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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6 10:34:03 조회 : 64         
11강-나훔 3장 13-17절(메뚜기 떼)22100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210.95.17.220)
11강-나훔 3장 13-17절(메뚜기 떼)2210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3장 13-17절까지입니다.

나훔 3:13-17

“너의 중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너의 땅의 성문들은 너의 대적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예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케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늣의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늣 같이 스스로 많게 할찌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찌어다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이 나훔선지자 오늘 본문 내용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희들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 봤자 그 노력이 허사로 끝날 것이다, 이런 투로 나훔선지자가 예언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앗수르 라는 거대제국이 가진 그 힘의 비축에 의해서 엄청난 성채, 성을 확보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견고한 성문들, 그 안에 있는 장정들이 여인같이 바들바들 떨게 될 것이며 나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며 그리고 견고한 성문들은 빗장이 풀려서 불에 타버린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종의 약을 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될 것이니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 벽돌 만들어서 견고케 하고 그다음에 어떤 노력들, 산성들을 단단하게 해서 수리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15절에 보면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늣의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늣이라 하는 것은 메뚜기 유충을 늣이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작은 메뚜기, 메뚜기 되기 전의 유충, 유충은 풀이 있으면 정신없이 뜯어먹지요. 마지막 작은 풀까지 다 뜯어 먹는 것이 늣의 본성입니다. 그처럼 네가 아무리 전쟁을 대비해서 많은 것을 비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16, 17절에 보면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메뚜기)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너의 방백(지도자)은 메뚜기 같고(그래서 다 날아가고) 너의 대장(사령관들, 장교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잠시 있다 사라지고)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멸망의 정경, 앗수르 제국이 멸망해가는 그 모습을 나훔 선지자가 미리 예언하고 있는 그 대목입니다. 자기 딴에는 노력을 했는데 이게 무엇과 같으냐 하면, 난데없이 등장한 메뚜기, 출처를 모르는 메뚜기, 우발적으로 발생 된 메뚜기, 그 메뚜기가 등장해서 풀을 뜯어 먹는 것처럼 다 뜯어먹고 난 뒤에 그다음에 17절 끝에 보면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날아갔는데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이것은 그 메뚜기가 난데없이 등장했기 때문에 갑자기 득실대는 메뚜기가 어디서 이렇게 몰려왔는지를 인간들은 알 수 없고, 그리고 메뚜기가 자기 배불리 먹고 사라질 때도 그 많던 메뚜기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그 현장에 하나의 메뚜기도 없이 ‘전에 메뚜기가 있었나?’ 할 정도로 다 사라져버리는 것, 그 메뚜기와 이 앗수르제국, 강대국의 형편을 선지자는 합체시킵니다. 그걸 합쳐버려요. 메뚜기의 그 모습이나 그 메뚜기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나 제국의 모습이나 그걸 동일시해버리는 겁니다.

특징이 뭐냐? 둘 다 출처를 모른다는 거예요. 입구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게 인생이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늙어서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마치 꼭 뭐와 닮았느냐? 메뚜기가 떼쓰리로 몰려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가는 그러한 정경과 빼닮았다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 우리가 메뚜기 신경 안 쓰잖아요, 특히 이 메뚜기의 특징의 핵심은 그 메뚜기가 떼라는 것, 떼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개인은 의미 없습니다. 그 안에서 같이 몰려다니는데 문제는 그 메뚜기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거예요. 메뚜기가 막 날아다니면서 우리 누구지 그런 것은 몰라도 돼요. 그냥 마치 공중에 나는 기계 같아요. 뭔가 우르르 왔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의식하거나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일상생활이에요.

이 앗수르제국은 그동안 자기들이 어떤 확고한, ‘우리는 이러니까 우리답다, 는 것이 있다.’고 자부했지요. 그게 자기 정체성인데요. 왜냐하면 부와 명예와 권력, 이런 것을, 그 당시 세상에 있는 최고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그들은 다 한데 모으고 있었습니다. 힘을 비축한 거지요. 그렇게 힘을 비축해 놓고 ‘힘을 비축한 그것이 곧 우리다. 우리의 본질이고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돼.’ 하고 자부심을 느꼈던 겁니다.

