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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5 17:46:15 조회 : 45         
135강-욥기 42장 7~9절(중보자의 모형)220515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139.131.147)
135강-욥기 42장 7~9절(중보자의 모형)22051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2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801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친구들 사이에 판정을 내리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 판정받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욥의 입장이나 모두 다 자기 자신이 옳았고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세 사람을 이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네 사람 모두 도저히 상상을 못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의 지을 죄는 죄다 짓게 해놓고서 끝에 가서 중보자 제도를 삽입시키는 이런 아이디어는 인간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중보자 제도보다는 하루하루 바르게 살아서 그때마다 칭찬받고 복 받는 그런 선악적인 체제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라고 이렇게 제사 드리라고 되어있습니다.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은 평소에 인간들에게는 ‘나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다’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온 겁니다. ‘나같은 괜찮은 사람에게 무슨 나 대신 나의 죽음을 맞바꿀 깨끗한 짐승이 필요한가. 필요치 않다’라는 식으로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끝에 가서 일어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내부에서 바꾸어서 나타내신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내부를 감추시고 일을 하시다가 욥기 마지막에서는 하나님 내부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은 뒤로 빠져버리죠.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바르게 살겠습니다’라는 인간과 하나님 관계가 소멸되고 사라지고 ‘너희들 때문에 일곱 양, 일곱 염소처럼 내가 희생하마’라고 너희들 때문에 희생하는 새로운 하나님 모습으로 마지막에 드러내죠.

하나님은 계시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아는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은 빠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 자체가 너희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그 잘못된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고 등장하는 마지막 때 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대로 바꿔서 하나님 내부가 드러나는 시기가 이 세상이 끝장나는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세상에 끝에 예수님의 중보자적인,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그 시기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진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알 것 다 알아버렸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냐. 히브리서 8장 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모형이었다는 거죠. 마네킹이었어요.

마네킹을 탁탁치게 되면 안이 텅 빈 소리가 납니다. 옛날에 어머니께서 옷 장사를 해서 마네킹을 본 적이 있는데 신장도 비슷하고 모양은 어찌 보면 좀 투박한데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탕탕 소리가 나요. 그냥 껍데기예요. 이건 인간이 모형이라는 말은 인간 속에 죄만 잔뜩 들어있다는 겁니다. 죄만 들어있는 마네킹이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그 인간은 자기가 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자기 죄를 담보로 해서, 죄를 전제로 해서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냅다 이야기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이건 욥도 마찬가지고, 욥의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다 보면 욥은 정당하다고 이야기했어요. 욥이 정당할 것 같으면 욥기를 이렇게 길게 끌어올 필요가 없거든요. 초장부터 ‘욥이 이겼다. 이제 까불지마’라고 하면 끝나는데 그것은 욥 자체가 하나님과 관련성이 없는 친구들로 인해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욥은 의롭게 될 수밖에 없는 노선에 해당 되는 사람으로서 활용당한 겁니다.

욥은 대게 억울하게 당한 거죠. 특히 욥이 중보자적 노선에 들었다는 증거는 욥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주 처절한 고난과 아픔이 있었어요. 병이 들었거든요. 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로움과 고난을 연계해보려고 그렇게 해석을 하려고 노력해도 하나님은 ‘쉿’ 입 다물고 계시지, 친구들은 무지하지, 본인도 그냥 무지하면 끝나는데 아픈 당사자는 아무 해결책도 없이 아프기만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욥을 선지자로 사용하기 위해서 나의 아픔을 욥 너에게 집어넣었다. 이로써 너는 나의 의의 노선에 합세되고 들어온 사람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욥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십자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욥이 의롭다고 판정받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 5장 10절에도 나옵니다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며 바로 선지자들처럼 너희도 그 의의 노선에 함께 있다고 하나님께서 평하십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제가 어렵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물쇠와 열쇠가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열쇠를 쥐고싶어해요. 그게 마스트키(Master Key)여서 뭐든지 척척 해결될 수 있는 열쇠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중보자는 뭐냐 하면 그 위치를 반대로 바꿔버립니다. 우리가 자물쇠예요. 우리가 말썽쟁이예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꾸 가만있지도 못하고 일을 만들어 내는 말썽쟁이예요.

