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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8 07:00:22 조회 : 43         
대전-신명기(5강) 신4:1(에어포켓) 20220926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대전-신명기(5강) 신4:1(에어포켓) 20220926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4장 1절,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그렇게 돼 있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 하나님은 항상 구약에는 말씀을 주시잖아요. 그 말씀을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고 모세에게만 사적으로 말씀을 줬다 이 말이죠.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기록을 하지요. 기록을 했으니까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 당사자 말은 못 듣고 기록된 율법이니까 어쨌든 간에 문자 아닙니까. 직접적인 아니란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주실 때에 딴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직접 만난 게 아니니까. 펜팔 한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법은 없잖아요. 그냥 편지만 왔다 갔다 할 뿐이지 나중엔 편지 자꾸 오면 식상해서 스토커로 신고까지 할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던 이유가 뭐냐 하면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모세에게는 직접 나타나지요. 사람들이 모세에게 하나님 만나서 좋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이 나타나버렸어요. 이것 어쩔 거예요? 신약에 충격적인 것은 누가 이렇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사람 사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출생하시고 성장하시고 어른 되시고 주변의 열두 제자 다니시고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직접 나타난 하나님이거든요.

직접 나타난 하나님 같으면 우리 인생에서 직접 나타난 하나님과 관련성 없는 일이 없게 돼버렸어요. 나는 절에 간다. 나는 이슬람교다. 그건 얼마든지 오락으로 취미로 할 수 있지요. 등산 가는 겸사겸사 절에 가서 빌고, 자식 건강하고 잘 되라고 빌며 얼마든지 나는 불교신자라고 우길 수 있는데, 그거는 내 쪽에서 부처한테 다가서는 것 아닙니까.

내가 상상한 부처한테 다가서는 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왕림을 해버린 거예요, 이 땅에. 왕림한 입장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일원이 된 거예요.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이 된 거예요. 공동체가 동그라미라면 나 여기 있어 등산 가는 길에 절에 가고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일원이 된 거예요. 우리 공동체에. 그럼 저분을 어떻게 하든 처리를 해야 될 문제에요.

구약에서는 말씀으로 했기 때문에 성경말씀, 율법 이것 안 보고 딴 짓하면 그만이에요. 요새 눈이 어두워서 안 보인다, 이런 식으로 율법 안 볼 수도 있는데, 직접 와버렸다. 특히 명절날 꼭 이런 사람 있어요. 집안끼리 모였는데 이상하게 집안 촌수가 멀어. 촌에서 백수인 사람이 꼭 명절 되면 도시에 약간 잘 사는 집에 얼굴 드미는 사람 있어요. 소개해도 “엄마 저 사람 누군데?” “나도 몰라. 명절 때만 되면 오네. 오촌 아잰가, 칠촌인가 그래. 족보? 복잡해서 난 몰라.” 안 꼈으면 좋겠는데 꼭 끼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 명절 때 안 오면 술 먹고 저지레하고, 음주운전 걸리고, 이런 걸로 씹을 수가 있는데 씹다보면 문 열고 들어와요. 명절날 시간이 무료하잖아요. 무료할 땐 씹어야 시간이 가요. 화투를 친다든지 뭐. 옛날엔 화투치고 했는데 바둑 두는 사람은 저희끼리 두고 해서 또 안 돼요. 옛날엔 건전하게 윷놀이하곤 했는데 이것도 노동이라고 팔이 아파요. 안 그러면 케이블 켜놓고 윤석열 욕하든지.

주로 짐이 되는 친척들 씹는 맛이 시간이 빨리 가요. 그런데 그때 “아재 계십니까?” 해서 들어올 때 전부 다 자기 방으로 다 들어가고. 왜냐하면 실존 인물이거든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촌의 아재가 이미 죽은 고인 같으면 상관없는데 실존 인물이잖아요. 가상 인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깜짝 인간들 놀라게 한 거예요. 말씀으로 한 게 아니에요. 모세야 하나님 만났지요. 다른 사람은 만난 적 없어요.

