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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06:51:25 조회 : 33         
광주강의20221125b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광주강의20221125b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이 근호 목사

시간은 시작할 때부터 최종 목적을 가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주입된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실린 하나님의 시간인데...... 마태복음 26장 29절, 이건 한번 보셔야 돼요. 상당히 중요한 건데요. 시간이 시작했으면 어디서 멈추느냐에 관한 거예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까지, 여기 ‘까지’라 하는 것은 시작과 마감 그 전체를 보여주는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들어가느냐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말은 포도주가 주님의 시간이 실린 계시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의 시간은 포도주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마지막 포도주 먹는 그때까지 주의 일은 계속 될 것이고 마지막 포도주를 먹는 그 순간 모든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그럼 그 포도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자기 피죠.

그처럼 시간은 이미 딱 정해져있어요. 70이레, 70년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자기 계시완성의 순간을 포도주 먹는 그 때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 예수님께서 포도주 먹는다고 이야기했어요, 아니면 내 살과 내 피를 먹는다고 했습니까? 내 살과 내 피죠.

이런 포도주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포도주 못 먹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먹을 수 있죠. 그러니 인간들이 사용하는 무슨 먹는 날까지 언급하면서 결국은 인간들의 시간관은...... 어떤 차이, 변화와 변화의 차이, 이것을 인간들은 사건으로 보는데 사건과 사건의 이 차이 있잖아요, 때와 때의 간격, 이것을 시간이라 하는 거예요, 시간. 인간들은 사건A를 그들이 읽어버리고 사건B를 읽어버리면 여기서 시간이라는 것을 측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사건A와 사건B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간이 없어지죠. 이게 양자물리학세계에요. 양자물리학세계에서는 입자 얽힘이에요. 입자가 얽혀버리면 동시에 두 군데 같이 생겨버리죠. 그러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시간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관측하기 전과 내가 관측한 후 이 사이를 시간으로 보는 거예요.

관측 전과 관측 후의 그 사이. 관측하기 전에는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어요. 양자역학세계에서는 그래요. 그래서 사물, 어떤 물체를 관측한다는 것은 물체가 있고 우리가 관측하는 게 아니고 ‘관측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그 물체는 거기에 나타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양자물리학에서.

그렇게 돼버리면 인간의 시간이 다가 아니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그들 양자역학에서는 ‘우주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관측하는 순간 시간은 흐른다.’ 이렇게 결론지은 거예요. 이 우주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지만 관측하는 순간 시간은 흐른다. 왜냐하면 입자가 하나면 변화됐는지 안 변화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두 개가 있어야 변화라는 게 생기지, 혼자 있다면 움직임조차도 없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관측자가 움직인다는, 관측자를 하나 또 잡아서 인간으로 설정해줘야 우리가 관측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과학이란 관측함에 따라서 시간도 생기고 공간도 생기니까 관측하는 우리가 있다, 라는 말도 하지만 이걸 좌표계라 하는 거예요, 좌표계. x,y,z 좌표계에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좌표계로 잡아내는 거예요.

이렇게 물리학에서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못 벗어나는가?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용성, 실용성,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의식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시간에서 못 벗어나면 인간은 공간에서 못 벗어나요. 시간과 공간에서 못 벗어난다면 인간에게 안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벗어나질 못하니까. 그러니까 시간과 영원히 계속 가야 되죠.

<사피엔스>라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쓴 책이 있어요. 또 한권 더 지었는데 그런 책들을 보게 되면 인류는 영원히 열린 앞으로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런 논리밖에 안돼요. 그리고 인간이 어디서 생겼는가? 그것은 시간이 허락해야 안다는 거예요. 시간이 허락되게 되면 고고학에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우리는 크로마뇽인에서 어떻게 생기고 네안데르탈인에서 어떻게 되는지 그걸 좀 더 알아본다는 거예요.