말썽쟁이이기 때문에 그 말썽쟁이에 맞춰서, 주께서 말썽쟁이에게 딱 맞춘 열쇠는 우리가 까부는 족족, 우리가 까불이에 맞춰서 열쇠 제작을 해서 어떤 까불이도 다 문제가 해결되는 열쇠를 주님께서 제작에 나섭니다. 이게 뭐냐 하면 원자재 공급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원료로써 계속 주의 일에 수급되는 거예요. 하루를 살아도 까불이 또 살면 또 까불이로 계속 수급되는 거예요.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아이가 가다가 자전거 박아서 이빨 3개 날아가면 이것도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우리아이에게 벌어집니까’라고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어요. 매일 찾아오는 문제에 대해서 나 자신이 어느덧 문제를 해결해서 나의 세계를 괜찮은 세계로 정립하려는 그래서 내가 욥처럼 의인이라고 우기고 싶은 욥의 육적 본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 욥을 어떻게 욥기를 보면서 욥이 어떤식으로 그리고 왜 바뀌어야 하는가. 그것은 마태복음 27장 64절을 보게 되면 거의 단번에 해결될 것 같아요. 마태복음 27장 64절을 읽고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죽을 때,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자체적으로 예수님이 하는 그 행동, 말에 대해서 후유증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라는 이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죽고난 후에 부활 된다고 했는데 그건 인간에게 일어날 수는 없고,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죽고 난 뒤에 가만 보니까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나는 죽지만 내 제자들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집단 오기, 자존심 가지고 계속 국가 질서를 어지럽힐 빌미가 될 것 같으니까 군사 둘에게 예수님 무덤을 지키게 했어요.

질문은 이겁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출입을 지키고자 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의 행정력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처구니가 없죠. 이 어처구니없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들이에요. 지식으로 십자가 믿고 부활 믿었으니까 앞으로 잘 될 거라고 믿는 거죠. 지식으로 부활 믿었는데. 부활 믿고 십자가 믿어 줄 테니까 나 하는 일이 너무 꼬이지 않게, 그냥 잘 풀리게만 해달라는 그러한 여전히 자기 세계를 고수하기 위해서 뭔가 주님 편에 서 있다는 자기 과시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욥의 친구와 욥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중보자라는 개념을 그들도 몰랐지만 오늘날 십자가 안다는 우리도 평소 일상 가운데서 중보자 개념이 다 빠져버렸어요. ‘저 십자가 알아요. 부활 믿습니다. 됐지요? 그러니까 제발 나 하는 대로 좀 놔두세요’ 지금 이 행정가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의 체계와 질서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 것을 지키려고 예수님의 무덤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겁니다. 군사 둘을 내세워서.

돌로 막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군사 둘을 세우는 겁니다. 이게 왜 어리석으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해서 만약 안쪽에서 돌을 굴렸는데 치워보니 군사 둘이 지키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이고, 제가 다음에 나올게요. 미안합니다. 하루 더 있다가 부활할게요. 이렇게 지키고 있는지 몰랐네. 인간 단도리 대단하네’라고 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수준을 자기들 수준으로 낮춰서 본 겁니다.

