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주인공이 여자보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자부심 때문입니다. 형사로서의 자부심 때문입니다.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그런데 그 자부심이 여인을 향한 사랑으로 나중에 다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자부심 때문입니다. 형사로서의 자부심. 적어도 남자든 여자든 이거 하나 없으면 안 되지요. 문제는 자부심 때문에 불면증 걸린다는 거에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거에요. 완벽한 나를 보다 완벽한 그 방법을 연구한다고 잠이 오지를 않아요. 하도 올곧게 항상 꼿꼿하게 형사가 형사답게 살아야 이 형사의 일에 부합된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여인이 그걸 노리지요.


지금 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그 윤리학 봤지요.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늘날 흔히 상식적으로 말하는 가정교육 학교교육이 다 어디서 나왔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지요. 그것보다 한국교육은 존 듀이의 교육법에서 나온 거에요. 존 듀이는 약간은 상대적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 하나 어른이 있어가지고 어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면 존 듀이는 뭐냐 하면은 교사의 정신을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갖고 있는 자질을 교사가 개발해야 된다는 약간의 상대주의적 그런 교육법을 미국식 상대주의적, 진리는 없어요.


진리는 모든 인간은 각자가 진리답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도 이미 만물의 척도라는 그 철학에서 나온 거에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을 유치원 때부터 시키는데 유치원 때부터 하는 그 교육을 몬테소리라고 하는 거에요. 몬테소리. 이탈리아 아줌마에요. 아줌마가 낸 교육은 놀이기구를 가지고 그 애가 갖고 있는 재능과 기능을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 말하는 달란트, 재능을 개발해서 그것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식으로 일률적인 교육이 아니고 각자의 재주를 발견하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음과는 전혀 관계없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의 주특기를 마음껏 자랑질하는 그런 자랑의 장기 자랑하는 무대 같은 것이 이 세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와서 누가복음 12장을 이렇게 보니까 이걸 하나의 숙제로 여기고 ‘야 이것 괜찮네 이거 내가 지킬게’ 하나의 도전 대상이 되어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 열심히 해서 은혜 받아가지고 이 말씀을 성령 받아가지고 이 말씀 지키면 되잖아. 그것도 성령까지 동원해가지고 이 말씀 지키면 되잖아.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면 되잖아 이렇게 하는 거에요. 복음은 스크류처럼 이렇게 땅 속에 뾰족한 두더지처럼 파는 그런 것처럼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와가지고 우리를 파버려요 이걸. 찢어버린다고요 말씀이.


근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잠 못 잡니다. 왜냐하면 근심할 게 한 두 가지 아니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했던 내 자신으로 인하여 더는 얻을게 없다 이러면 푹 자지요. 나한테 기대할 게 아예 없는데요. 푹 자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면회 왔을 때 자꾸 친구 사이로 인간들 똑같은 인간 사이로 기어들어가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로 나오면 돼요.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오면 돼요. “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오면 된다 이 말이죠.


불심판 앞에서 옳고 그름은 의미 없습니다. 불심판 앞에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이 있어요. 불심판인데.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자,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어떤 아이가 엄마한테 한 질문인데 여러분이 한번 답변을 해보세요. 초등학교 아이인데요. “엄마 어떻게 하면 내가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어요?” 이거 자기가 생각한 방학 숙제에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아이가 먼저 제안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엄마한테 선빵 날린 거에요. 보통 효도라면 엄마가 요구하는 건데 애가 먼저 엄마한테 들이밀었습니다. 엄마는 대략난감이죠. 이렇게 선빵 날릴지 몰랐지요. 여러분 이 정답이 뭐냐? 막연하지요. 막상 할라니까. 공부도 해야 되고 엄마 말도 잘 듣고 여러 가지 아는 상식이 있잖아요. 엄마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네가 행복한거야. 그건 아리스토텔레스 돼버렸잖아.


정답은 이겁니다. 정답은 내가 아들의 자리를 마련할테니 너는 너의 자리를 버리고 나의 자리에 오면 그것이 효도다. 그게 효도지요. 자리를 따로 만들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겁니다. 따로 만들어요 따로. 아버지에게 있어서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따로 자리를 만들었어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버림받는 세상에 보내셔서 이 땅에서 버림을 당하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아셔야 될 것은 여러분 예수님이 벌을 받은 게 아니에요. 버림을 당했지요. 관계 자체가 끊어진 거에요. 버려진 거에요. 이 말은 사람이 매를 맞게 되게 되면 여전히 징계를 받게 되게 되면 아버지 아들 관계가 유지가 되는데 버림을 받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아들 관계가 날라가버려요. 없어져요. 버림받은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고 하고 그 죽은 자는 자력으로 그 죽음에서 자기가 살아나올 수가 없는 절대적 절망입니다. ‘절대적 절망’. 그러니까 인간들은 구원을 못 받지요. 그 절대적 절망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자리는 버림받은 자리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발견을 해야되요. 내 자리 있잖아요 내 자리. 나 훌륭하다는 자리, 나는 남자다 있잖아요 김장훈처럼. 이 자리가 버림받은 자리에요. 마치 악마가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은 것처럼. 버림받은 자리에요. 인간은 자기 자리가 뭐 어떤 상태인지 몰라요. 몰랐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버림받기 전까지는 자기는 뭐 이렇게 살다가 율법 지켰으니까 얼추 지켰으니까 천당 갈 줄 알았지. 내가 나쁜 짓해서 버림받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 자리 자체가 버림받은 자리 자체라는 것을 몰랐지요 인간은.