이 말은 곧 인간이 인간에게서 벗어나질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인간은 죄 때문에 시간에 갇혀있는 거예요. 죄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후달리고 있는 겁니다. 얽매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까지’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냥 갈 때까지 가보지 뭐, 이런 식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96살에 죽으면 내가 누군지 뭐가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죽는 거예요. 진리도 모르고 해답도 모르고 그냥 허망하게 살다가 허망하게 그냥 죽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과학이고 뭐고 생물학 백날 동원해도 인간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이 인문학 강좌 한다고 주장하는 것 보면요. 가관이에요, 가관. 아무것도 모르면서. 김 용옥, 유 시민 그들 아무것도 몰라요.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1961년에 예일 대학에서 밀그램(Stanley Milgram)이라는 교수가 실험을 했는데요. 실험을 이렇게 했어요. 신문광고내서 심리 실험하는데 돈 줄 테니까 오라. 실험할 때 여러분들이 신청하면서 두 종류 중 하나, 학생이 되고 싶은 사람, 교수가 되고 싶은 사람 혹은 교수 조수가 되고 싶은 사람 정해놓고 할 때 학생들 대부분이 교수나 교수 조수가 되고 싶어해요. 실험하는데 학생부분하고 교수와 교수 조수부분하고 나누어서 한다고요.

그러면 이 밀그램 실험자체가 피험자를 속이는 거니까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하나는 교수 역할, 하나는 교수 조수 역할을 해요. 그리고 학생 역할이 있다고 쳐놓고 둘이 해가지고 학생이 단어 시험 치면서 단어가 틀릴 때마다 전압의 강도를 높이는 거예요. 처음에 하나 틀리면 처음에는 약한 전류가 흐르게 해서 15V에서 점점 높여 120V로 한단 말이죠. 그렇게 할 때 교수가 말하는 거예요. “내가 다 책임질테니까 더 올려. 올려.” 그럼 둘다 실험하는 사람이지만 조수는 교수역할 하는 사람을 보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언제 죽느냐 하면 450V 넘어가면 죽어요. 그러니까 처음 단어 틀릴 때 약한 전기충격에는 아무 소리 없어요, 약하니까. 그런데 180, 200 넘어가니까 칸막이해놓은 너머로 학생들이 “짜릿짜릿해요.” 이런 소리가 들려요. 그러니까 조수가 자꾸 눈치 보는 거예요. 그러면 교수 역할 하는 실험자는 “더 해. 더 해. 내가 책임질테니까 더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수 역할도 진짜 교수 밀그램 눈치보고. “더 해. 더 해.” 시키는 대로 더 하는 거죠. 나중에 400 넘어가면 학생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하다가 600 넘어가니까 조용했어요. “아, 죽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 “괜찮아. 내가 지시했으니까 내가 책임져.” 나중에 보니까 학생은 없고 녹음기 틀어놓은 거였어요.

그것은 뭘 의미하는가? 인간은 사람이 죽든 말든 책임자가 따로 있으면 자기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걸 실험한 거예요, 어떤 짓도 (밀그램의 복종실험). 이 실험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라고 독일의 중령인데 육백만 유대인을 죽인 수용소로 이송하는 책임을 진 최고 실무자에요. 그 사람이 전쟁 끝나고 아르헨티나로 도망가다가 이스라엘 정보부에 걸려서 잡혀왔는데 이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여자 철학가가 취재하면서 논문을 쓴 게 있어요.

그 논문에서 주장한 것이 유명한 말인데 이거에요. ‘악의 평범성’. 악한 사람은 인상이 사나운 게 아니고 아주 평범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히만에게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육백만이 죽는 걸 알면서도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물었을 때, 나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자기는 루터교 신자로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양심껏 살았고 네 이웃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이웃들이 증명해 줄 거라는 거예요. 진짜 이웃들이 증명해주고 부모한테 효도하고 이웃들에게 친절하고 해요. 그러나 자기 임무가 공무원이잖아요. 시키는 대로 하라 하면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무엇을 정리했느냐 하면 ‘악이란 시스템(system)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걸로 규정한 거예요. 악이라는 것은 현재 자기를 둘러싼 환경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왜 그 시스템이 나쁘다, 옳다를 왜 그렇게 구분 못하느냐? 이게 분업화, 세밀한 분업화의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일을 서로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업무가 쪼개져서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그 업무에 충실한 사람은 다른 업무와의 연관성을 다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내가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해서 일하는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알 수가 없죠.

