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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13:09:25 조회 : 55         
내가 없는 세상살이 이름 : 송민선(IP:1.250.70.2)
시아버지가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실 때, 그분은 마음의 준비도 할 겨를 없이 순식간에 반강제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다. 그분이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 가장 애타게 그리워하고 찾은 것은 80세 넘어서까지 옆에서 평생을 성격 맞춰주고, 입맛 맞춰주며 수발하신 시어머님도 자식들도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늘 자기 자신만 돌보는 분이었지만 유일하게 자기 시간과 노력을 들여 친히 돌봐준 개, 그 개를 잃어버렸다고 마음 졸이며 찾았다고 한다.

개가 안전하게 집에 잘 있다고 하자 그제야 안심하셨다. 아버님은 실상은 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 있던 공간에서 배제된 것이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신을 차린 순간마다 자신의 공로가 들어간 것만 기억하셨다.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은 가족을 향한 미안함은 없었고, 집에 있을 때 가끔 내뱉은 미안하다는 말도 결국 자신을 위한 허울뿐인 생색이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나의 공로가 여전히 기억나는 그곳이 지옥이다.

어떤 분이 펜을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았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올라오는 생각은 ‘그 펜은 좋겠다. 저렇게 자신을 절절하게 찾아주는 주인이 있어서’였다. 어딘가에 나를 잃어버렸다고 찾아주는 주인이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올라오며 순간 그 ‘펜’이 부러워졌다. 아니, 펜보다 못한 내가 너무 초라해서 그걸 감추려고 애써 다른 거짓 감정을 덮어댔다.

천국이 이와 같다는 예수님에게는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냐 물건이냐의 가치를 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로가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잃어버린 주인이 있는지 그리고 그 주인이 찾고 계시는지가 중요하고 사람이라 할지언정 찾는 주인이 없어서 여전히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면 주인이 있는 십 원짜리 동전보다 못하다.

펜은 자기가 잃어버린 물건이라는 생각조차 할 필요 없이 숨겨진 그 자리에 있기만 하면 되고 뜻을 다해 찾는 분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서 기쁨이 충만해 짐도 오직 주인의 일이고 주인의 누리실 환희이다. 펜은 그저 그분의 손에 들린 채 기뻐하심을 덧입으면 그것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이다.

사람들은 양 일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주인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간 것은 온전히 100마리의 숫자를 만들어 주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잃어버렸다가 찾는 기쁨을 주지 못한 99마리를 버려두셨고 회개한 한 마리 양을 위해 잔치를 베푸셨다. (눅 15:6)

굳이 누가복음 15장 7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는 말씀을 거론하며 의인 아흔아홉도 기뻐하시는데 잃어버린 양을 좀 더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 의인이 되고자 하는 심보를 버리지 못함을 들킨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자신이 새롭게 세우시는 집에 있어야 할 잃어버린 양만 찾으러 오셨다.(마 15:24) 주님이 피로 세우신 새로운 공간은 반드시 주님의 피의 공로로만 기억된 자들이 옮겨질 수 있기에 ‘나’를 기억하는 자는 결단코 넘볼 수 없는 곳이다. 이제 내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깜깜한 밤에 한 노부인이 배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하고 찬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할머니의 쭈글쭈글하게 후패한 손에 놓여있다. 그녀는 그것을 정확히 바로 그 지점, 그녀의 시간이 멈췄던 바로 그 자리, 다시는 자신을 생각하며 살지 않게 된 그 순간 속으로 주저 없이 목걸이를 던진다.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사랑의 주인을 향해 기쁘고 평온한 마음으로 되돌려준다.

자기를 사랑하는 거 외에 다른 사랑을 알지 못했던 한 여자가 배 위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일방적 사랑을 받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온전히 그 남자만 보였고, 뭘 하든 하지 않든지 그로 인해 기뻤고, 그로 인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배가 침몰하면서 그 남자는 죽었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다시 배 위에 서 있는 그녀는 아마 그간에 시집도 가고 가정도 꾸리고 먹고 마시고 모든 것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배 위에서 바다를 향해 가장 소중한 것을 던져버릴 때, 그녀의 수십 년의 세월이 단지 한순간, 한 지점에서 이미, 벌써 멈춰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배가 침몰하고 남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시선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이미 그때 그녀의 마음도 그와 함께 죽으면서 둘은 죽음에서 만들어진 한 몸이 되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살아남아 움직였던 여인의 몸은 무엇을 해도 그 남자로 인해 완성되고 종결된 사랑의 증거를 나타내는 활동이었다. 할머니는 보석을 그에게 돌려주며 말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과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이기에 당신이 나 이기에 나는 당신의 꿈을 표현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이런 영화 한 편 잘 보고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고 입 밖에라도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철이 들어서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세상 물정을 저렇게 모르니 너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라는 주변에서 날아오는 조롱의 돌덩이를 맞을까 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행여 그런 바보같은 삶을 살까 봐 두려워서 나 스스로를 침묵하게 하려는 강력한 부추김에 동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하지 않아도 말이 뱉어지고 원치 않아도 고통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부득불 놓인다면, 그건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 영화 속으로 끌려 들어가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감지하며 무엇을 하든지 감독자가 누구이신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강제조치에 말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그러나 유일한 진짜 현실이기에 아무도 믿지 않을 성경의 내용이다.

