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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9 11:18:02 조회 : 70         
10강-나훔 3장 8-12절(사라져버림)22092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210.95.17.220)
10강-나훔 3장 8-12절(사라져버림)2209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3장 8-12절까지입니다.

나훔 3:8-12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성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이 그 힘이 되어 한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의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 어린아이들은 길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 모든 대인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너도 취한바 되어 숨으리라 너도 대적을 인하여 피난처를 찾아보리라 너의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여기 나오는 이 내용은, 앗수르란 나라가 지금의 이라크거든요, 이라크의 운명을 나훔 선지자, 하나님께서는 무엇과 반복이라고 보느냐? 애굽에 있었던 노아몬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어요. 현재 이집트로 통합되어 있지만 이집트가 통합되기 전에 부분부분으로 작은 국가로 나뉘어 있을 때에 노아몬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자랑하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뭐냐 하면, 자연적으로 바다와 강, 강력한 방어체제가 자연적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고 늘 자랑질했던 그 나라인데 그 나라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여지없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나라가 멸망할 때 옆에 도와주는 나라가 있었다는 거예요. 8절에 나오는 “구스” 에티오피아지요, “애굽” 지금의 이집트지요, 다 주변 나라입니다. 구스와 애굽과 붓과 붓은 그 이웃 나라고요, 루빔, 현재 리비아지역인데요, 그 나라가 도와줬지만 그 도와줌은 하등 소용이 없었고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귀족들까지 비참하게 떼죽음 당했고, 귀족들은 모욕당하는 식으로 제비 뽑혔다고 되어 있지요. 10절에 보면 “그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러니까 운명이 점령군에게 완전히 맡겨져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는 서글픔을 당하는 거예요. 인간이 가장 서글플 때는 누구로부터 일방적으로 그 운명이 제비 뽑히게 되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가련하지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의 미래나 자기 일상을 본인의 결단력과 의지로써 유지한다고, 그게 바로 인간의 가치인데 전쟁 중에 그 가치는 소용없었습니다.

10절에 “그 모든 대인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12절에 보면, 나라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도망치기 바빴고요, 12절에 보면 “너의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그들의 국가라는 것은 바람불기만 해도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해도 먹는 자의 입으로 쏙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도무지 피할 곳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옛날에 그런 노아몬이라는 이집트 지역의 그 나라의 운명은 그렇게 서글프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와 똑같은 수모를 니느웨, 앗수르 제국이 당할 것이다.’ 이렇게 예언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하느냐?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고 있는 거예요. 예언을 한다는 것은 예언자가 이 예언을 함으로써 말씀이, 예언이 살아 있는 쪽, 이스라엘 쪽,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관심 있게 관리하고 있다는 그러한 증거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는 처참하게 그 말로를 미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버림받은 자에요. 버림받은 자의 끝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버림받은 자를 명쾌하게, 날카롭게, 확실하게 구분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손님들, 고객들 만날 때, 아이들 대할 때 ‘저거 버림받은 자다. 저건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리대상이다. 하나님께서 받아준 사람이다.’ 이렇게 분류합니까? 그렇게 분류를 잘 안 하지요.

그렇다면 이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갖고 있던 그 취지, 그 취지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지게 되잖아요.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 따로 다루시고 자기 백성 따로 다루시는데 그 방법과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면 안 되겠지요. 왜 우리는 자꾸 성경 말씀을 놓치고 하나님의 뜻을 자꾸 잃어버리는지, 그 이유가 나훔 선지자의 예언 속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서 관심 없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앗수르가 파멸하는 이유는 뭐냐? 홀로 자기가 주체가 되려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홀로 주체가 된다, 그 말은 감포 앞바다 무열왕릉 있잖아요, 왕 자기 혼자의 무덤을 해 놨는데 왕의 무덤이지요, 그게 대표적인 홀로 주체가 되기에요. 자기가 최고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나는 내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그런 것이 있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와 버림받지 않은 자를 구분하시는 그 구분에서 우리가 동떨어지게 돼요. 그것은 주와 일치되는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 것만 잘 챙기면 되지 뭐.’ 이렇게 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버리고 어떤 자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까, 하는 그 기준에 준해서 우리가 살아야 되는데 나는 내 것만 악착같이 붙들고 있으면 ‘그러면 나름대로 나도 인생 살았다고 할 수 있잖아.’라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무슨 꼴이 나느냐 하면, 이 앗수르 꼴이 나는 겁니다.