31절에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나라 잘되면 되지 왜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라는 그 소녀가 계시를 받았는데요 그 계시가 뭐냐 하면은 ‘네가 프랑스를 영국에서 구하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계시가 복음적일 수가 없지요. 파티마 알아요? 대구에 파티마 병원. 파티마가 뭐냐 하면은 포르투갈의 어린 아이가 성모 마리아에게 계시 받은 그 장소가 파티마에요.


파티마는 뭐냐 하면은 성모 마리아 식의 이런 묵주 기도를 하게 되면 네 나라가 잘된다는 그 계시 내용입니다. 그 나라와 의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간증 들어보세요. 그 간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는지 아니면 덕을 보자는 이야기인데 한번 여러분들이 기도원에서 간증하는 것 한 번 들어보세요. 요새는 유투브로 스트리밍 해서 생중계해요. 시끄러워서 못 봐요 시끄러워서. 산속에서 자기들끼리만 하지 이걸 스트리밍 해가지고 간만에 봤어요. 오랜만에 봤어요.


그 울부짖는 거요 왜 울부짖는 줄 알아요? 무서워서 울부짖고 두려워서 울부짖고 근심이 많아서 염려스러워서 자기 신상이 염려스럽고 자기 미래가 염려스러워서 울부짖는 거에요. 절망스러워서. 지옥의 울부짖음이에요. 왜? 버림받은 자들이니까. 아이가 엄마 나 어떡하면 나 엄마한테 효도할 수 있어? 엄마로부터 사랑을 더 빼내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받은 사랑도 모자라는 거에요. 더 많은 사랑을 위해서.


다시 말해서 엄마가 사랑 안 주고는 못 배길 정도로 지금도 정당하지만 더욱 더 완벽의 완벽의 정당성을 효도까지 해버리는 정당성까지 본인이 소유하고 확보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누구 자리입니까? 자기가 만든 자리에요. 자기가 만든 자리에 엄마를 초대하는 겁니다. 엄마 요구대로 해줄테니까 나 더 이뻐하고 사랑해줘. 내 요구사항 들어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죄가 뭐냐? 성경에서 죄란 일치하지 않는 것. 쉽지요? 일치하지 않는 것. 아까 사무엘하 12장 9절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지적할 때 뭡니까? 네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지요.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네 마음, 생각 모든 게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죄란 일치하지 않는 것, 삔트가 어긋난 것, 일치하지 않는 것, 방향이 같은 방향이 아닌 것.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지적할 때는 다윗의 일부만 지적한 게 아니고 다윗의 근본 자체가 일치하지 않다는 다윗의 근본 자체가, 존재 자체가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마련한 내가 마련한 자리가 주의 뜻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서 내어버려뒀다. 성경에 로마서에 8장에서 내어버려둠. 또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저주받았다. 그냥 버린 거에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같이. 그냥 버린 거에요. 우리의 현실이 추방당한 자에요. 버림받은 거에요. 그것도 그냥 버림받은 게 아니고 악마와 더불어 버림받은 거에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인가 토지의 몸. 토지 자체가 살아있어요. 저주가 살아있어요. 저주받은 자는 여기 여기 모여라. 다 모였어. 땅 위에 저주받은 자는 다 모였어요. 그래서 나중에 땅을 불로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그 저주와. 그래서 땅 밑을 지옥이라고 하잖아요. 땅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밑에 지옥이 돼요. 저주받은 버림받은 자의 공간이 지옥이 되고. 천국은 위로 올라가요.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와요. 아래쪽과 위쪽 둘로 나눠져버려요.


그래서 아까 우리가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도덕 우리는 하자 없어 보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이성의 기능에 의하면 현대에 와서 의심을 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프로이드의 무의식이에요. 이성? 이성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감정은 어떻게 이겨. 다윗이 이성? 아니에요? 밧세바를 범할 때는 이성이 아니고 감정. 이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


