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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1 11:02:42 조회 : 56         
7강-하박국 2장 5-8절(본질과 모형)22113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210.95.17.220)
7강-하박국 2장 5-8절(본질과 모형)2211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2장 5-8절까지입니다.

하박국 2:5-8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찐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 진 자여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

이스라엘 선지자 하박국이 바벨론의 미래 형편에 대해서도 역시 미리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잘나가고 있는 입장에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욕심의 덩어리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어느 정도냐? 여기 5절에 보면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음부처럼 넓힌다는 말, 음부가 성경에서는 마귀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마귀가 들어가는 곳을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밑바닥이 없는 우물, 밑바닥이 없는 우물. 거기에 들어가면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추락하는 곳, 계속 빨려 들어가는 곳, 방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기 때문에 다시 거꾸로 처음 출발할 때로 되돌아올 줄 모르는 그러한 형편에 있는 것. 그래서 음부, 사망, 죽은 자들이 가는 곳, 더 발전하면 지옥, 지옥의 특징은 뭐냐? 만족함이 없는 곳이에요. 목마르고, 늘 결핍을 느끼고 만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바벨론이 어디에 빠져 들어갔는데 그 빠져 들어가는 곳이 마치 뭐와 같으냐? 사막 같은 데 보면 어떤 모래가 있는데 그 모래에 한번 잘못 빠져버리면 허우적대면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 안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가서 더 이상 원래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없게 돼요.

그처럼 이 바벨론 형편, ‘그들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지금 그들이 갈 바를 모르면서 계속해서 만족 또 만족을 추구하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 물자들, 사람들을 계속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게 그겁니다. 사망의 세계의 특징은 족한 줄을 모르는 거예요. 족한 줄을 모르는데 이러한 이 질병은 본인이 고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만국을 자기 쪽으로 계속 끌어 모으는데 이게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게 낭패지요. 이걸 두고 제어가 안 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계속 끌어 모으고 또 끌어 모으고 하는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이.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박국 선지자가, 왜 이 바벨론 남의 나라 미래에 대해서, 그들의 처참하고 암담한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을 하느냐? 바벨론은 이방나라기 때문에 망하는 것은 마땅한데 왜 이방나라가 아닌 이스라엘이 이들과 같이 망해야 되느냐?

거기에 대한 질문을 했고요, 그 응답으로서 바벨론이 망하면서 그 망하는 행위 중에서 아무거나 계속 끌어 모으는 거예요. 자기 쪽으로, 파멸의 구멍 쪽으로 계속 집어넣고 집어넣는데 그 집어넣는 것 중 하나가 건들지 말아야 될 이스라엘까지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알았어요. 이스라엘이 바벨론 안에 삼킴을 당해서 같이 멸망되어야 될 이유는,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데 언약이 들어 있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바벨론 속에 들어온다는 것, 그 당시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작용해서 온 나라를 전부 다 삼켰습니다. 그 당시 인류의 모든 세상, 현실세계의 대변자가 뭐냐? 바벨론이에요. 바벨론만한 제국은 없습니다. 소소한 나라 다 끌어 모았으니까요.

그 끌어 모으는 모래구멍처럼, 다 빠져 들어가는 모래구멍 속에 이스라엘도 거기에 들어감으로써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바벨론과 멸망하는 곳에 따라 들어감으로써 바벨론제국 자체가 본질을 본질대로 보여주는 모형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을 하박국 선지자는 알게 됩니다.

로마서 9장 11-13절에 보게 되면,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나와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서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논리가 안 되는 이유가, 야곱이나 에서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되어 있어요.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라는 단서, 아직 나지도 않았는데 현실 속에서는 결국 마지막에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야곱과 에서 양쪽에 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창세전의 말씀이 이들 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는데 지금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 안 받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야곱과 에서를 하나님께서는 모형으로 사용하셔서 그 모형 안에, 창세전에 이미 약속하신 예수님이 그들 속에 언약으로 들어가 계시는 거예요. 참여하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창세전에, 에요. 창세전에,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만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할 때 그 때 ‘우리’는 없어요. 왜? 안 만들었으니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태어나야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는데 그런 것도 없어요. ‘우리’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다만 거기 계신 분은 누구냐? 그리스도밖에 없었다 그 말이지요.