앗수르 제국은 그 당시 최고였어요. 최정상을 달렸던 국가입니다. 그런 국가가 13절에 보면, “너의 중 장정들은 여인 같고”, 그렇게 용감스럽던 남자들 용감하기 짝이 없던 맹수 같은 그 군인들, 누가 봐도 ‘야~, 저건 마초 같은 남성이다.’ 마초 같은 남성 있잖아요. 허세 부리면서 얼굴에 스킨을 과격하게 탁, 바를 정도로 남성다움. 그런데 남성다움이 하나도 없고 여인 같은, 그래서 맥을 못 추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고유의 것이 날아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너의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전환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네가 왜 그걸 모르고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스라엘 모든 것은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 겁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 앗수르, 여기 노아몬 같은 나라 역시 이방 민족, 이런 나라들은요, 내 것은 내 거라고 우기면서 거기서 자기의 주체적 동질성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나는 항상 내 것으로 인하여 나는 나답다. 이런 고집이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교회 나오고 성도라고 하면서 ‘이것은 내 겁니다.’ 이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릴 자를 버리고 사랑할 자를 사랑한다는 그 취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세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주 참혹한 전쟁의 결과가 나오는데요. 이 전쟁의 목표가 뭐냐? 전쟁의 목표는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인간을 사라지게 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은 이제 재료적인 면에서 인간을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가? 창세기 2장에 보면 진흙으로 만들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름이 진흙, 아담이라 했거든요.

재료적으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갔지만 형상적인 면에서 인간은 점에서 와서 점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에서도 그래요. 모든 세포의 시작은 점으로부터 시작해요, 점. 이제는 제로(0)에요. 없음에서, 없음이 점이 되고, 점이 커서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몸체를 이루고, 나중에 나이가 많아 몸체가 늙어서 쇠약하고 부서지게 되면 하나의 점으로, 또 소실점으로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의 목표는 모든 것을 다 부수고 다 없애버리고 사라지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버림받은 자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가? 그것은 나를 잃어버리고, 나를 잊어버려야 돼요.

보통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철 좀 나라.” 철이 든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고’가 달라요. 철이 든 것은 자기가 봐도 시건났다, 모든 지혜 이런 것이 제대로 갖춰져서 쓸만한 인간으로 달라진 것을 철이 들었다, 철이 났다, 서로 독단적으로 자기 능력으로 살 수 있다, 이게 철이 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는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건 철이 난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 관해서 자기 고유의 것 이런 것은 잃어버려야 되고 ‘이것은 내 거다’ 그걸 잊어버려야 돼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는 이미 그 소유권이 주님 앞에 넘어가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주저할 이유가 없어요. 나를 잃어버리고 나를 잊어야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상담이나 이런 데 보게 되면 인생의 의미는 뭐냐, 인생의 정답이 뭐냐, 어떻게 살아야 정답이냐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정답 없습니다. 인생이란 정답이란 없어요. 버려야 되고 잊어야 되지 정답 알아서 뭐할건데요? 없어지면 그만인데 왜 정답을 굳이 알아야 됩니까?

학생이 시험 치고 있는데 선생님은 “너 시험 칠 자격 없어.” 시험지 뺏어갔어요. 뺏기면서 학생이 막 선생님에게 달려듭니다. “5번 문제 답 (다) 맞지요?” “너는 시험칠 자격도 없는데 5번 문제 답이 (다)가 되든 (가)가 되든 누가 무슨 상관이 있느뇨?”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가 남자로 살든 여자로 살든, 내가 40에 죽든 90에 죽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빌라에 살든 아파트에 살든, 엎어지든 넘어가든, 태풍에 부서지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이미 소유권이 나한테 없는데요.

소유권이 있는 자는 전쟁에 의해서 완전히 소실시켜요. 다 없애버리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놓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발하고 싶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놨다는 그것은 옳은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은 ‘인간만’ 만들었어요.

이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형상으로 자기형상을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되어 있거든요. 이걸 줄이면, 하나님은 자기형상을 지상에, 에덴동산에 만들었어요. 따라서 형상 빼놓고 다 없애버립니다. 그게 창조원리에요.