김 정은 사무실에 계단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만약 미국 폭격기가 김 정은 사무실을 폭격한다면 그 아주머니는 왜 죽은 거죠? 그 아주머니가 미국 폭격기의 폭격에 대해서 뭐 압니까? 그냥 계단 청소했을 뿐이죠, 계단 청소.

한번 적어볼게요. ‘과도한 분업체제가 책임 소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즉 조직이 커질수록 양심이나 자책, 심의가 작동하기 어렵다.’ 이게 오늘날 현대 조직사회입니다. 왜 인간 개개인은 착하기를 원하고 선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고 내가 나쁜 죄인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으면서 왜 사회에 나가면 갑자기 개인의 선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없는가? 왜 없는 거예요?

첫째 강의와 연관해서 보면 과도한 분업체제로 인해 효율성, 조직의 효율성, 능률성이 증가하잖아요. 조직이 더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조직이 커진다, 이건 뭐냐 하면 힘을 더욱 비축할 수 있다 이 말이잖아요. 결국 여기 나온 단어가 뭡니까? 힘이죠. 인간의 모든 시간과 공간 개념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힘을 키우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건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마귀가 예수님보고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세상 권력, 권위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왜 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만큼 이 악마의 세계가 자체적으로 자기들이 살 수 있는 그것을 키워낸 거예요. 자체적으로 생산해낸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옳다 그르다 반대할 수 있어요, 없어요? 반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러니까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을 때는 (악마가) 하나의 뱀이었잖아요. 하나의 뱀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뱀이 인간보다 더 커진 거예요. 에베소서 6장 12절.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이건 안 봐도 여러분들이 익히 다 아는 거예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개개인을 원수 세워서 하는 게 아니고 개개인을 포함한 전체, 한 덩어리 전체에 대한 싸움이에요. 이 세상 권세를 다 보이는 권세 싸움이에요. 이 권세에 대해서 욥기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욥기 41장에 ‘리워야단’이라는 게 나오거든요. 이 번역에는 악어로 되어 있지만 리워야단.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욥 41:1) 악어로 되어 있지만 리워야단입니다. 그냥 괴물이에요.

이걸 악어로 하게 되면 왜 곤란한가 하면 욥기 41장 33절과 34절에 보면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이것은 바다괴물이거든요.

다니엘 7장에 보면 짐승이 나오죠. 그게 리워야단이에요. 다니엘 7장에 바다에서 짐승이 나와요 (단 7:3). 그런데 짐승이 나온다는 말은, 지금 이 계시를 본 게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단 7:1)에 이걸 봤단 말이죠.

다니엘에게 70이레 계시를 줄 때 그때 다니엘이 어느 나라에 속했습니까? 바벨론에 속했죠. 그러면 아까 예레미야 25장 11절, 12절에 나온 말씀처럼 네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긴다고 되어있죠.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다가 칠십년이 끝나면 “이스라엘을 포로 잡아온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 구절이 어디서 모이느냐 하면, 이 한 가지를 하면 성경 전체가 다 풀리는데요. 어디서 이 매듭이 다 풀리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어요. 수요일에 했지만 언약이 들어있어요. 언약이 들어있는데 이 언약이 들어있는 이스라엘을 누가 포로 잡았느냐 하면 바벨론이 포로 잡았거든요. 바벨론이 포로 잡아왔잖아요. 잡아왔을 때 바벨론이 어쩔 수 없이 무얼 건드렸느냐?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접수했는데 그들은 접수하는 가운데서 뭘 건드렸습니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렸죠.

언약은 시간 따라 안식에 이르게 되어있고 안식에 이르게 되어있는 이것은 시한폭탄이에요, 째깍째깍 70년, 시한폭탄을 바벨론 제국이 건드린 것은 마치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리면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황폐했잖아요. 이번에는 누구 차례냐?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언약을 건드리면 바벨론 나라가 완전히 황폐해지는 거예요.