그 자부심 느낄 때 본인들이 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기계 같은 메뚜기떼하고 동일하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엄연히 내 것이 있으니까, 권력도 있고 힘도 있고 다 있으니까,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하니까 ‘우리가 왜 메뚜기야? 인간의 모든 부러워하는 것들을 다 달성한 위대한 제국 앗수르지.’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은 메뚜기와 같은 류, 같은 종류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에 애 많이 낳고 하니까 직장생활은 못 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순진한 가정주부들, 살림만 사는 사람들, 그런데 바깥양반이 저지레 해서 빚 잔뜩 져서 왔을 때 애는 많지요, 남편은 빚이나 지고 돌아다니고, 빚쟁이들은 들이닥치지요.

그런 사태가 벌어질 때, 지금은 그런 광경 잘 없지만, 흔히 어릴 때 봤던 것은 뭐냐 하면, 제일 귀중한 것들을 보따리로 쌉니다. 그 보따리를 노끈으로 묶어요. 보따리도 노끈으로 묶고요, 그때는 노끈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묶고 자기 몸도 노끈으로 묶어서 빚쟁이가 집안에 들어오니까 퍽, 하고 그 보따리 위에 엎어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안돼! 이거 가져가려거든 날 죽이고 가져가라.” 하면서 팍 엎어져 있지요.

평생에 고생하고 고생해서 얻은 것들 중에서 제일 액기스만 골라서 묶어놨으니까 자기하고 이건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어딜 여편네가!” 확 밀어버리고 그것마저 다 가져가 버리고 하지요. 이게 오늘 본문의 앗수르 제국의 특징과 같은데, 옛날 못살 때 그 시대 순진한 살림 사는 주부들 특징이 뭐냐? 방어실패 했다는 겁니다. 자기방어에 실패했어요. 자기 것 방어하기에 실패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요. 방어실패 했다는 게 서럽지요.

그런데 그들이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진정 내가 누구냐는 것은 다 놓치고 있어요. 가진 것 날아간 것이 애달프고, 서글프고, 나는 이제 못산다, 그 원통, 절통, 애통, 분통할 줄 알지만 그 상황 속에서 진짜 내가 누구냐, 하나님은 “너는 메뚜기야. 너라는 게 자체가 없어. 그냥 다른 떼쓰리하고 같은 메뚜기,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야.”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이게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을 가질만한 그게 내 모습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 방어실패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모든 인간은 꿈을 꾸는데 꿈을 왜 꾸느냐? 그게 방어실패 때문에 생긴 꿈이에요. 아닌가? 모든 꿈은 내 것 방어실패 할까 봐 불안감에서 나온 게 꿈이에요. 그것은 의식이 잠시 휴식하고 있는 밤에, 낮에 바빴던 의식 밑에서 들키지 않았던 그 밑에 있던 의식이 밤중에 의식이 쉬면서 자기의 불안감을 드러내는 겁니다.

‘지켜야 돼. 버텨야 돼.’ 낮에는 그게 티가 안 나는데 밤 되면 그게 꿈속에서 나타나지요. 나중에 깨서 보면 식은땀이 확 나면서 내 것 지키는 것에 평생을……, 내 것이 있어야 나답다는 것, 꿈에는 그게 방어실패가 꿈에서 재방송됩니다. 자, 이러한 불안감을 그대로 교회 와서도 기도라는 형식으로 쏟아내기 시작하지요. “하나님, 어떻게 만회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다운 인생을 지금껏 성취했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뭐냐?

‘안돼, 하나님, 안돼~! 이것만큼은 안돼~!’ 하는 것에 대한 그 반대말이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의 응답인데 그 응답이 뭐냐? 한 자입니다. “뭐!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제가 열심히 기도하잖아요.” “그래서 뭐.” 이게 나훔 선지자 예언의 핵심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너는 관심사가 ‘내 것 잃어버리면 안 돼’에 있지만 정작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알아야 될 것은 그야말로 ‘나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내 입구가 뭐며, 내 출구가 뭐냐? 내가 누구냐?’에, 그런 데 관심을 인간들은 안 두고 있어요. 두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뭐!” 이걸로 대는 이유가 창세기 3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고 난 뒤에 첫 번째 만남에서 아담과 하와하고 하나님하고 대화가 서로 통하지를 않아요. 창세기 3장 9, 10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그리고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이걸 한 자로 줄이면 “뭐!” 너는 지금 이 하나님의 관심사에는 관심이 없고 네가 지금 별 내세울 것 없고 헐벗었다는 것, 거기에 네가 지금 몰두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나는 내 위상을 챙기면서 어떻게 대처하면 돼?’ 지금 자기 가오, 자기 자존심, 의미, 체면, 이런 것에 정신 팔려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 네가 가진 관심에는 관심 없어요. 인간이 관심 두는 것에 전혀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이거 아시고 교회 나오셔야 돼요.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혹시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한번 제가 상기시켜 드리는 겁니다. 나의 관심에 주님은 관심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 11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가 심어놓은 나무밖에 없어요. 선악과나무 보세요. 이게 얼마나……, 인간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관심사가 완전히 틀어지잖아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완전히 다르지요.