대전강의에서도 그런 언급을 했는데 창세기 6장 7절에 보면 “나의 창조한 사람을 ”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어요.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조했다고 하시면서 쓸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느냐? 쓸어버리기 위해서 창조한 거예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내가 만든 인간 내가 쓸어버리겠다는데 쓸어버릴 대상인 주제에 네가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랍비여~!”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말도 안 돼요.

만들 때는 왜 만들고 왜 또 쓸어버립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인간이 아닙니다.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한 분이기 때문에 쓸어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끼리도 만들고, 새우도 만들고, 독수리도 만들고, 다 만들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왜?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라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창조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예수님을 살리겠다, 예수님을 주로 드러내겠다는 의미가 필히 포함이 되어야 그게 창조라는 개념을 제대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주님을 드러내는 거예요. 창조된 우리, 코끼리, 고래, 이런 것 말고요, ‘인간만’ 창조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만 거기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보조적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이게 정답입니다.

그러니 정답은 인간에게는 없지요. 정답은 누가 정답인가? 예수님 존재와 하신 일이 정답이고 그것이 진리요, 그것이 길이요, 그게 바로 생명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길을 하나님이 쓸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인간들은 무엇이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 생명 나무는 먹되 선악과 나무는 먹지 말라, ‘먹으라, 먹지 말라.’가 자기 내부에서 일치를 못 봐요, 인간은.

일치를 못 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체적으로 동질성을 유지할 수가 없고 상이성, 서로 차이 나는 것을 자기 내부에 모순으로서 갖고 있다. 아무리 해도 맞지가 않는 다른 요소가, 두 개가 인간 속에서 대립되어 있고 투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고유의 것은 하나님이 딱 보시기에 저것은 필요 없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것 내 것이라는 것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자,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없애려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들을 없애기 위해서, 인간들을 전쟁을 통해서 없애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생명 나무를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나무는 먹지 말라.” ‘먹어라, 먹지 말라’가 하나님 안에서는 전혀 모순 없이 하나님 안에서는 둘 다가 가능해요. 이 동질성이.

저것은 먹지 마, 이것은 먹어, 이게 다 되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누가 금지하는 것을 용납을 못 해요. 왜? ‘하지 말라’가 짜증이 나서 안 돼요. ‘하지 말라’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인간은 뭘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려해주면 ‘좋~다’ 하지요. ‘하지 말라’ 하면요, 인간은 절대로 굉장히 불쾌해합니다. 심지어 어린애까지라도 “머리 좀 감아라.” 하니까 “머리 감기 싫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일 감을까?” 하니까 내일이라도 머리 감기 싫다는 거예요.

“하지 말라. 너 그러면 안 돼.” 이게 인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한 모욕감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사라진다는데 뭐가 사라지느냐? 인간이 만든 신들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이스라엘을 앞장세웠을 때는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그 외 모든 신들 사이에서 진짜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밖에 없고 언약의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 모든 신들을 다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들의 신이라는 것은 뭐냐?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들어주는 그걸 동조하고 도와주는 그게 바로 우상이잖아요. 쉽게 생각하면 이런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도배를 해놨는데 이 도배된 것을 하나님이 와서 뜯어내는 거예요. 지지직, 뜯어내는데 그 도배지가 뭐냐? 신들의 이름으로 도배 되어 있는 거예요. 신들의 이름으로.

그 신들의 이름은 뭐냐? 인간들을 격려하고 인간들을 후원해주고 하면 된다, ‘해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계속 뭘 하면 뭐든지, 정성이 지극하면 뭐든지 하늘도 응답한다, 다 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뭐든지 해준다, 이런 식의 우상적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은 그런 신에 대해서 동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거부감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아닌, 백성 아닌 사람들, 버림받은 자들, 버림받은 자들이 자기를 위로하고 현실을 처방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실시하는가? 이거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주님을 모르고 버림받은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위로하던가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 현실에 대해서 자기가 조치를 하고 처리를 하고 처방을 내리던가요?

그 목표가 뭡니까? 나의 고유의 것을 내가 다치거나, 흠집나거나,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위로하는 식으로 모든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버림받은 자들’이 너무 길잖아요. 그러면 그냥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간단하지요. 사람들이 자기를 위로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며 현실에 대해서 자기가 어떤 조치를 내리는가? 한번 주의 깊게 유념하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시는 동시에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무엇을 그동안 동원 시켰는가? 그리고 내 것이 다치고 위험스럽다, 내 것을 잃게 될까 염려된다, 할 때에 내가 행동에 나설 때 어떤 행동에 나서는가?