그냥 하나님은 말씀으로 율법으로 봤는데 신약에 와서는 직접 내왕했습니다. 나타나버렸어요. 내 인생을 이룬 여기에 하나님이 직접 둘 다 같은 실존 인물로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죽이든지 버리든지 어떤 처리가 돼야 돼요. 나타난 하나님. 추상적인 하나님이야 하나님 하고, 빌고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나타난 하나님은 그렇게 빌고 그러는 게 아니고 나타나실 때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인간들에게 뭇매 맞아 돌아가셨잖아요. 인간들로부터 배척받은 거잖아요. 그래서 교회는 말씀에 나타난 추상적인 하나님을 언급해요. 성당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그런데 십자가는 금기입니다.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 나타나버리면 로마서 9장처럼 이 십자가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 인생에 걸림돌이 돼요. 이게 장애물이 됩니다. 그분의 실존에 대해서 어떻게든 아부를 하든 굴복하든 안 그러면 다시 내가 배척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그분에 대해서 관련성을 가질 것을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이것을 이렇게 네 자로 쓰겠어요. [여기 있다] 이게 정말 무서운 이야기에요. 저기 있다, 여기 있다, 에서 바로 여기 있다. 그곳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를 하나님이 고집을 해버려요. 구약 신명기 이스라엘 당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로 이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 내가 있다. 모세는,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

하나님이 모세만 상대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전체에게 내가 여기 있다, 를 그대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런 식으로 율법을 준 거예요. 나 빠져있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잘해봐라, 이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보통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 정도 되면 직원들에게 부담될까 해서 얼굴 보이고 나가줘야 직원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즐겁게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사장님이 자기 집에 가지도 않고 사장실에 따로 있지도 않고 사무실 한복판에 내가 여기 있다, 하고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업무가 되겠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너무 거룩한데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볼 때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에 이걸 기분으로 자리 잡고 생각해야 돼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본인이 알지 못하는 중심 공간으로 그들은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기 싫은데.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길 원치 않아요. 인간은 인간들끼리 만나길 원하는 거예요.

일반교회에서 목사와 교인들이 식당에 가게 되면 목사는 꼭 장로와 이야기하지 젊은 집사들 목사한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담돼서 안 가요. 자기 나이 대에 맞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늙수그레한 장로들이나 목사와 이야기하고. 그게 마음 편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가 돼버리면 이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의 변화산에서 어느 누구도 여기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어요. 그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 두 분 생각해보세요. 모세와 엘리야. 모세와 엘리야가 마태복음 17장에서 영광스럽게 함께 있었어요. 이게 가능하냐? 어떻게 두 실존이 같이 대화가 되고 같이 있을 수가 있느냐?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했습니까? 우리 인간들이니까 선배님, 후배님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한 게 아니죠. 그 중심에 인간들이 있다,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다, 에요. 당연히 하나님 여기 있으면 그다음 결과가 뭡니까? 나는 당연히 나의 존재가 무시당하고 있다, 를 당연하게 여기는 겁니다.

모세가 주님과 이야기할 때, 엘리야가 주님과 이야기할 때 화제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돼요. 인간과 인간끼리 있으면, 아이고, 형님, 삼촌, 조카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희들끼리 자기 관심사가 되는데 하나님이 여기 있을 때는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깡그리 무시당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이거에요. 죽음, 또는 죽은 상태. 세상에 볼 때 내가 숨 끊어질 때를 죽은 상태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죽은 상태는 나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상태가 죽은 상태에요. 내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가 전혀 화젯거리가 될 수 없는 것. 내가 나의 관심사가 될 수 없는 게 죽은 상태에요.

그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모세가 바로 시내 산에서 그렇게 느꼈어요. 모세가 지상에선 하루 두 끼인지 세 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 땟거리를 챙겼단 말이죠.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갈 때 양식 들고 갔습니까, 비상식량 갖고 갔습니까? 없어요. 그냥 생수 한 병도 안 가져갔어요. 그런데 사십 일을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건 뭐냐? 모세의 인생, 모세의 과거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 죽었다, 그게 유명한 영구 없다가 되는데, 나 없음으로 모세는 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죽은 자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영생이에요. 이게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한 거예요. 정말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기 있다가 돼버리면 나의 존재 자체는 내가 생각하기도 싫어요. 이걸 달리 표현해보겠습니다.

나의 슬픔은 천국에서 어떻게 처리될까, 또는 어떻게 각인될까? 나의 슬픔은 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까요? 정답은 웃기네. “슬픔, 뭐? 네가 슬퍼? 소는 누가 키울 거야?” 대번에 이렇게 나오지요. “네가 왜 슬픈데?” 나의 존재 자각 때문에 슬픈 거거든요. 자기의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슬프다 이 말이죠.