황폐해지면서 언약의 주인공은 안식을 내다본 신약의 예수님이 되겠고 언약을 건드린 자는, 예수님이 영적인 존재 아닙니까, 하나님이죠, 영적인 존재를 건드렸다는 말은 이 바벨론이 영적인 존재로 전환되어야 돼요. 그러면 바벨론이 짐승이 되면서 이 짐승은 영적인 존재에요.

아담과 하와가 뱀이라고 생각했지만 뱀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악마가 들어있죠. 영적 존재였죠. 바벨론이 짐승이라 했지만 사실은 짐승이라는 영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 짐승에 악마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계시의 진행과정에서 시간이 마감이 될 때,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감이 된다는 말은 드디어 악마의 체포 날이 가까이 오게 되면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거예요. 안식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천년이 차기까지” 요한계시록 20장 5절. 천년이 차기까지. 그다음에 뭘 한다는 게 아니라 그 ‘까지’라는 것은 시간 자체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목표에 도달해서 끝났다는 뜻이에요. 드디어 도달점에 이르러 밝힐 걸 다 밝혔다, 완성될 걸 다 완성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짐승에 속한 적그리스도 이것들을 요한계시록 20장에 유황불에 집어넣게 되면 시간은 끝난 거죠 (계 20:10, 14). 그렇다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짜놓은 하나의 속임수였습니다. “만만하냐?” 이렇게 나오죠. 이스라엘을 만만하게 보고 침투했는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건드린 게 돼요.

그러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성도죠. 성도 안에는 뭐가 있어야 성도죠? 그냥 교회 다닌다고 성도 아니죠. 하나님의 살아있는 계시가 있어야 되겠죠. 이 계시가 십자가 이후이기 때문에 이미 성도 자체가 종말적 존재라 해요. 종말적 존재.

이런 게 어려운데요. 종말론적 존재가 아니고 종말적 존재에요. 종말론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종말이 뭐냐 따져보니까 그런 존재다, 이건 인간이 따지는 것이고 인간이 관측하고 탐색하는 거고 인간이 탐색할 것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냥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것이 성령 공동체거든요.

마지막이라는 말은 성령이 오면 마지막이에요. 이것은 요엘서의 예언대로 마지막이 아니면 성령이 안 옵니다. (욜 2:28-32)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죠. 마지막이기 때문에 온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달라, 가 아니라 마귀하고 다르죠. 왜? 마지막 때는 이 영적 존재가 모든 것을, 자기 정체를 더는 감출 수 없는 시대에 오기 때문에.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당부하기를 좀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이 말이죠. 이 재명을 왜 상대하고 윤 석열을 왜 상대합니까? 상대 안하죠? 뭐 우루과이한테 비기든 이기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우리의 싸움은 가나나 포르투갈 아닙니다. 우리의 상대는 악마죠.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제가 월드컵 안 봐요. 안 보는 이유가, 이겼냐 졌냐를 대번 알 수 있는 게 자고 있는데 주변에서 와~ 하면 한 골 넣은 거고 조용하면 안 넣은 거예요. 특히 축구 같은 경우에는 45분+쉬는 시간 15분+45분+7분, 추가경기 들어가면 12분까지 하잖아요. 이 시간 동안에 만약에 한 골 넣으면 ‘~까지’를 얼마나 학수고대하겠습니까. 어서 휘슬불고 경기 끝나기를. 그래서 16강 들어가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겠어요. 어제는 슬펐지만 오늘은 손 흥민 때문에 내일은 기뻐할 거야.

이게 바로 우리가 아직도 내가 관측할 수 있는 내 행복을 내가 소지하길 바라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디서 쫓겨났습니까? 하나님이 안식해야 될 그 땅에서 추방되었잖아요. 그럼 이거 고치고 들어가야지. 고칠 수 있습니까? 무슨 수로 고쳐요? 못 고치죠. 고칠 수가 없어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중요하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무엇이 악이다?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악이다. 그게 죄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죄인 아닌 자는 없다. 죄인 아닌 자를 없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성전 돌아와서 성전 지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스라, 느헤미야 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포로 잡혀가서 70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B.C. 586년에 포로 잡혀가서 B.C. 516년에 돌아와서는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 약속대로 왔다고 좋아하면서 뭘 지었습니까? 학개, 스가랴에 보면 성전 지었죠. 성전 지었잖아요. 그게 성전입니까? 그게 성전 아니죠. 부서져야 될 성전이죠. 무너져야 될 성전이죠.