그 행동 나서는 것, 그 노력하는 것, 수고하는 것, 그 목적이 뭡니까? 나만의 고유한 것을 내가 상실하지 않겠다는 그러한 저돌적인 몸부림이잖아요. 이걸 물리학에서 potential energy라고 합니다. 위치에너지. 위치에너지 속에 있는 잠재성 있는 힘, 이걸 potential energy라고 합니다. 이 potential energy가 인간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거기서 누가 “하지 마” 이렇게 하면 반박으로 폭력적인 반발과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폭력적으로.

어떤 기독교 학교, 천안의 나사렛 대학이지요, 그 기독교 학교에 있는 여학생인데요, 어느 날 대단히 삐졌어요. 왜 삐졌는가? 한복을 입었는데 동생이 멋도 모르고 “언니! 그 한복이 절에 있는 등(燈)같다.” 이랬다고, 절 이야기를 했다고 막 눈물 흘려요. “나는 ( )다. 언니 옷은 ( )다.” 여기서 “언니 옷은 절에 있는 등 같다.” 여기에 폭력적인 내부의 반응을 여지없이 드러낸 거예요.

그래서 그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고 빨리 수습하기 위한 반응은 뭐냐? 눈물 흘리는 거예요. 동생 앞에서, 엄마 앞에서 우는 겁니다. 이걸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인간극장> 보시면 됩니다. 약간의 자폐증 장애 소녀 이야기인데 보시면 알 거예요. 장애자라 하지만 내부에는 potential energy, 잠재적인 에너지, 어떤 힘이 있어요.

그 힘은 내 본능인데요, 내 것은 내가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국민학교때 책상이 이렇게 있다면 옆에 앉은 짝 넘어오지 말라고 삼팔선, 휴전선 그려놓는 것, 이게 내 것 지키는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게 앗수르고요.

그런 자세로 가서 신을 믿는다는 것,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 여호와, 용어가 어떤 용어든 관계없어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내 것은 내가 기어이 쥐고 있겠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자기 동일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자기 동일성이 성립이 안 돼요. 자기 동일성이 갖추지 않는 주체는 자기 동일성이 갖춰 있는 하나님의 주체에 의해서 여지없이 파괴당하고 전쟁을 통해서 전부다 소멸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본문 내용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고집스럽게 자기를 주체자로, 최고의 자리로 들어섰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사정없이 전쟁을 통해서 다 박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드린 겁니다. ‘철이 났다’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마음을 낮춰야지. 겸손하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에요, 자기를!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나는 것은 가능해요. 인간이 시건이 있고, 공부해서 남 배려할 줄 알고, 남에게 잘 섬기고, 이건 할 줄 아는데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부인하는 경우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 엄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치맛바람이지요. 왜 세베대의 아들들의 그 엄마가 두 아들 데리고 예수님을 왜 찾아왔겠습니까? 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엄마가 자기 아들 아닌 가룟 유다 보고 ‘저 가룟 유다 천당 가게 해달라.’ 이렇게 온 게 아니에요. 내 자식이에요, 내 자식, 내 고유한 내 자식이란 말이지요.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러니까 세베대의 아들들 엄마는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을 대단히,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니에요. 내 자식이 들어갈 곳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자식이! 천국은 내 자식을 소멸시키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하는 곳인데 그게 아니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 동질성을 보장받는 유일한 모순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만 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모순을 갖고 있고 ‘먹어라, 먹지 말라.’에 대해서 아무런 모순을 안 느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나를 위로할지언정 왜 나를 비난하느냐, 나한테 왜 잔소리하느냐, 이게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런 본성, 내 것을 내 것으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데, 맨날 하는 일이 자기를 위로하는 일을 하는데, 맨날 하는 일이 내 것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현실적인 처방을 내리는데 모든 정력과 수고를 다 쏟아붓는 나인데 그런 나가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그게 무슨 자기 부인이겠습니까? 자기 부정 아니지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참 기가 차지요. 그래서 22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네가 나의 좌우편? 그것은 너희들이 기대해서도 안되고 아버지께서 누굴 위해서든지 예비한대로 줄 뿐이다.”

따라서 26-28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게 바로 spot, 어떤 지점 아닙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주님다움은 뭐냐? 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객실 하나 얻겠다고 아우성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형국이에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 신을 뜯어내는 방식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그냥 두꺼운 철문이라 보시면 돼요. 철문.