창세전의 그리스도께서 창세후에 인간세계 속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뭘 로? 모형이 아니고 본질로. 이 본질을 본질 되게 드러내는데 필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모형입니다. 그 모형으로, 초대받은 모형으로 삼았던 자가 누구냐? 한쪽은 야곱이고 한쪽은 에서가 돼요.

그들이 어떤 행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창세전에 확정되었듯이 그 본질이 모형 안에 들어갑니다. 야곱은 모형인줄 몰랐지요. 에서도 모형인줄 몰랐지요. 이미 태어나고 난 뒤에 ‘나는 나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나는 나다, 우기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계속 추궁하고 밀어붙이니까 야곱은 자기 안에 본질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발견해요. 이것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만들기 전부터 있었던 그 본질이 내 안에 본질로 들어오시는 순간 자기는 본질이 아니고 모형에 불과한 겁니다.

김장하고 난 뒤에 고무장갑 벗길 때 고무장갑을 급하게 벗겨버리면 고무장갑이 뒤집혀서 나오지요. 뒤집혀서요. 겉이 속으로 들어가고 속이 겉으로 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세계에 들어올 때 인간들은 자기가 본질인줄 알아요. 본질인줄!

자기는 누구의 모형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이 전체가 실재고, 현실이고, 사실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인간세계 이것이 전부고, 이것은 우리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장담에 장담을 하고 확신을 가졌던 겁니다. 인간들은 창세전의 이야기를 모르니까요. 창세후,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이후밖에 몰라요. 유구한 역사 이야기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세계 만들 때 그 인류전체가 모형이 되도록 주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계획을 했습니다. 그 전체가, 본인들이 모형인데 본인이 실재고, 실체고, 실제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들어와서 주께서 그들에게서 빠져나가요. 빠져나가면서 그들은 뒤집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누굴 어떻게 보여주기 위한, 그냥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모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성도는 알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가 실체기 때문에 인간들은 우기는 거예요. 인간들 모형의 대표자가 누구냐? 바벨론이에요. 왜? 바벨론이 인간세계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끌어 모았으니까요.

기업사냥이지요. 독과점, 독점이지요. 인간의 의미는 단독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미는 투쟁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투쟁.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제일 힘센 자가 다 먹으면 그걸로 의미는 최종 확정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누가 1등이야? 누가 우승했어? 브라질이야, 아르헨티나야? 누구야? 네덜란드야, 잉글랜드야? 누구야?” 카타르는 아니에요. 탈락했기 때문에.

최종 하나가 월드컵을 빛낸다고 보는 거예요. 투쟁하고, 투쟁하고, 마지막 하나 힘센 자가, 실력 있는 자가, 그리고 모든 자가 부러워하는 그 자가 다 갖는 거예요. 지금 그러한 모습을 누가 보여주는가? 바벨론제국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의 고정관점, 내가 최고다, 하는 고정관념을 위해서 계속해서 끌어 모으고 있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의 고정관념이라 하는 것은 시대마다 계속해서 거듭해서 변형되어서 발달합니다. 하박국 시대의 바벨론이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 모아서 자기가 1등으로 행사하고 있다. 1등은 그 시대의 유일한 시대정신의 대변자로 자처하지요. 이것은 모형이 아니지요. 실체가, 1등하는 나라가 있으니까 이게 모형일수가 없지요. ‘아이고 부러워라!’ 이렇게 되지요.

거기에 대해서 하박국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라는 질문부터 시작한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만들어가지고 그들 바벨론의 횡포에 형편없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벨론 제국의 미끼가 되고, 그들이 융성하고 세상의 유일한 실재로 확정되는데 그냥 쏘시개로, 소모품으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소모품 되려고, ‘세상에서 바벨론 제국 최고다’ 이스라엘이 그거 증거 하는 소모품 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까?”라는 의문점에 대해서 답변은 뭐냐? 뒤집기. 모형을 한껏 키우는 거예요.