어떤 카페에서 아까처럼 너무 단 코코아 말고, 커피에 취해서 음악에 취해서 있을 때에 그곳은 지금 누가 빠진 상태에요? <갈색추억> 속에 나오는 이야기. 혼자 상심에 잠겨서 그때 좋았는데, 하고 있을 때 거기에 누가 없다는 말입니까? 영구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 있다가 빠진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없으니까 내가 주인공 된 겁니다.


<갈색추억>, 한혜진

희미한 갈색 등불 아래
싸늘히 식어가는 커피 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찻집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 사람 올리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 다시 찾아온
지난날 추억속의 찻집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 추억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등불 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 추억


내가 주인공이니까 슬픈 거예요. 주인공이면 신나야 되는데 모든 것에 자기가 신이 되니까 신바람 나는데 주인공 되는 순간 갑자가 슬픔과 남자는 싫은데 외로움은 오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남자는 다 귀찮아, 했는데 외롭기는 왜 외로우냐 말이죠. 이게 자기 존재가 모순되어 그런 거예요. 내가 생각한 자아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육체가 불일치되어 그래요. 왜냐하면 내 육체는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뭔가 결함이 있어요. 결함이 있는 육체를 인수인계 받고 그것으로 한평생 산다고 여러분 고생이 많습니다.

이건 고쳐도 안 돼요. 카센터에서도 고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못 고치느냐 하면 어디가 고장 났는지 몰라요. 고장 난 걸 알면 투석을 하든지 뭘 하겠는데 육체는 투석은 되는데 마음에 고장 난 것은 원인조차 구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요. 돈도 250억 벌어봤다가 여자도 갈아타보고 집도 바꿔보고 남자도 만나보고 난초도 키우고 그림도 그려보고 온갖 것 해보는 데 아무리 해도 이게 원인규명이 안 되는 거예요. 어디 고장 난 걸 알아야 고치겠는데 어디가 고장 났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입장에서 보면 아직 중심처로 마저 끌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계신 곳에 가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 계신 공간이 무슨 공간이냐? 감추어진 공간, 비밀의 공간이 있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다른 이방민족에 비해서 어떤 나라냐? 이게 비밀의 공간이에요. 비밀의 공간이라서 여기서 다른 단체에서 이스라엘로 갈 수 있는 열쇠가 없어요. 다 막혔어요.

막힌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지상에서 공간을 만들려면 출입구가 필요하잖아요. 위에서 포클레인으로 떠내는 방법이라면 이거는 지상에서 그쪽으로 들어가는 문도 없고 거기서 나오는 문도 없어요. 그것을 제가 표현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표현했기 때문에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19장 4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짐승 하나 나오지요. 짐승 이름이 뭡니까? 땅에 기는 겁니까, 하늘에 사는 거예요? 하늘에 사는 짐승 나오지요. 독수리. 그런데 그 독수리에 뭐가 있다? 날개가 있는데 그 날개에 남자만 육십 만 다 실어왔다는 거예요. 와아, 이건 뭐 엄청난 중국무협소설도 이건 따라오질 못하지요. 독수리 날개에 그냥 다 실어서 날아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은 걸어왔습니다. 날아온 게 아니고 물 없는 양식 없는 척박한 사막 길을 일일이 찍어서 온 거예요. 발바닥 제대로 딱 딛고 자세 바르게 하고 하나하나 체험하면서 땅의 저주성을 그대로 냄새를 하나하나 맡듯이 왔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희 시원했지, 그지?” 뭘 시원해요. 답답해 죽겠는데. 독수리 날개로 오니 속도감 있고, 그런데 날아왔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걸 이해를 해야 됩니까? 하나님 어법에 대해서 어떻게 감당을 해야 돼요?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만약이 아니고 실제로 신약시대에 사람이 되셨다면 그 사람 되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도 꼭 이런 차원이에요. 뭔가 말씀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교회 좀 나오다가 성경 좀 보다가 나 이제는 하나님 빠이빠이, 예수님 빠이빠이 남들 사는 것처럼 인간답게 살아보자.

나갔더라도 정말 마음속에 앙금이 남는 것은 멀리 있는 하나님은 죽어서 뵙시다, 하면 끝나면 문제에요. 죽어서 만납시다,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지상에 먼저 왔던 미리 왔던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할 건데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데 하나님 자신이 여기 있다는 데 나 여기 있는데 너 거기 있지. 그럼 응답을 해봐. 내가 여기 있다, 에 대해서 네가 어떤 식으로든 응답과 반응을 나타내봐, 하고 요청하고 요구하고 있는데 뭐라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당신 안 믿어요, 하든지 내 인생 당신 때문이라고 원망을 하든지.