사람들이 교회 만들어놓고 교회 와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 안 돼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면 안 돼요. 더는 망가질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고 “네가 내 선악과 망가뜨렸잖아.” 그거예요. “너는 네 인생 망가뜨리든 말든 나는 그거 모르겠고, 그것은 모르겠고, 됐고, 네가 내 선악과 따먹었잖아. 그거 어떻게 물어낼래?”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이 차이점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이 차이점, 하나님의 관심사와 교회 나오는 나의 관심사가 전혀 비켜 간다는 것, 만날 수도 없이 그냥, 그냥 공중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화살처럼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관심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그 찾아오는 것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고 아담한테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왔지요. 아담도 일종의 선지자니까요.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왔다는 게 그게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그 다음 말씀 한번 보세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되어 있어요. 성도라면 성도가 죽는 것조차도 성도 자기를 위해서 죽지 아니한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성도의 목숨이 본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본인의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렇게 죽는다.’라고 걱정할 잽이 못 된다는 거예요. 내 목숨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할 권한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가 관리해서 자기가 죽는 자가 없다, 그 말은 우리의, 성도의 목숨은 다른 분이 가져가서 그분이 자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내 목숨이 없고요, 내 목숨이라고 여겼던 그것조차도 주님이 자기 목숨이라고, 내 것이라고 여기고 가져가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주님의 관심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내 목숨을 다루시는 거예요.

어떻게 다루시는가? 육신 속에, 우리의 육신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어서 그 언약을 뽑아내서 그 뽑아낸 언약가지고 완성시키는 일을 해내시는 겁니다. 생리학자가, 생물학자 또는 의약품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어떤 아마존 밀림의 나무 열매를 따서 그 열매 성분을 분석해서, 여기서 말라리아나 코로나나 어떤 희귀병 특효약의 물질을 추출 뽑아낸다고 할 때 그 당사자 되는 식물이 “어? 내 건데?”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 건데 내 허락도 없이 왜 그 귀한, 희귀 약리 현상을 드러내는 그 약재료를 네 맘대로 뽑아내십니까?” 이렇게 제약회사한테 식물이 항의할 수 있어요?

뭐 식물은 입도 없으니 항의도 못 하지요. 하나님께서 죽을 목숨이라도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언약적 요소를 심어놓고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언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의 결말 또 하나는 복의 결말. 복의 결말요소를 추출하는 것은 천국 가고, 저주의 결말을 추출해서 “거봐. 너는 지옥 가기로 작정 되어 있어.” 할 때는 지옥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제약회사같은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교회 오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잠도 못 자고, 막 철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목숨이, 내 목숨이 내 목숨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고, 내 죽음이 언약을 이루기 위한, 약리현상, 언약을 이루기 위한 현상임을 생각 못 하고 자기 손해 본다고, 뭔가 자기 목숨 잃으면 자기한테 굉장히 손해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방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을 심어주고 언약을 뽑아냈지요. 물론 이스라엘도 만만치 않게 저항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이스라엘에서는 언약을 뽑아내서 그 언약을 다윗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에 메시아가 오게 하는 그 언약계통을 끊어지게 한 적이 없어요.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성도의 목숨은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어서 주님이 친히 다루시는 겁니다. 왜 다루시는가? 거기서 육신을 함몰시키고, 범죄한 아담의 육신을 함몰시키고 제거시키면서 거기서, 무의미하다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언약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이래도 우리 걱정 아니고 저래도 우리 걱정 아니지요. 뭐 내것이 있어야 걱정을 하지요. 내 것이 없는데. 강의 시간 같으면 내가 물어보지요. “걱정 없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지금 막 묻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성도가 되었으면요,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어떤 것이, 언약적 요소도 들어 있지만 어떤 것이 비언약적 요소가 됩니까, 라는 그러한 궁금점에 대해서도 우리가 해답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앗수르 제국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이렇게 나훔 선지자에 등장한 것은 비언약적 요소를 그들은 품고 있었던 거예요.

그 비언약적 요소의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거예요. ‘이거 뭐 비언약이니까 언약 쪽에 있는 우리는 알 필요 없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비언약적 요소를 알아야 언약적 요소가 분류가 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는 거예요. ‘아, 이게 비언약이고 이게 언약이구나.’