사도행전 17장 31절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로 하여금 자기가 실재고 자기가 유일한 나라라고 우기면서 활동하도록 그냥 방치해둬요. 방치해 두다가 30절부터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그렇게 하다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게임 아직 안 끝났다는 거지요. 예, 반전이 있다는 겁니다. 1등이다, 최고다, 더 큰 인간, 힘센 나라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우리가 최고야, 우리가 실체중의 실체, 현실중의 현실이라고 우겼던 그들, 그런데 그걸 심판해 버려요. 심판을 어떻게 하느냐?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인간세계에서 이겼다, 하는 것은 당당하게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땅에서 죽었다는 말은 칼의 힘에, 활의 힘에, 그리고 권력의 힘, 정치의 힘에 의해서 너무나 약하고 저항 없이 그냥 사냥당해서 죽어버리고 쫓겨나고 그래도 끽 소리 못하고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 당하는 쪽을 패배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억누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를 승자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세상 승자와 패자는 힘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죽었으니까 패배라는 거지요. 이 인간세계에서는 모형이면서도 자기가 모형이 아니고 사실 그대로라고 우기는 나라에서는 그렇지요. 이 세상에서는.

그래서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세계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힘 가진 자가 진짜 승자인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 걸사람 없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세계를 인간이 인간의 원칙, 하나밖에 없는 원칙에 전부 다 복속 시켜서 거기에서 못 빠져 나가게 만들어놓고 그래놓고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버린 거예요.

다시 살려 버리니까 인간세계가 죽음이 최후의 무기였는데 이제는 그 무기마저 통하지 않는 분의 출현,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세계는 주님한테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뭐꼬? 뭐야? 왜 사람들의 현실세계의 원리원칙에 충분하게 예속되지 않고 거기서 튀어나와 버리는 거야? 뭐야?”라고 물을 때 주님은 “내가 본질이야.” 그러면 우리는 모형이지요. 껍데기지요. 마네킹에 불과한 거예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그분이 산자고 나머지기 모두 죽은 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뭐냐 하면, “주님이여! 끝까지 이기시옵소서.” 그거였어요. “끝까지 이기시옵소서. 저 안 이겨도 괜찮고 우리 교회 안 이겨도 좋은데 주님만은 끝까지 이기시옵소서.” 뭐 벌써 이겼지요. ‘주님 덕 봅시다.’ 이런 것은 없어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의미를 줄때에 단독적으로의미는 생기지 않습니다. 같이, 야곱과 에서가 같이 붙어 있는 거예요. 붙어 있어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상반되는 두 가지의 모형사이에서 인간의 손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주님의 주님 되심, 승리자 되심, 유일하게 의미 있음을, 단독적으로 의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두 가지 상반되는 모형을 사용하셔서 둘 다 같이 동반해서 붙어 있게 한 겁니다. 바벨론 있고 그 바벨론 속에 잠겨 있는 이스라엘 두 개를 같이 붙어 있게 하셨던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지금은 뭐 바벨론 시대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아까 제가 고정관념은 시대를 따라서 계속 변형된다 했지요. 끌어 모으고 끌어 모으고 계속 끌어 모으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는 이러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실재로 보는 그 원리, 오늘날 이걸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요, 어느 한계선이 없어요. 어느 정도까지 돈 벌면 스톱해라, 이런 게 없어요. 돈이 10억이 있든, 20억이 있든, 30억이 있든, 100억이 있든……, 전혀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지금 피부로 와 닿지를 않지요. 백억이 있든, 천억이 있든 인간은 이미 망해버렸어요. 제어가 안돼요.

불신자 바벨론 정신이 갖고 있던 게 이 세상 자본주의 정신인데 이 자본주의가 제어가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된 야곱,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한 야곱의 천국행도 제어가 안 됩니다. 조절해 가면서 구원되는 법이 없어요. 마치 지옥 가는 것을 그들이 조절해가면서 멈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주님의 강력한 사랑의 추진력, 성도 본인도 하나님의 그 추진력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나는 세상에 빠져서 주님 잃어버렸어. 나는 주님 어디 있는지 몰라.’ 하면 주님께서 양 99마리 놔두고 ‘거기 있나?’ 하고 찾아가십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건너서 찾아와요. 지독해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자본주의로 모든 사람이 돈 벌기에 미쳐서 인간들의 그 욕망이 지독한 것처럼 그 지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지독한 게 뭐냐?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끄집어내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짓을 하든지 천국행으로 그냥 끌고 가는……, 마구 끌고 가요. 머리채를 휘어잡든지 해서. 완전히 중국 공안이 시위대 끌고 가는 것처럼 무조건 잡아 당겨서 그냥 끌고 가는 거예요.