그러니까 어떤 반응을 나타내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는 교인들이나 성도들이 뭔가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있다가 또다시 확인되었다는 뜻이에요. 어떤 존대를 하든 어떤 극렬한 저항을 하든, 극렬한 저항이 기본이 돼요. 극렬한 저항, 반항.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막 던지면서 극렬한 저항을 하든지 간에 어떤 분에게 저항한다는 말은, 그게 되레 뭘 증명하느냐 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이미 이 땅을 그 중심지, 그 핵심을 쥐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셈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잠을 자고 있는데 가, 가란 말이야. 더 이상 안 빌어, 하고 있는데 같은 침대 옆에 불신자 남편이 짜증나서, 당신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심하게 해. 악몽을 꿨어, 하니까 아내가 식은땀이 주룩 흐르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셨데. 내가 죽어서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내가 찾아가기 전에 벌써 이 땅에 발을 디뎠어. 여보, 나 어쩌면 좋아. “이거 또 수련회 갔다 왔군. 내가 그런데 가지 말라 했지.”

물론 가야산 안 가면 되는데 모세와 엘리야는 어쩔 건데요? 주님과 이야기한 사람 있는데 그건 어쩔 거예요? 그 사람 라면 먹었다면 나도 라면 먹었다고 무시하겠는데 그분이 주님과 대화를 했으면 우리는 어쩔 건데? 우리는 대화가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너 잘렸어. 너는 천국 사람 아니야.” 이런단 말이죠. 그렇게 된다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요란스러워요.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이런 식으로 맹자, 공자, 성철 스님처럼 그렇게 지 착각 속에 불편 없이 살면 인생 끝나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평생 고요하게 살면 그만이다, 이러고 싶은데 이스라엘은 그게 용납이 안 된다니까요. 그게 이스라엘이 얼마나 복된 겁니까? 그걸 복이라 합니다. 내 인생 중심에 나를 두지 않고 빼내시는 작업이 있도록 주께서 방치하지 않는 그 작업, 성도가 따로 있겠어요? 그게 성도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다른 게 아니고 주님 때문에 되게 불편할 때 그것 천국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복 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돼요. 어떻게 세상은 자기 목적으로 사는 인간들밖에 없는데 어떻게 주님과 관련해서 티격태격하면서 주님과 연관된 그런 인간, 모세와 엘리야 같은 그런 인간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처럼 복된 사람 아니면 그런 혜택 없습니다.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기이한 현상입니다. 아주 이상한 현상이에요. 지금 신명기 4장에 나오는 긴긴 이야기가 기이한 현상입니다. 율법을 제공한 그 근거지로 빨려 들어가고 이끌림을 받고 인도받는 삶, 감춰진 공간, 다른 말로 하면 숨겨진 공간. 더 기이하게 설명해볼까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율법은 모세가 받았지요. 모세가 어디서 받았느냐 하면 시내 산 위에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모세에게, “당신이 시나리오 짠 것 아니야? 하나님이 준 것 맞아?” “맞아.” “어디서 받았어?” “시내 산에서.” “시내 산 가보자, 줬는지.” 시내 산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기이한 거예요. 율법을 주신 건 있는데 율법은 있는데 돌 판은 있는데 그 주신 장소가 사라져버렸어요. 있었는데 없어. 이 운명과 동일한 운명이 성도의 운명이 됩니다. 있었는데 계속 있는 게 아니고 있었는데 없어요.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이 운명이 성도의 운명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보여준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겁니다. 운명 바꾸기. “너희들 힘으로 안 되는 운명 바꾸기 내가 해줄게.” 그런데 그동안 인간들은 스스로 운명을 못 바꾸느냐 하면 뭔가 문제, 결함이 있는 건 아는데 뭐가 문제점인지는 모르는 거예요. 돈도 벌어봤다가 해외여행도 해보고 낚시도 해보고 온갖 취미로 자기의 빈 공허함을 메우려고 하지요.