그 성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언급한 게 있습니다. 그게 스가랴에 나오는데 스가랴 7장 5절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그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율법대로 금식하면서 지켰는데... 실컷 금식했거든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그 금식이 진정 나를 위함이냐, 아니면 너희를 위함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려면 사전에 70년 되기 전에 먼저 언급을 해서 금식하더라도 주의하라든지 언질이 있어야지. 언질도 없었어요. 70년 지나고 나니까 70년 동안 너희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의가 준비된 줄, 네가 된 줄 알아? 아니야! 너희는 다시 돌아올 자격 없어. 70년 지나고 이제 와서 왜 딴 소리를 하시냐. 이제 와서...... 진작 말했으면 우리가 금식도 안했죠. 이왕 못 돌아갈 거 개판으로 살자, 이랬을 텐데 실컷 마음 졸여가면서 율법 지켰는데, 아니래.

심지어 이런 이야기해요. 네가 할례를 행했지만 그게 마음의 할례 행한 거냐?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합니까? 마음 잘라야 되는데 어떻게 마음 잘라요? 자를 수가 없는데. 마음 자르려면 골로새서 2장에 나온 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되지. 그게 마음의 할례, 세례거든요. (골 2:11-12)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된다, 안 된다? 인간은 못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시간은 뭐냐? 그 시간을 줌으로써 하나님이 70년이라는 것 또는 70이레를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죄인 아닌 인간은 단 한명도 남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획이었습니다. 단 한명도 죄인 아닌 인간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악마한테 사기당하지 않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교회 가면 교회한테 사기당한 거고 교회 안 나가면 본인한테 마귀한테 사기당한 거고. 이래도 사기당하고 저래도 사기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걸 크게 적어보겠습니다. 이 말은 아주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어떤 분이 이야기해서 제가 적는 겁니다.【이리로 가도 지옥이요 저리로 가도 지옥이요.】이거잖아요, 이거. 이게 종말된 현상입니다. 이리로 가도 지옥이고 저리로 가도 지옥이죠. 이건 공간개념이죠.【어제도 지옥이고 오늘도 당신 땜에 내일도 지옥이고.】한국에 있어도 지옥, 캐나다 가도 지옥이고. 도무지 안식의 때가 없고 피할 곳도 없어요.

성도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렇게 대처합니다. ㅎㅎ하든지 ㅋㅋ하고 있어요. 왜? 위에서 보니까. 골로새서 3장에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합니까?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되어 있죠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3). 제가 바꾸겠습니다. 여기 없다. 우리의 생명은 여기에 없어요. 이곳에 없는 거예요. 이곳하고 안 놀아.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이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이런 책을 지었어요. 책 제목이 뭐냐 하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요. 책 제목이 의미가 있어요. 자유에서의 도피, 이런 뜻으로 보면 돼요. 이 책 제목이 그 당시 충격적인 이유가 모든 인간은 자유를 원하잖아요, 자유를. 자유를 원하는데 이 사람이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어요. 인간이 자유로우면 자기의 책임 때문에 자기가 감당을 못한다는 거예요.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유롭지 않고 인간은 자유를 줘도 자유를 감당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까 나왔죠. 시스템에 맡긴다고요. 인간들 스스로 본인이 본인들에게 추천하는 제도는 뭐냐? 맹종할 수 있는 전체주의. 전체주의로 간다는 거예요. 국민들은 패야 돼요. 이 말입니다. 여자하고 명태는 사흘마다 패야 된다는 옛날 말이 있잖아요. 요새는 남자들이 맞지만.