그러면 비언약이 어떤 것인지 제가 출애굽기 5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장 6-8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모세와 아론이 와서 히브리인들을 따로 뽑아내서 이 나라에서 데려가겠다 하니까 바로가 모세보고 하는 말이, 또 백성들에게 한 조치가 뭐냐? “너희들이 얼마나 게을렀으면 하나님께서 희생하는, 제사 드리는 거기에 쓰잘데기없는 관심을 두느냐? 이게 게을렀구나. 몸 편한 모양이지? 이게 한가한 모양이지? 그러니까 하나님 섬길 생각을 하지.” 자, 이러한 관점으로 모세와 히브리인들을 봤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무슨 관점이냐? 그 바로와 신하들은 본인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게 다 비언약이에요. 비언약적 의식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손해 안 보고, 어떤 경우라도 실수 줄이고,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패배하기 싫은 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생존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빨리 지나가서 못 들었으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어떤 경우라도 손해 안 보고, 누굴 만나더라도 손해 안 보고, 어떤 경우라도 내가 실수 줄이고,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지기 싫은, 패배하기 싫은 심보를 가지고 이 세상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뒤에 결정적인 말이 9절에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게 제사드려야 되고, 희생해야 되고 그래야 될 진짜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바로와 바로와 함께 있는 백성들, 애굽사람들과 신하들은 그걸 거짓말로 보는 거예요, 거짓말. 저들은 지금 거짓말에 속고 있다. “이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아! 열심히 일해서 밥 먹고 살기도 바쁜데 여호와의 약속, 언약을 왜 찾느냐? 성경 말씀을 왜 믿냐? 그거 구라잖아. 거짓말이잖아, 거짓말. 아니 세상을, 이 짧은 인생 살면서 열심히 일하기 바쁜데 어디서 거짓말에 현혹되어서 시간 낭비를 하느냐? 저들에게 짚을 주지 말고 재료 주지 말고 벽돌 수 그대로 다 채우게 해라.” 하고 바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모세가 다녀가고 난 뒤에 더 압박을, 노동의 압박을, 중압감을 준 거예요. 노동의 강도를 더 심하게 한 거예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 바로 말이 잘못된 게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 바로 주장, 의견이 뭔가 잘못된 게 있느냐, 하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이 바로 마음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똑같기 때문에.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성경 알든 모르든, 시간이 남아 터져서 빌빌 집구석에서 둥글 대는 것보다 교회나 가자, 이래가지고 교회 나오지, 교회 나와서도 “예, 예! 곧 갑니다.” 휴대폰 들고 예배시간에 “지금 갑니다. 곧 가게 문 열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왜 그런 행동 보입니까? 한평생 살면서 손해 안 보고, 내 인생 실수 줄이고, 세 번째, 남에게 때려죽여도 지기 싫은 그 심보가, 바로의 심보가 내가 교회 가서 여호와를 믿는다 하는 그 말 자체를 거짓말로 만드는 거예요, 거짓말로! 내가 믿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평소에 늘 잠복 되어서 그 심성이 깔려있었던 거예요.

왜? 애굽나라가 히브리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애굽나라에서 나왔던 히브리인들도 광야에서 자기 심보를 그대로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이 메뚜기떼가 공통적으로, 떼쓰리로 보여주는 그 심정은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 같이 살아야 그들로부터 인정받는다.’ 그 원칙입니다. 남들로부터 같은 심보로 살아야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거예요. 적어도 경상도 살았으면 국민의 힘 팍 밀어줘야 같이 있는 사람과 대화도 되고 인정받는 겁니다.

왜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느냐? 남한테 지기 싫거든요. 그리고 잘못 보이면 손해 볼 수가 있거든요. 손해 안 봐야 되고,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인생 곱게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실수를 줄이면 되지요. 그렇게 만든 나라가 뭐냐? 앗수르였습니다. 그 앗수르 제국, 그 거대한 성안에는 부와 명예와 권력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이 권력을 대대로 전수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인간의 문명을 이걸 전수하기 위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들은 신화라는 것, 신화, 신과 어떤 계약 같은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스 신화라는 게 있어요. 그리스 신화가 뭐냐? 아버지의 자리, 인간이 태어났을 때 맨 처음 맞닥뜨리는 폐쇄공간,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공간의 전부는 아버지의 권력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이에요.