이 철문은 태풍에 난리가 나도 그냥 자빠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 철문을 가지고 중압감, 프레스(press) 해요. 이 세상을 철문을 앞장세워서, 율법을 앞장세워서 뒤에서 밀어내는 거예요. “이걸 하면 복을 받지만 이걸 못하게 되면 저주받는다.”라고 복과 저주, 인간에서는 도저히 통합이 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만 통합이 되는 그 이질적인 두 개의 상이한 내용의 질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 율법을 앞장세울 때 ‘나 뭐 저주받아도 좋고 복 받아도 좋아.’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 앞에서 ‘안 돼. 나는 저주 받으면 안 돼. 난 반드시 복 받아야 돼.’ 서로 상이한 복과 저주 두 개가 자기 내부에서 결코 일치되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 율법 앞에서.

오늘날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믿으면 용서를 받지만 십자가 안 믿으면 네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 간다.’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하나님의 조치인 것을 모르고 평소에 자기를 위로하고 평소에 나를 내 고유의 것, 내 고유의 것 있잖아요, 내 것, 내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 피를 믿고 싶어라, 십자가 피를 믿고야 말리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이것은 어디 갔지요? 이거 왜 뺍니까? “내 쓴잔을 마시라. 내가 사라진 것처럼 너도 사라져야 돼. 너는 내 잔을 마셔야 돼. 이 잔 마시고 나와 더불어 사라지자.” 이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디로 가버렸지요? 인간이 갖고 있던 potential energy, 잠재적 에너지 반응, 극렬하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있던 힘, 그 힘이 사실은 인간의 힘이 아니었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에 신명기 10장 10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 산에 유하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처음과 같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돌판을 줄 때 시내산 위에서 40일 동안 있었어요.

그리고 돌판을 깨뜨리고 다시 두 번째 돌판 줄 때도 내가 처음과 같이 처음에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것처럼 두 번째 할 때도 내가 처음과 같이 40 주야를 산에 유하였고 그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희를 멸하지 않기 위해서 돌판을 주셨다, 깨진 돌판이 새로운 계약으로서 등장한 거예요.

깨졌다는 말은,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계약상대자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이 확정된 상태에서 그 계약상대자도 아닌 자에게 추가적으로 제공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두 번째 돌판이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서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돌판 때문이에요.

첫 번 돌판은 깨지기 위한 돌판, “인간은 자기 것 지킨다고 계약상대자가 될 자격도 없어.” 두 번째 돌판은 뭐냐? 인간은 그런 존재밖에 안 돼,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그런 존재를 구원하고 자기 백성 만들기 위한 새롭게 추가된 돌판이에요. 그 돌판에 피가 묻힙니다. 그 피로 구원받지요.

그러면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를 내가 믿어서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잘못되게 믿는 그 십자가,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줄 대상도 아닌 그 인간, 그 인간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이 말이 어렵습니까? 버림받은 자한테는 굉장히 어려워요. 자기 위로하고 자기 것, 내 것을, 내 고유의 것을 지키겠다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미 버림받은 인간을 위해서 40일 동안을 어떤 일을 했는가? 모세가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어요. 예수님도 똑같은 일을 산 위에서가 아니라 이 지상에서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1, 2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그 때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함으로 드러난 상황은, 이 땅에 인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악마가 완전히 다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지요. 인간이 자기 것 지키고 나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교회를 가든 절에 가든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라고 하는 모든 발언들, 그러한 주장들, 사실은 그것이 악마의 통제하에서 악마가 도배된, 그 악마의 집 안에 들어 있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비슷한 예가 이스라엘 사울 왕 때 있었어요. 사울 왕이 마지막 죽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이랍시고 ‘이스라엘에서 모든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게 되면 이 나라 지켜주지 않겠느냐.’ 해서 모든 무당들, 점쟁이들, 혼을 불러내는 초혼자들, 신접한 자들 다 없애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 도배를 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도배를!

그런데 사무엘상 28장 7절에 보니까 이게 사울이 율법으로 도배한 게 아니고 악마로 도배를 해 놨어요. 사울은 본인 생각에 다 율법대로 했다고 하는데 적들이 오니까 비로소 내가 이스라엘을 자기 것으로, 내 고유의 것으로, 자기가 왕이니까 내 것으로 착각한 거예요.