‘네가 있을 자리가 이 자본주의가 아니야, 인간아! 내 고집이 너보다 더 세지? 내가 너를 이겼어.’ 천국으로 끌고 갑니다. 이 세상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 넘보지 말라, 그것은 전부 다 지옥 가려고 정신이 완전히 눈이 돌아버린 사람들이에요. 만족함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내가 하나의 개인으로서 어떻게 바르게 하면 주님의 천국 가는데 내가 협조할 수 있습니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가 있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의미라 하는 것은 단독적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 단독적이 아니고 인간의 본인의 위치는 야곱이라는 집단에 속해요.

야곱이 이름이 바뀌어서 이스라엘 되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속에서 개인의 위치는 불분명해요. 모호합니다. 그걸 클라우드(cloud)라 해요. 구름이라고. 구름속의 인간은, 성도는 그냥 확률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동시성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 같이 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전부 다 동시성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의 비슷한 예를 들면 양자역학에서, 양자라는 것은 입자(笠子)라는 뜻이에요. 작은 입자(Quantum). 양자역학에서 ‘양자 중첩’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큰 물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데 작은 입자에서는 그런 기이한 현상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이 학교 내의 도서관에 있다. 그리고 그 학생이 도서관에 있는 그 같은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한다.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떻게 똑같은 인간이 하나는 도서관에 있고 그 같은 시각에 동시에 어떻게 운동장에도 있을 수가 있느냐? 인간은 큰 물체기 때문에 안 되지만 작은 입자 같으면 이게 동시성이 성립해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기가 모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본질 되신 주님이 그 안에 같이 합세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이름, 주의 이름 빼 놓고는 나머지는 구름이 돼요. 클라우드가 돼요. 거기서 개인의 가치는 별 의미 없습니다. 이게 언약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 때에 홍수가 있었지요. 홍수, 물의 심판이 주어졌을 때 그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끼리 비교해보세요. 그 비교가 의미가 없어요. 전부다 심판 안에 있는 클라우드에요. 그 물속에 빠졌는데, 그렇게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는데 한쪽에서 물속에서 죽어가면서 어렴풋이 보니까 저쪽에 이재명이 있고 또 다른 쪽에 윤 석열이 있어요. 그게 물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물속에서 저쪽에 장로 있고 여긴 집사가 있어요. 물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개인적인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의미가 있으려면 그 물속에 있는 인간과 방주 안에 있는 노아가 동시성으로 있는 거예요. 한쪽은 물속에 빠져 있고 한쪽은 방주 안에 들어있고. 이게 동시성이에요.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일어난다고요.

한쪽은 자본주의 정신으로 더 끌어 모으는데 절제가 안돼요. 미친 듯이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인간들은 마치 음부의 세계처럼, 마치 지옥의 세계처럼 이 세상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그런 동시성이 없고요, 단독성이 있어요, 단독성이. 월드컵은 브라질하고 아르헨티나 둘이 공동우승 한다. 야,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동시성은 안 되지요.

모든 인간에 있어서 모형은 둘 중 하나입니다. 모형은 에서에 속한 모형과 야곱에 속한 모형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으로 오셨어요. 야곱인데 큰 야곱으로 오셨지요. 큰 야곱이라고 제가 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1장 51절에 나옵니다. 50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람위에 천사가 사다리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지요. 야곱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로 보지요. 하지만 요한복음 1장 51절은 그게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야곱이라는 모형 안에 바로 큰 야곱,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되시는 주님이, 인자되시는 주님이 바로 그 안에, 그 현장에 동시성으로 계셨던 거예요. 모형 안에 본질이 계셨던 겁니다.