트롯 하고 싶은 사람, 우리나라에 수십만은 될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이 사십, 오십 넘어서 사업 망하고 트롯 가수하겠다고 판 내고 하거든요. 주로 옛날 트롯 무대에 설 때 가장 즐거웠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건이 안 되어 가수 못 되고 판 못 내고 사업하는데 아무리 사업이 잘 되도 공허함이 찾아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업 얼추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어 내가 트롯을 하니까 이제는 비로소 제2의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개나 소나 트롯 가수 다 하는 거예요. 남자도 여자도 다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 트롯하면 내 운명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든가, 뭐 진짜 나의 나다움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보았다>는 연극처럼 좁게 살았는데 세상이 이렇게 할 게 많은 줄 몰랐다. 나이 오십 되어 자식 다 키우고 난 뒤에 비로소 눈이 떠져 보인다고 하는데 그래봤자 이미 몸은 늙었어요.

주님께선 운명을 바꿔주는 데 현재 내가 여기 있다, 때문에 나에게 슬픔과, 슬픔이 뭐냐 하면 마음의 고통이죠. 고통은 왜 오느냐? 빈자리 때문에. 뭔가 아무리 채워도, 사고 났을 때 에어백 있잖아요. 에어백이라든지 공기가 들어있는 공간, 지하실에 물이 차도 그것 때문에 산다 하잖아요. 존재의 변비라 할 수 있어요. 뭔가 미진해. 뭔가 이게 깔끔하질 않아, 인생이란 게, 우리 존재란 게. 그걸 다른 걸로 보충하고자 코코아도 마셔보고 해봤는데 이상하게 깔끔하지가 않아.

운명 자체가 시작이 바꿔주시는 거예요. 있었는데 없어, 가 되고, 없는 그 공간에 눈 떠보면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의 원천의 공간이었어요. 그건 시내 산인가? 시내 산은 끝났어요. 시내 산은 일회용입니다. 모형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어디로 가느냐? “원래 율법이 나왔던 자리로 가자. 내가 끌고 갈게.” 그게 어디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주님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주신 거예요.

주님이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 안에 본인을 담고.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서, 이걸 쉽게 하면 산 위에 있던 여호와께서 그때는 몸으로 오신 게 아니고 율법으로 오시지요. 말씀으로 산 밑에 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했느냐 하면 하나님과는 이야기를 못하니까 모세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를 만만하게 보는 거죠. 같은 인간이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서서, “모세 만만하게 보지 마라. 모세가 천하보다 온유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나부터 문둥병 걸렸잖아요. 자기 남동생 만만하게 봤다가.

없는 숨겨진 공간을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그걸 만들어요. 그걸 뭐라고 하노? 공기로 차 있는 빈 공간을? 에어포켓. 에어포켓은 인간세계에서는 용납을 안 합니다. 빈 터는 항상 부동산 개발해야 되기 때문에 용납 안 해요. 비어있는 걸 인간은 용납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비게 만들어요.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듭니다.

에스겔 여러분들 보셨잖아요. 이스라엘 땅에 있는 사람들 어떻게 합니까? 다 추방해버리죠, 강제로. 다른 나라 이방민족이 와서, 악어가 와서 사람 하나씩 자기 본거지로 다 데려가고 원래 살던 곳을 빈 터 만들잖아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첫 번째 강의의 핵심인데요. 쓸어버림, 쓸어버리는 거예요. 제가 어제 아침인가 잠간 언급했어요.

어떤 넓은 공간에 쓰레기가 없을 때에 사람이 안 찾아왔다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 가고 난 뒤에 누가 쓰레기를 다 치워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주님께서는 다 치워버려요. 왜 치우느냐? 더럽기 때문에 치우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이든 더러운 인간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준 게 뭐냐? 두 자로 율법이에요. 또는 여기 계명, 그 뒤에 4장 전체가 그 내용입니다. 언약, 계명, 선포한 법도, 이런 것. 돌 판의 십계명.

너희는 이 말을 더 보태거나 빼지 말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법대로 살았어, 이 계명대로 살았어, 라고 들이밀고,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실례지만 아저씨 이 법대로 살았습니까?” 3초. “죽여! 죽여 버려.” 있다가도 어떻게 되느냐? 없어지는 거예요. 인간을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뭐가? 율법이. 율법이 오게 되면 사라지게 만들어요.