이렇게 나오니까 또 어떤 학자는 감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은 의지야. 인간은 의지가 감정과 이성을 이겨. 이게 누구냐 하면은 니체, 쇼펜하우어 이런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 이게 누구 말이냐 하면은 이게 니체 말이에요. 니체. 신은 죽었다. 남은 것은 뭐냐? 우리가 내 인생은 누가 끌고 간다? 내가 하면 된다. 이게 불교의. 무쇠의 뿔로 나 홀로 간다.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 이야기했습니다. 악마는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은 얼마나 악마적인지 하나님을 내가 대단함을 누구하고 견주어서 어느 정도로 견주어서 되느냐.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겨서 견주어서 하나님의 손길도 내가 떨칠 정도로 내가 대단한 존재일 때 우리는 가장 쾌감을 느끼는 그런 본성을 누구나 다 내부에 지니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교회 왜 나오고 하나님 왜 믿는가? 갖고 놀라고. 하나님을 갖고 놀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거에요. 예수님을 갖고 놀라고. 예수님하고 장난칠라고. 뭐만 빠지면 되겠어요? 장난치는 예수님 뭐만 빠지면 되겠습니까? 십자가만 빼고 나머지 다 주님과 장난칠 수 있는 거에요. 농담할 수 있고. 십자가만 빼면. 주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으니까 대화하자는 거에요. 교인들은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다고요. 왜? 둘 다 살아있으니까.


그러나 십자가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뭡니까? 네가 죽었나 내가 죽었나 보자는 거에요. 진정으로 누가 죽었느냐 죽음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에요. 죽음이 기본이지 살아있는 게 기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놀래야 돼요.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왜 또 살아있지? 그건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죽어있는 그 자체를 죽음 자체가 살아있기 위해서 평생을 96년 동안 살아있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은 그 아들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요. 따로 마련하는데 우리 보고 하라고 하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에 안돼요. 죄가 일치되지 않잖아. 따라서 일치되는 그분의 마음이 우리한테 와야 돼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마음이 오게 되면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어떤 누구도 의인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그 마음이 동일한 마음이 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일치가 되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로마서 4장 한번 봅시다. 4장 7절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절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했지요. 자, 우리가 복으로부터 출발해봅시다. 복이 뭐냐? 복이 뭐냐 할 때는 반드시 불법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요 복 받은 사람은 반드시 불법한 자가 돼야 되고요 그 가운데 불법한 자가 불법을 자기 힘으로 받을 수가 없는 그 지경이 있어야 돼요.


내 스스로 선한 행동해서 내가 죄가 사라지는 그런 짓거리 하면 그건 복 받은 자가 아니에요. 복 받은 자는 뭘 하느냐? 나는 불법에 있었는데 중간에 뭐가 주어졌다? 뭔가 사심이 있는 자, 죄가 가리어짐을 받았고 주께서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거는 복이 됨을 아는 이 안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과 복 받은 자의 생각이 일치가 되는 거에요. 이게 복된 자에요.


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했습니까? 행복이란 내가 이성을 개발하는 게 행복이죠. 정당한 내가 그것도 완벽의 완벽을 기하는 것이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게 복된 사람이라 하지요. 오늘날 성화론 있잖아요. ‘성화론’.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 믿고 점점 더 죄를 줄여나가는 그런 식으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자. 그게 아리스토텔레스 생각이에요. 이게 중세철학, 중세신학이고.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한 사람은 뭐가 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 추가적으로 뭐가 지금 보인다? 내가 준 하나님 쪽에서 준 복이 보이는 거에요. 주님의 마음가짐이 그 사람에게 덮친 거에요. 부먹이에요. 탕수육 부먹. 소스를 부어버린 거에요. 볼 때 탕수육 돼지고기 튀긴 거 안 보이고 소스만 보이는 거에요. 들춰내야 안에 죄가 나오지요. 그냥 죄 사함만 보일 뿐이지 안에 죄는 안 보인단 말이죠.


거기서 예를 들면서 그 조상이 누구냐?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본인이 한 것이 본인에게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이 더는 얻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내 보고 누이동생이라고 속여가지고 살 궁리를 찾던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의 하나의 모델이 되어버린 겁니다. 왜?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그거 누가 다 했어요? 주께서 다 하셨죠. 그럼 아브라함은 뭐했습니까? 죄 짓는 일만 했죠. 죄 짓는 일만 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위반하고 하갈하고 하갈의 자식을 낳았잖아요. 주께서는 아브라함을 마음껏 활용하시지요.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을 복을 위해서 죄 사함을 위해서 활용하고 있음을 감사합시다. 잠 좀 주무시고요. 내가 하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나에게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것만 남아있기를 주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저지르기만 할 뿐이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네카라는 비기독교인인데 윤리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화가 날 때 자기의 모습을 거울로 보라.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화 날 때마다 아 내가 악마의 얼굴이 되는구나. 화를 줄여야겠다. 이런 계산으로 이렇게 한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볼 것은 십자가입니다. 자기 거울 말고 우리 때문에 밀침 당했던 죽임을 당했던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이 이 멀쩡한 허우대 멀쩡한 우리가 개 같은 존재인지를 얼마나 환자이고 얼마나 병든 자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는 것, 이게 새 술은 새 부대의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고 열심히 했으니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우리가 그게 바로 일치하지 않는 주의 뜻과 십자가 뜻과 합치하지 않는 죄라는 것을 발견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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