야곱은 자기가 실재라고 여겼지만 나중에 천사를 얍복강에서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실재가 아니고 그냥 모형이에요. 마네킹이에요. 모형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안에 딸랑이처럼 안에 뭐가 들어 있어가지고 껍데기를 위해서 주께서 일하지 않고 안에 들어 있는 딸랑딸랑 딸랑이를 딸랑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사용할 때 그 때 의미가 나 안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내 안까지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진짜 본질이 들어 있는 모형이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이 인간세계 전체의 본질로서, 그 당시 모든 나라가 바벨론 하나로 일원화 된 그 시대에 이스라엘로 그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현재 바벨론 이 제국, 이게 인간이 추구하는 진짜 의미다, 할 때 그 의미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최고의 가치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이스라엘을 거기서 끄집어내요. 끄집어낸다고요. 끄집어내버리면 바벨론 제국은 그냥 들러리에요. 이스라엘의 들러리에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했는데 지배하기는커녕 역으로 이스라엘을 바벨론 제국 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합니다. 그 끄집어내는 일을 누가 하느냐? 여기 오늘 본문 하박국 2장 7절에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해서 ‘저들은 우리에게 지배당했다’고 여기고 안심한 그 민족이 도로 지배한 바벨론을 물고 늘어지는데 구체적인 상황이 이사야에 의해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이 고레스라 하는 것은 페르사, 바사나라의 첫 번째 왕이 고레스입니다. 이 고레스가 바벨론 제국을 쳐부수죠. 바벨론 제국 그 안의 하나의 민족이었던 페르사 민족이 바벨론 민족을 쳐부수고, 그 안에서 그 대제국을 무너뜨리고 고레스가 나오는데 이것은 고레스의 능력이 아니고 ‘이스라엘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본질이 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바벨론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는 겁니다.

무너뜨리게 되면 그러면 바사나라, 페르사 나라가 새로운 본질로 드러나느냐? 아니지요. 이 바사 나라가 등장하면서 거기서 진짜 본질이 같이 겸해서 출현합니다. 나타나요. 그게 이사야 44장 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고레스 왕을 일으켜서 하나님이 부서져 버린 성전을 재건하라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게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던 곳이에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입니다. 본질이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주했던 것이 본질인데 그동안 이 본질이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지요. 그런데 바벨론 그 다음에 나오는 제국, 바사제국에 의해서 드디어 성전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에스라 1장 1, 2절에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성전을 건축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전에 있던 본질이 이스라엘 속에 성전으로 등장했고요, 그것이, 성전이 바벨론제국에서 와장창 다 깨지고, 그 깨어진 성전이 다시 그 다음에 바사 나라에 의해서 잠시 등장했다 마지막 역사, 모든 의미가 종결되는 마지막 역사에서는 그 성전이 사라져 버려요.

본질이 들어왔다가 그 본질은 본래의 자리 하늘나라로 사라져 버려요. 본질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전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성전 출현→성전 깨어짐→성전 사라짐’의 과정을 위해 자칭 실체라고 우기는 현실세계가 연동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예수님 자신이 내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46년 동안 짓고 있는 성전보고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사흘 만에 짓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모든 의미를 인간이 알고 있는 그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챙기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성전 같으면 건물, 성전 같으면 부동산,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벽돌, 이걸 성전으로 보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이 여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벽돌로 여기는 자체가 모형이라는 생각을,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이게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지요.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언제 알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 모든 성전이 예수님의 몸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전이라는 것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 일종의 모형이지요. 플로리다에 있는 케네디우주센터, 또는 텍사스에 있는 나사 본부에서 로켓 올라갈 때 그 지지대가 있잖아요. 로켓 올라갈 때 밑으로 툭툭 떨어뜨리면서 버리는 게 있지 않습니까? 진짜 캡슐하나 올리려고 거기에 보조적인 모형들 세워놓는 거예요.

우리 역할이 바로 그런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드리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나를 위해서, 나의 나됨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아주 극구 주장해요. ‘나, 나는 나 되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게 최종적인 나의 의미다.’라고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최고다, 라는 그것, 그 의미를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변의 약한 국가들을 계속해서 끌어 모으는 거예요.

부자가 돈 많을 때 나는 부자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자됩니다. 그런데 그 한도는 모르지요. 본인도 몰라요. 10억으로 부자 되었다, 하다가 좀 있으면 50억 되었다, 하다가 점점 더 본인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본인의 욕망이 제어가 되지를 않아요. 그게 지옥의 특징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이 그거예요. 묻지도 않고 무조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질주하는, 멈추지 못하는 질주본능으로 그냥 달려가요. 어디로? 지옥으로 달려가요.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세계로. 언제 멈추느냐? 장례식에 가게 되면 거기에 부사, 형용사 아니고, 동사도 아니고 부사가, 적절한 부사가 있습니다. “마침내” 마침내 멈췄다. 무엇을 멈췄는가? 마침내 기회가 박탈되는 그 순간, 그게 멈춘 거예요.