왜냐하면 책임을 져야 되고 또 책임보다 더 무서운 경우가 뭐냐, 자유를 줘버리면? 사람이 고독해요. 고독과 책임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누구한테 빌붙어 사는 게 편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은 왜 영웅을 원하느냐? 왜 영웅을 원하는가? 인간의 본성이 그래요, 그거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악마가 준 천성이 그거에요. 인간의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악마가 예수님한테 그대로 그것 가지고 테스트한 거예요. 나한테 빌붙으면 다시 말해서 절하면 이 모든 세상 영광을 같이 누리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사회에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노력→결과→평가→보상, 이 논리만 인간은 기억해요. 본인이 본인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아니고 여기 뭐가 들어갑니까? 평가가 들어가죠. 평가는 인정받는 거예요, 인정받는 것. 인간은 사는 이유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사는 겁니다. 평가받기 위해서.

그럼 그 타인을 존경합니까? 존경하지 않아요. 누구를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노력하고 노력한 결과가 있죠. 자, 노력과 결과, 오늘 공부했습니다, 여기 뭐가 들어가죠? 시간 들어가죠. 어제는 나 혼자 있다. 고독이죠. 고독을 아까 자유라 했죠. 나는 자유롭게 살기 싫어요. 너무 고독하고 외로워 못 살아요. 어제는 나 혼자 있었지만 오늘은 누구 땜에, 누구 때문에 아니에요, 누구 땜에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왜? 내일이라는 시간을 개입해서 내가 누구로부터 인정받으면 그럼 나는 사랑받는다는 보상이 누구한테 옵니까? 나한테 오기 때문에. 이것 말고 인간이 이해될 수 있는 거 있으면 나와보라 그러세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이 순서가 완전히 평생토록 박혀있습니다. 평생토록.

한 가지 예를 들면 바둑선수 강 동윤 9단이 바둑을 둔다. 왜 둡니까? 인정받기 위해서. 농심배에서 일본 선수하고 바둑을 오늘 뒀거든요. 불계승했어요. 이겼다. 그럼 돈이 천만 원, 자칫하면 천만 원 더 붙어요. 돈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돈 법니까? 타인이 나한테 결과에 대해서 평가해주죠. 돈도 돈이지만 야, 너 바둑 잘 둔다고 평가해줄 때 그게 내가 원했던 결핍, 내 모자람, 내 욕구에 결핍된 것을 보상으로 마저 채울 수 있는 것, 이 논리로 인간세계 전부가 한 방으로 다 설명이 됩니다.

설명이 된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왜 타인을 원하는가? 인정받기 위해서. 왜 왕을 원합니까? 왕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지리산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아도 이 승윤 가서 사진 찍고 나면 또 기분 좋아요.

자, 사람들은 이것(노력→결과→평가→보상)을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니까 인간은 이걸 예측하려 합니다. 예상하고 예측해요. 어린애들도 어른들이 교육할 때 이 논리대로 네가 인정받으면 보상받고 보상받으면 너는 행복할거야. 지금은 그렇지만 네가 언젠가는 행복할거야. 우리 가정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간 우리도 부자 될 수 있을 거야. 금수저가지고 부자하고 식사하면 부자 된다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조를 또 달리 이야기하죠. 희망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놓쳐버리면 그 자체로 불행이지만 희망이 있다면 어려워도, 우리는 역경과 시련이 있더라도 희망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행복해서 뭐하는데, 그래?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인간이 예측하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까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사이에 뭐가 있다 했어요? 빈 자리. 빈 자리 있다 했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대해서 완전히 달리 이야기하십니다.【미래는 예측이 아니고 미래는 창조된다.】없는 데서 창조되는 거죠, 미래는. 날마다 만들어지죠, 날마다. 주님이 주인공 돼서 날마다 만들어져요.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 거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남들이 평가하면 그들이 인정해줄 거고 그럼 나에 대해서 보상이 온다, 지금 이 부분에서 인간이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어떤 것을 고려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고려 못하죠. 미래는 창조되는 거니까.

그럼 창조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보면 없는 데서 있죠. 그럼 창조되기 위해서는 여기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죽음’이 들어가야 되겠죠. 죽음이. 실컷 노력하고 평가받고 인정받아가지고 어떤 큰 상 받고 KAL기 타고 오는데 소련이 미사일 쏴서 비행기가 폭발한다든지 중동에서 돈 많이 벌어오는데 바그다드발 KAL858기가 일본 공작원으로 위장한 마 유미에 의해서 버마 상공에서 폭파돼서 없어질 때 무슨 요소입니까? 죽죠.