어린 자식이 가정에 있을 때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꿈을 키울 때 그 꿈이 뭐냐? 아버지를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아버지가 누리고 아버지가 발산하고 있는 그 권위, 그 권위를 언제 나는 빼앗아 오느냐, 그 빼앗아 오는 만큼 나는 자립적인 자아성이 발달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고분고분하다가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말도 안 해요. 삐졌어요. 그게 신화에요. 그리스 신화의 시초는 신들이 사는 산이 있습니다. 2919미터, 올림푸스 산이에요. 그 올림푸스 산에 처음에 신이 있었는데 그게 혼돈의 신 카오스(Chaos)입니다.

카오스 신이 스스로 자식을 만들었는데 그게 가이아(Gaia)라는 땅의 여신을 만들었어요. 그 가이아가 에로스(Eros)라는 신과 결혼해서 우라노스(Uranus)라는 아들을 낳았어요. 우라노스라는 것은 하늘입니다. 혼돈이 땅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은 거예요.

그런데 우라노스가 누구한테 대드는가? 자기 엄마 가이아, 가이아는 땅이거든요, 땅의 여신에게 대듭니다. 처음에 혼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땅의 신이 나왔고, 그 땅의 신에서 에로스라는, 사랑이라는 신과 결혼해서 우라노스라는 하늘을 낳았고요. 그 하늘이 부모를 대적해서 부모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쟁취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없으면 나의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아버지가 없으면. 그래서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권력이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문명의 시나리오에요. 자식들의 소망의 모델이, 그걸 친부살해라고 하는데 아버지를, 하늘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계속해서 문명이 이어지는 것, 이게 문명이 보여주는 ‘인간문명 시나리오’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라노스가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이 타이탄(Titan) 또는 티탄, 거인족이 생겼고요, 그 거인족 중에 태어난 자식이 크로노스(Cronus)에요. 크로노스란 시간입니다. 말 자체가 어려우면, 혼돈에서 땅이 생겼고, 땅에서 하늘이 생겼고, 하늘이 땅에 반항함으로써 그때부터 땅은 하늘 우라노스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거인족 중에서 우라노스를 거세, 우라노스 아버지가 더 이상 자식을 못 낳게 거세해서 자기가 아버지의 모든 권력을 가진 자가 크로노스예요.

우라노스, 하늘 다음에 크로노스가 뭐냐? 시간이에요. 시간의 변화가 어떤 고정된 권력을 점점 더 변화로까지 이어지도록 한다 그 말이지요.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았으니까 자기가 또 자식 낳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식이 나를 대항하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낳게 되면 이걸 삼켜버려요. 반항을 못 하도록.

“어딜 아버지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고!” 하는 식으로 발로 차가지고 아들은 경찰서에서 맞아서 입원까지 했어요. 박수홍이. 그런데 크로노스가 레아라는 부인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데 자식을 낳을 때마다 계속 삼키니까 레아가 꾀를 써서 애라고 속이고 바위를 삼키게 만들고 마지막 따로 남겨둔 자식이 제우스(Zeus)입니다.

그래서 이 제우스가 또 누구한테 대드는가? 시간(Cronus)에게 대듭니다. 제우스는 헤라(Hera)라는 신과 혼인해서 이제는 권력을 자기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나눠줌으로써 자기가 최고신이 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많이 분산하기 위해서 제우스는 천하의 바람둥이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요. 권력은 그런 식으로 승계되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많은 떼쓰리, 메뚜기 떼처럼 그렇게 많이 확장되고 번창하면서도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념, 다시 말해서 권력을 어떻게 시간 따라서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 거기에만 온통 빠져 있는 것,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메뚜기 떼쓰리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 이 인간 문명이라는 게 이처럼 시간 따라서 아버지의 권력을 자식들이 빼앗아서 옛날 아버지가 했던 행세를 그대로 본인이 하겠다는 것, 이게 창세기 4장에도 라멕이 나와요. 가인의 7대손 나오거든요. 그렇게 할 때 그러면 우리가 이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주님께서 우리 목숨을 가져가서 우리 목숨 속에서 하나님이 심어 놓은 언약적인 것, “너 선악과 왜 따먹었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해놓고 죄인으로 간주하면서도 찾아왔다는 사실, 찾아오면서 우리의 그 무의미한 또는 죄악 된 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 있는 언약완성체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주께서는 해내시는 겁니다.

그 방법을 여러분이 짐작을 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그 거짓말을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이라 하는 것을 거짓말로서 그들과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 세상 문명과 인간들의 비언약적요소 그리고 육신들이 뭘 막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나오는 출처를 가로막고 있어요.