인간은 이스라엘 지킬 자격도 안 돼고 그런 능력도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왕이라고 능력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기어이 어떤 경우라도 내 것을 못 놓겠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사울왕의 고집이나 오늘날 우리들의 고집도 만만치 않거든요. 세상이, 뭐 우크라이나고 뭐고 간에 밥이나 먹고 있으면 된다, 전쟁을 하든말든 나 모른다, 기름 값만 안 오르면 된다, 인간은 자기 것 지키는 그것 외에는 다른 머리가 없어요. 다른 머리 쓰는 게 없다고요.

나를 위로하고……, 지금 몇 번 나오는지 모르겠다만 또 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내 것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처방, 한평생 사시면서 그것 외에 다른 이야기하신 것 손들어 보세요. 얼른 내려야 돼요. 없지요. 내 것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모순이 되든 뭐든 간에.

사무엘상 28장 6절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그 이유가 있지요. 율법이라는 쇠문 가지고, 두꺼운 문 가지고 밀어붙이기 때문에 사울이 하나님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모든 루트가 차단되어 버렸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요.

율법은 하나님이 들어주는 게 아니고, 지키면 복 준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지킬 수가 없어요. 율법은 지킬 수가 없어요. 그냥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어진 것은 저주밖에 없는 거예요. 신명기 27장 15절에,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하나님의 저주 항목에 나를 지켜주는 신, 우상적인 것, 이것은 이미 인간은 저주입니다. 저주받은 인간이 이 저주받은 세상과는 굉장히 친밀하지만 하나님한테는 낯설지요. 내가 만든 것을 내가 쓸어버린다, 하는 하나님의 그 어투가 굉장히 낯선 거예요.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 자식인데 자기가 그렇게 하느냐……”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아닙니다.” 혼자 중얼중얼중얼,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놓고 그걸 자기가 쓸어버린대? 어떻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지옥에 보내나? 납득이 안 되네…….”

납득이 안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이 가로막혀 있는데 그들은 자기가 우상으로 도배되어 있고, 마귀로 도배되어 있다는 상황을 자기가 인정 못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라 해도 자기를 부인 안 합니다. ‘내가 어때서?’ 이 나이가 어때서, 하는 식으로 내가 만날 ‘내가 어때서?’ 예요.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다. 이게 바로 악마에 속해 있는 인간들이 결국 찾는 것은, 내 것 지켜주는 것은 결국 누구밖에 없다? 악마의 종, 무당밖에 없다. 점장이 밖에 없고 ‘장난삼아 한번 보는 건데.’ 이런 것처럼 그런데 의존하고 마음적으로, 심적으로 거기에 매달리는 것, 이게 인간이 최후로 믿었던 그 신입니다.

뭐 그전에는 그 신이 악마인 줄 모르고, 거기다 예수, 삼위일체, 성령, 성신, 아는 것 다 때려 부었지요. 아니에요. 내 것, 고유의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우상은 여전히 우리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자, 끝으로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에게 성령 주께서 버리지 않고 찾아오시는 사람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자기 것을 잃어버리는 특징이 뭐냐?

잃어버릴 때 특징이 사명입니다. 그냥 섬기고 해주는 게 재미가 있어요. 그게 보람이 있어요. 그래서 요한1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하면서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범죄치 아니한다, 는 말은 자기 것이 없음을 도리어 감사하기 때문에 범죄할 리가 없어요. 범죄라는 것은,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게 범죄거든요. 이미 인수인계가 끝나서 누구 것이 되었느냐 하면, 주님의 것으로 다 처리가 되었어요. 주님의 것으로 넘어가 버린 사람에게 우리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주께서 쓰시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기 위한 사람이에요. 누구와 경쟁하거나 그리고 스스로 실패하거나 성공했다는 그런 것이 사라져 버렸어요. 경쟁함으로 비교하지도 않아요.

내가 공부 1등 한 것, 뭐 아무 의미 없어요.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섬기기 위함입니다. 하루하루 여러분, 여러분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사도바울처럼, 사도들처럼 남에게 보탬 되는 삶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즐겁게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내 것이라고 쥐고 있겠습니까. 애초부터 내 것이 없었는데 마귀한테 속아서 ‘네 것 네가 지켜야 된다’는 중압감으로 살아왔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것으로 가져갔기에 주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쁨이 있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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