“아이고, 이스라엘은 같이 있었잖아요.” 이렇게 중얼거릴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공간이 에어포켓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에어포켓, 빈 공간, 숨겨진 공간에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었지, 를 설명하면서 율법이 제시되는 하나님의 절차방식으로 나중에 소급해서 그들은 받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율법을 이방민족에게 들이대면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멸망이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앞장세우는 여호와 전쟁 아닙니까.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 다 망했지요. 아말렉 망했지요. 모압, 암몬 망했지요. 아모리 족속 전부 다 망했잖아요. 뭘 들이댄 겁니까? 칼 이런 것 들이댄 게 아니라 율법 들이댄 거예요.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싹쓸이한 겁니다. 이건 제가 읽어볼게요.

창세기 6장 7절, 이 말씀을 들어보세요. 모순되는 말이 나와요. 상당히 의미 있게 모순되는 게.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뭐가 모순됩니까? 이 짧은 문장.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린다. 자, 그냥 사람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쓸어버린다. 뭘 얻기 위해서,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기대하면서 손수 만든 인간들을 쓸어버립니까? 뭘 원하는 거예요? 나는 거룩하지 아니하면 깨끗하지 않으면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했지요. 주와 함께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려면 예수 안에 있어야 되고,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세례, 연합. 네가 누구와 붙었나, 네가 누구와 같이 연합되었나? 누구와 붙어 있느냐? 네가 홀로 있는 건 아니지? 누구와 함께 있어?

“나, 여기 있습니다.” “아아 듣기 싫어. 너 여기 있는 것 듣기 싫어.” “사진 찍어볼까요?” 셀카 찍고, “여기 있는 것 맞잖아요.” “셀카고 뭐고 너 있는 것 싫어. 너 누구와 있지?” “내가 있다니까요.” “너 있는 것 말고 누구와 있지?” “주님이 여기 있습니다.” “오케이.” 그게 연합이고 그게 세례입니다. 주님 여기 있는 거예요.

이걸 어디서 먼저 시범 보였는가? 이스라엘에서 시범 보인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율법을 받을 때에 그들의 기본적인 마음자세는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모세만 있는 게 아니에요. 모세가 준 그 말씀과 더불어 누가 있습니까? 율법을 주신 그분이 함께 있으면 그 이스라엘은 공간은 은밀한 공간, 숨겨진 공간, 감춰진 공간입니다.

이거는 제가 읽었던 것이 창세기 6장이죠. 노아 홍수시절이에요. 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간이 어디 안에 있을 때 살아남았습니까? 노아 방주지요. 그게 에어포켓이에요. 공기로 도니 주머니, 에어포켓이에요. 그런데 빈 공간, 방주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에 정신 팔린 그 인간들에게 그 가치와 그 의미가 그들에게 와 닿겠습니까? 그들에겐 방주라는 것이 와 닿지 않아요.

왜냐하면 본인만 여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내 가정이 여기 있고 내 남편, 내 자식, 내 아내가 여기 있는 것 그게 최우선이고 그게 전부였어요. 독수리 날개? 그것 무슨 미친 이야기냐, 내가 두 발 딛고 있으면 여기가 내 삶의 목적이고 의미가 되는 거예요. 나만 여기에 건재하고 투석 받더라도 돈 따박따박 나오면 그러면 되는 거죠. 내가 여기 있고.

나이 들어서도 어디서 취직하라 하고 도서관에서 일하고, 이러면 되잖아요. 뭘 걱정. 어디 가서 뭐라 하면, 내가 여기 있잖아, 건강하게. 나 코로나 유월에 하고 안 아팠어.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행복하잖아요.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그건 자기 공간이죠. 그건 천국 아닙니다. 그 공간 옆에 쓸어버리려고 물과 불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요.

주께서 율법을 준 것은 이 말씀대로 다 지켜서 거룩하지 아니하면 내가 쓸어버리겠다는 단호함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은 옛날 운명 그대로 가지고서는 소용없습니다. 운명을 바꿔야 돼요.

자,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율법을 주신 그 중심으로 끌려들어가야 되겠지요. 그건 뭐냐?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꼴까닥 숨넘어가는 게 아니고 내가 정들었던 모든 것이 그동안 내가 의미, 또는 의미의 장, 의미의 체계를 형성하면서 내가 여기 있다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거미줄 나와요. 촘촘한 거미줄 나오거든요.