이게 소방법 위반입니다. 원래 비상구는 물건 같은 것 재놓으면 안 돼요. 비상계단은 급할 때 비상시에 써야 되는데 상인들이 그걸 다 가로막았다가 화재 났을 때 대비못 해서 몇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거짓이라는 게 뭐냐 하면, 진짜 거짓은 출처도 모르고, 입구도 모르고, 가지고 있는 그런 돈과 권력과 명예, 현재 “안돼~!” 하면서 거기에만 엎어져서 그것만 줄 창 쥐고 있는 이게 거짓이거든요.

그것이 이 인간세계에 하나님이 일하는데 숨이 막히게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길을 터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길을 트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준비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준비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그냥 곱게 물러가겠어요?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정신 팔려 있거든요. 맨날 꿈에 식은땀 흘리면서 “안 돼~!” 하고 ‘아이고, 꿈이었구나.’ 맨날 꿈꿨다 하면 방어실패에 관한 꿈, 꿈만 꿨다 하면…….

수능 끝나고 이미 대학에 합격했는데 합격하고 난 뒤에 피곤해서 자다 보니까 떨어졌어요. “안 돼~!” 하고 깨보니까 합격했어. 그 정도로 인간은 내 것, 그 내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아버지의 것, 아버지의 요청, 아버지의 욕망, 아버지의 시선, 아버지의 기대감, 그게 내 것으로, 고스란히 내 것으로 온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출처가 막혀버려요. 거짓에 의해서 진리가 막혀 버린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강호의, 무림의 고수들이 있는 무술 도장이 있잖아요. 도장깨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하나, 바로신은 바로를 깨고, 애굽신이면 애굽을 깨고, 그 뒤에 나오는 무수한 것들, 앗수르 깨고, 바벨론 깨고, 이방 민족 블레셋 깨고, 모압 깨고, 암몬 깨고, 뭐 하여튼 아람나라 등등 전부 다 하나님께서 그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이 했던, 인간이 시작도 끝도 모르고 그냥 가지는, 그것이 진실인 줄 아는 그것을 이스라엘을 가지고 깨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강의에서 그걸 비유로 주사기라 했는데, 언약이라는, 율법이라는 주사기를 가지고 쏙 우리 몸속에 집어넣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진리잖아요. 선한 거잖아요. “아담아, 선악과 어디 있느냐?” 그 묻는 물음이 율법 안에 들어 있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말씀이 주사기 바늘이 되어서 우리 내부에 훅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 그 두꺼운, 삼겹살보다 더 두꺼운 비곗덩어리,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면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남한테 따돌림받는다는 그게 무서워서 세상적인 무가치한 것으로 꽉 잔뜩 낀 그 기름기를 주님의 언약, 십자가, 뾰족한 십자가, 십자가가 원래 끝이 뾰족해요, 그걸 밀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밀고 들어오실 때 느끼는 게 뭐냐? 우리가 메뚜기는 아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의 떼쓰리로 몰려 쓸려 가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오토바이 한 10대 빠라빠라빠라밤~, 해서 맨날 밤중에 시끄럽게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인생이 그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골프채 들고 저희끼리 하루에 50만 원씩 쓰고 돌아다니는 그게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따라 하기, 그게 진리가 아니에요.

뻥~! 하고 나중에 주사기 바늘로 뚫어줘 버리면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아니면 그 외부에서는 죽지 않는다.”는 그 진리, 다시 말해서 십자가지요, 선지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주님의 위에서 온 주사기가 그대로 뚫고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십자가라는 빈 구멍을 만듭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우리 안에 구멍을 딱 뚫어버리면 “거 봐. 네 목숨 내가 다룬다 했지? 살아도 내 거고 죽어도 내 목숨이지 네 목숨 없지? 그지? 나는 네 목숨가지고 생명이라는 것, 하나님의 창세 전의 사랑이라는 것, 영생이라는 것을 네 죄악 된 무의미한 인생을 통해서도 이렇게 추출, 뽑아냈잖아. 이 생명을!” 나는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십자가의 언약완성을, 오늘도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 속에서 쪽쪽 뽑아내는 일에 주께서는 지금도 쉬지를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인 것은 모르고 얼추 따라해야 사람 대우 받는 그러한 안일한 삶에 몰입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성경을 보게 해주시고, 왜 사람들은 이 성경을 거짓말로 여겼는지, 아니 우리 자신이 왜 성경을 거짓말로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마귀가 집어 넣어준 비곗덩어리인 것을 이제는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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