한 여자가 술집에서 남자를 상대로 돈을 벌며 ‘사람 사는 거 뭐 있나. 다 이렇게 입에 풀칠하고 사는 거지’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여자는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지니까 산다. 그러다가 우연히 영화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고 난데없이 자신의 삶에 침투한 영화 속 인물들과 접촉이 되어 자신도 영화 속으로 말려들어 가게 된다.

기생라합은 정탐꾼이 돌아간 뒤, 이제 곧 이곳은 망할 거니 술집 때려치우고 경건하게 멸망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게 하신 그 사랑을 마음에 품듯이, 이스라엘이 약속한 맹세를 굳게 붙들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냥 살아갔다. 단 하나,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이전에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죽음의 종으로 어떻게든 살고 싶은 간절함에 매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는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살 필요가 없는 이유를 이미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간 약속을 통해 확인하며 살았다.

‘여리고성이 왜 빨리 안 무너지나, 역시 망상같은 해프닝인가’ 조급해하며 버틴 것이 아니라 이미 그녀의 몸 안에 멸망의 징조를 품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이상 자신에게 신경 쓸 필요 없이, 미련하고 멍청하게 자신의 생각 따위는 없는 것처럼 붉은 줄 하나 바라보며 씩씩하게 그냥 움직였다.

멸망이 예정된 땅에서 태어나서 산다는 자체가 내가 무엇을 해도 세상과 짝하며 방탕할 수밖에 없고 어떤 일을 해도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더욱더 알아가면서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계속했다. 망할 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서 망하는 모습 나오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제 놀랄 일이 아니었고 도리어 이런 자신에게 약속이 찾아온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매 순간 확인할 뿐이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기생라합이 이스라엘과 재회할 때, 창녀로서의 그녀의 삶을 담은 육체는 성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의 응함과 결합하여 함께 무너지고, 내가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순결한 처녀처럼 약속이 창조해 낸 부분 체로 언약의 노선에 합류된다.

이 두 여인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고 품고 있기에 자신들은 이미 없는 존재로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천국의 증상은 이런 식으로 수시로 나타났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에게 긍휼을 호소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하시지 않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지시만 하셨다.

가는 도중에 병자들 모두 깨끗함을 받았을 때 아홉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받을 제사장에게 갔고 한 명의 문둥병자만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고 영광을 받으실 분을 향해 방향을 돌린다.(눅17:11~19) 그 하나만 열 명 중에 대열에서 이탈한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 세상은 그를 다시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그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고 없다고 말한다. 잃어버렸다는 말씀은 오직 다시 찾으실 뜻이 있는 그것의 참주인에게만 속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살아있는 것이기에 세상은 온통 육이고 영은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육이면 육답게 합리적 사고가 나와야 하는데 혹시 성령을 입은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서로 통하는 것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보이지 않는 자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믿어진다, 안 믿어진다’라는 자체적 납득과 선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신 누구든지 믿을 만한 증거가 그어 놓은 ‘이제는’이라는 선명한 경계선 앞에 설 뿐이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알지 못했으니 허물치 말라는 변명을 입밖에도 낼 수 없게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명하사 회개하라 하신 말씀은 모두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보내셨기에 진리의 사랑을 입혀주시는 예수님의 선택만 돋보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이다. (행17:30~31)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서 말하지 않았다면 죄가 없겠지만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고 하심으로(요15:22)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귀를 상대하신 것이었고, 결국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천국과 지옥의 판단 근거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확고히 하셨다.

그렇기에 성령이 오시면 눈에 보이는 것이 주체가 아님을 알기에 보이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보이지 않는 분이 주체임을 믿기에 내가 나서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상대하고 계신 주인에게 몸을 내어드리는 것 외에 할 것이 없다. 내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 벌어지는 일에 참여 되고 있음을 알 뿐이며, 세상을 주관하는 권세와 악한 영의 압제에 눌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주의 공로를 훼방하는 말썽꾸러기인지 확인할 뿐이다.

우여곡절은 있어도 제법 통제가 되어 다시 안정을 찾곤 했던 나의 인생에 복음이 들어오면 집안부터 주변까지 들썩거리며 쑥대밭 되기 일보 직전에 놓인다. 더 이상 무엇을 해보려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홍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쓰나미처럼 복음의 사건이 인간의 수습 범위를 넘어서 버리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갈라지는 땅 양쪽에 발을 두고 갈팡질팡하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다고 착각할수록 마귀에게 어서 드시라고 자신을 밥으로 제공하는 것과 같고, 오기만 충천해져서 자살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복음이 스스로 작동할 때, 사람이 아니라 사람 속에 진짜 주인인 악마가 하나님의 전쟁에 대적하며 자기 사람들을 바둑돌처럼 움직여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그리고 친구들이 동요되어 나에게 선택을 부추긴다. (마10:36) 그 상황에서 당황하든 침착하든 잠잠하든 깨방정을 떨든 뭘 해도 된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결과만 주어지게 되어있고 문 안쪽으로 당겨지든지 그대로 가랑이가 찢어져 지옥으로 떨어지든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내가 한 것 또한 전혀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나에게만 집중되는 환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야 마땅한데 이런 자를 어찌 사랑하셔서 나를 보는 내 눈을 빼주시고 한 분만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박아주셨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이기에, 스스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며 주님의 십자가만 향한다. ‘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주님인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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