이 거미줄 전체에 여기 차도 있고, 내 가방도 있고, 내 신발도 있고, 내 옷도 있고. 여러분 집에 드레스 룸이 열 평짜리 다들 있지요. 거기 옷 이백 벌은 기본적으로 있는 거잖아요. 그 옷들 보세요. 다 추억이 있고 거기에 내 과거와 나와 관련돼 있는 거예요. 그때 처녀시절 홀쭉할 때 입었던 옷도 지금은 꿈의 옷이 되지만, 어쨌든 간에 버리기 아까워서 있다고. 그게 나의 의미의 체계를 이루는 거예요. 의미의 그물망. 심지어, 내 차 같은 것, 신발은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 의미의 장, 이걸 뭐로 바꾸느냐? 너 거룩해, 네가 완전해, 완벽해, 라는 그 말 한 마디에 의미가 졸지에 무의미로 바뀌는 거예요. 아무 쓸모도 없는 옷이 드레스 룸에 있는 거예요. 천국 가는데 반짝이 옷이 소용없다는 것을 왜 진즉에 몰랐을까? 나이키 신발이 내 천국 가는데 내 죄 사함에 아무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왜 예전에 미처 몰랐을까요?

거기 쓰레기에 보면 자기의 의미 체계에 이런 것도 있어요. 장로 임명장도 있어요. 이 이야기는 이번 주일에 해야 되는데, 주일 설교 제목이 <감독의 자격>이에요. 옛날에 교회에서 잘 나가고 칭찬받고 전도 상 받은 것 있잖아요. 그게 전부 다 뭐로 바뀔 때? 무의미로 바꿀 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의미 있는, 가치 있는 나를 무의미로 바꿀 만한 그런 권한이 있는 자는 바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했던 누구시죠? 영광스런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 공간 아니면 누가 나를 무시합니까? 그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이야기할 때 주제가 뭐였어요? 명품 가방 산 그것 아닙니다.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주님 내 죄 사하시기 위해서 언제 돌아가십니까?

“니 가방 좋네. 가방 바치면 죄 사해지는 것 아니냐?”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건 아니옵니다.” “너 이번에 헌금 많이 했네. 그것으로 죄 사함 받아라.”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뭔데?” “무의미합니다. 충성.” 비로소 자기 입으로 자기 행한 모든 행함이 의미 없음을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고백하게 만드는 이스라엘을 몰고 가는 상황이 그 상황이에요. 그게 율법, 계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럼 이게 뭐냐? 한 마디로 사람을 의식할 필요 없어요.

이제 첫째 시간 마감하면서 아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이 없었던 해답을 내려 보겠어요. 인간은 왜 마음이 공허하냐? 온갖 취미생활해도 가을 되면 허전하냐? 호르몬 탓인가요? 그런 것 있잖아요. 여자는 봄 되면 들뜨고 남자는 가을 되면 들뜬다고요. 남자는 가을에 바바리 깃 올리고 폼 나지도 않은데 검은 안경 쓰고 하는데. 그래서 이런 농담이 있어요. 여자는 봄에 결혼하고 남자는 가을에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그걸 모순이라....

도대체 왜 공허하냐? 그건 이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난 게 아니고 타인의 욕망이 나의 내용을 다 잠식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 의식하기 때문에 공허한 거예요. 남들의 희망과 기대와 보람에 부응하지 못한 데서 오는, 그걸 죄책감.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타인 중의 타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거예요.

양심이 하나의 율법적 기능을 해서 항상 목말라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채워도, 채워도 남들이 요구하는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본인 안에 들어와 있는 본인 안에 파견근무하고 있는 타인의 욕망이 나를 항상 질타해요. 나무라고 책망하는 거예요. 남들이 뭐라 하면 타인의 욕망으로 구성된 나의 양심이 얼마나 나를 못 살게 구는 거예요. 나를 고문하고 항상 나에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심판 내리고 벌 내리고 채찍질하고.

이 율법의 저주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으랴. 내 안에 악이 있는데. 내 안에 악이 있다는 게 나쁜 짓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 안에 악이 있다는 선악체계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선악체계가 온전한 선을 원하는데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니까 내 안에 죄가 있다 할 수밖에 없지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죄책감에서 건져내랴.” 벌써 이렇게 해놓고 사도 바울이 고개 푹 숙이고, 누가 나를 죄책감에서.... 히히히히, 하면서 웃는 거예요. 고민은 실컷 고민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손바닥 펼 때는 극복, 하고 감사하리로다. 주께서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었습니다. 과연 그 주의 일이 그게 뭐냐? 10분 쉬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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