성경 로마서 6장에 보면 죽음은 왜 오느냐 하면 죄의 값이었잖아요, 죄의 값. (롬 6:23) 그러니까 죽음으로써 어떤 인간도 안 죽을 만큼의 의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를 주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이 증명한 거죠. 하나님이 증명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살아계시고 어떤 인간도 애초부터 산 인간은 없었다, 가 되죠. 계시에 의하면. 그 계시를 이스라엘이 그리고 다니엘이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 다니엘이 70년 포로기간의 의미를 깨달았다, 70이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계시입니까. 대단한 계시의 여부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인간 말고 뒤에 나와. 그 뒤에 나와. 앞에 잔챙이들 보내지 말고 대장 나와. 대장이 누구에요? 악마잖아요.

그 악마를 체포할 때까지 주의 일은 계속되는 겁니다. 이미 체포했죠. 이미 체포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내 살과 내 피를 마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모든 시간을 끝냈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에요.

1000년=하루, 이게 돼요? 1000달러=1원, 이게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천년이 하루 같다. 인간이 관측하고 인간이 관찰하는 모든 시간 개념, 인간이 관측하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변화와 그 변화 사이, 해가 떴다 해가 졌다 그런 하루,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 인간이 가능한 것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이제는 주님께서 그걸 무의미로 처리해버렸어요.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 이제 중요한 것 하나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크게 쓰겠어요. 이런 것들 여러분들이 다 아셨다 치고.【시간은 예수님의 몸이다】이렇게 축약할 수가 있어요. 시간은 예수님의 몸이에요. 시간 속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활동이 나옵니다, 활동. 이 활동이 안식이에요. 안식이 나와요.

시간에 두 종류가 있다 했죠. 하나는 계시가 실린 시간, 예수님이 실린 시간, 주님의 시간을 성경에서는 ‘때’, 내 때가 아직 남았다, 할 때 때로 이야기해요. 인간의 시간은 악마의 시간이죠. 인간에게 뭘 부여한다 했어요? F=ma,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 시간을 좀 달라. 시간 지나면 힘을 더 끌어 모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어디서 어디를 공격할까요? 주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폭격하죠. 공격하죠. 뭐로 공격하느냐? 성령으로 공격합니다. 공격하는 순간 인간의 시간이 아니고 육의 시간, 폭격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봐요. 죽은 자의 특징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러면 그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주의 복음이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묵시적 시간에 드디어 합류가 돼요. 거기에 들어가면서 예수님의 세계에 완성된 것, 다 이루었음을 증거하는 그러한 육신으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사용된다면 그러면 성경을 어제는 두 장밖에 못 읽어서 울었지만 오늘은 예수님 땜에 내일은 다섯 장 읽으면 더 나아지는가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더 나아졌다는 개념은 없어요. 왜냐하면 어제도 죽었지만 오늘도 죽이고 내일도 항상 나를 죽이는 그 자체가 너는 죽은 자고 네 안에 내가 살아있다, 주님이 살아있다, 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성령이 역사를 하게 되면 그동안 주님의 일을 가렸던 내 일이 주님의 일을 가렸었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증거하게 돼요. 그러니까 나의 치료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게 중요하죠.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내가 이런 인간인데 치료가 되었어요, 하는데 치료되려면 병원에 가세요. 치료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가, 훌륭하게 되었는가, 천국 가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하라고 주께서 성령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증거.

이미 우리는 천국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벌써. 아까 어디를 가든지 지옥이죠. 성도 같으면 어딜 가도 지옥인 것을, 그다음에 ㅋㅋ, ㅎㅎ, 히히히. 어느 때도 지옥 아닌 순간이 없다 ㅋㅋ. 신난다. 성령의 신바람. 그걸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적인 목적, 개인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 나의 행복, 필요한 힘, 정보, 지식, 그걸 얻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오히려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사실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마지막 때에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용도로 저희들을 일방적으로 채택해 주셨사오니 다니엘을 통해서 더욱더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21125b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이 근호 목사.hwp (64.5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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