바벨론은 그리고 이 세상은 모형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증상인데 증상이란 진리의 전령입니다. 진리가 있는데 진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택배기사처럼 이 세상에는 증상들이 나옵니다. 그 증상들이 나올 때에 자기가 속이고 겉이고 간에 본인들이 단독적으로 그걸 로 다 마감되었다, 여기는데 성경은 겉이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게 본질이지요. 속이 겉으로 나오게 돼요. 그게 증거가 돼요.

이스라엘은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나 됨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없어. 그런 것은 없어.’ 내가 예수 믿어서 예정된 게 아니고 내가 아예 뭘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창세전에 본질자체 안에, 아직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모형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예정된 채 선택된 거예요. 예정된 채 선택될 때는 뭘 빼야 되느냐 하면, 나 위주로 예정되었다, 나 위주로 선택되었다, 나 위주로 구원 되었다, 를 빼야 돼요. ‘우리는 주님의 예정하심과 구원하심과 선택하심을 위해서 주님께서 모형으로 사용했다’는 쪽을 아는 사람이 사랑받기로 된 야곱의 편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창세전부터.

그러니까 성도가 되었으면 나는 뭐 이렇게 했다는 그 자체 그걸 주께서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중에 본질 되시는 주님이 쑥 뽑아 나오니까 ‘아, 이 일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용했구나.’ 하는 것이 본질이 뽑혀 나가면서 비로소 껍데기, 딸랑이가 빠져나가니까 껍데기로 우리가 껍데기인 자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껍데기다, 할 때 이게 증거 하는 거예요. 주님을 증거 하는 방법입니다.

참 그동안 숱하게 많이 듣는 질문 가운데, 또 질문하고 싶어도 남들이 무슨 소리 할까봐 못하는 질문중 하나가 있어요. 그래서 속으로 ‘목사님, 저 선택된 것 맞습니까?’ 왜 그걸 알려고 하느냐 하면, 그걸로 자기 굳히기에 들어가려 하는 거예요. 나 의 나됨을, 그 의미를, 자기 의미를 마감하려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단독적이지요. 이중성이 아니에요.

주님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계획 된 것이 나 구원을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획된 거예요.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우리가 계획된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에베소서 1장 4절에 있는 말씀이 그대로 우리 안에 최종의미로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제 알았으니 여러분이 이렇게 앞으로 사시면 돼요.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이 서로가 본질이 되려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이제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한번 두루두루 살펴보세요. 자기 건드리면 안 된대요. 왜? 자기가 진짜 현실이고 유일하게 내가 붙들 수 있는 내가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스라엘조차도, 주님은 이미 이스라엘 속에서도 빠져 나왔어요. 제자들도 몰랐어요. 나중에 부활의 영을 받고 난 뒤에야 알았어요.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0-22)

주님의 그 본질은 인간 손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냥 인간 버리고 훅 떠난 거예요. 전부다 껍데기니까, 모형이니까, 에서의 모형이든 야곱의 모형이든 모형에 불과하니까요.

끝으로 저는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프가니스탄 멸망할 때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마지막 군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군용기가 이륙할 때 그 마지막 군용기를 붙잡기 위해서 그 군용기 바퀴 붙들고 올라간 사람들이 여러 명 되었어요. 군용기가 주님이라면 주님 왜 붙듭니까?

우리는 이 땅에 와서 살만큼 살다가 사라져도 상관없어요. 왜? 우리 주님은 죽음 그 이후까지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군용기 떠날 때 그 발통 올라앉아서 비행기 붙드는 사람은 끝까지 자기 자신이 최종적인 의미라고 본 거예요. 나는 내가 의미 아니면 살맛이 안 난다는 거예요. 내가 실재고, 실체고, 실제고, 나는 어쨌든 간에 나 다워야 된다고 고집하는 사람, 그 군용기 바퀴 붙드는 사람, 오늘날 교회에 그런 사람 많~습니다. 주님 십자가 붙들고 구원받으려 하는 거예요. 참 이게 웃을 일인지 서글픈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자신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껍질이에요.

마지막으로 거기에 해당되는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죽을 육체에, 죽을 육체에,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을 육체에 주님 들어오셔서 창세전에 그리고 세상 끝나고 난 뒤에 주님의 세계 있음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노력의 결과겠습니까. 주님의 한없는 끈질긴 사랑의 결과로서 받아들이고 주께 영원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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