그들은 중보자가 뭔지를 모르듯이 오늘날 중보자라는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지를 우리가 지금 상상도 못 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냥 이 세상에 남들과 같이 섞여서 살면 중간쯤은 갈 것이라는 사고방식 이것이 은연중에 예수님의 무덤에 보초 세우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에 불가합니다. 그러면 무슨 출입을, 무엇을 바리새인들은 지키고자 했는가. 예수님의 세계관을 지키려고 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관을 왜 지키려고 했느냐.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네킹이라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모형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물론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지만 세상 사람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기분 나쁜 이야기예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와 욥을 이용했는지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라고 나옵니다. 기이하다는 것은 이상하고 생각도 못 한 일이라는 거죠. 지금 욥의 친구나 욥 전부 다 욥이 중보자가 되리라는 것은 생각 못 했어요. 기이한 일입니다. 기이한 일이 되기 위해서 필수 코스가 뭐냐 하면 버려져야 해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그러니까 건축 전문가들이 보기에 정말 아무 쓸데 없다고 버린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나를 쓸데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늘 초조함을 갖고 있습니다.

좀 자신감을 가지고 ‘네가 버려도 주님이 버림받은 것처럼 우리도 버려져 마땅하지’라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버림받을까 봐, 그렇게 인생 실패로 끝날까 봐 겁을 엄청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원리가 욥은 철저하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쓰이는 거예요. 일곱의 수송아지와 일곱의 수양처럼 본인들의 고유한 본인의 가치를 위해서 본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냥 진짜 제대로 살아계신 분은 주님이고 너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모형으로써만 21세기 5월을 당연히 보내야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냐. 여러분들이 침대에서 주무시는 분이 계시죠. 혹시 여러분들이 침대에 자기 몸을 누이면서 스프링에게 미안해 본 적 있습니까? ‘내가 몸무게를 좀 뺄게. 10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네가 참 고생이 많다. 요즘 들어 배에 살까지 쪄서 스프링 네가 고생이 더 많지? 그래도 어쩌겠니. 내가 살살 누워볼게’라고 하면 침대가 화를 냅니다. ‘주인님 그냥 스프링을 확 눌러버리세요. 잠 잘 옵니다’

그러니까 잠이 잘 오는 이유는 ‘스프링아, 너 오늘 좀 혼나봐라’라고 그냥 자기 몸을 스프링에게 맡기고 사정없이 눌러버리는 거예요. 중보자를 중보자답게 하는 방법은 주님을 사정없이 핍박하는 거예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너는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소리 하면 안 돼’라고 하십니다. 주를 사정없이 핍박을 해줘야 합니다. 세상에 사울처럼 핍박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는데. 심지어 스데반집사 죽일 때도 가담했잖아요.

그럼에도 가장 중보자의 가치와 의미를 보여준 것은 사도바울이에요. 예수님을 가장 못살게 굴었으니까요. 그렇게 못살게 굴었으니 죄인 중에 괴수가 될 것이 뻔하고 이런 자기가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입을 담을 수가 없지요. 놀라버리죠. 이미 너무 놀라서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는 위협은 아주 사소한 거지 위협도 아니에요.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의 의로움을 챙길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욥기 본문의 핵심입니다.

네가 중보자가 된다는 말은 주님의 중보자 아픔에 욥이 참여되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 욥을 자랑해도 거기서 욥은 거기서 친구보고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하나님이 인정해 줬잖아. 까불지마’라는 식으로 나대지 못합니다. ‘주여, 제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여러분도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신 존재로 받아들이실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중보자라는 것은 나 구원받으려고, 나 예수 믿는 거 자랑하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내가 주를 핍박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침대 스프링을 그냥 눌러버림으로써 침대의 의미를 여과 없이 다 마음껏 쏟아내게 하는데 이 지독한 죄인을 사용하시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욥기 8장 7절을 이제는 여러분의 고백으로써 한번 공격을 해보세요.

여기에 빌닷, 소발, 엘리바스, 이 세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너희들이 욥처럼 의롭지 못하다고 정당하지 못하다고 욕을 얻어먹었는데 이 정당하지 못한 말을 제가 언급을 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을 가지고 이게 왜 정당하지 못한지를 공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8장 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걸 공격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회사 사장 아니면 교회 목사님 아니면 자기 농장의 주인 아니면 가정의 가장이라고 하고 아이들도 다섯 명정도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여했는데 다른 부모들은 자기 자식 자랑합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자식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못 하더니 나중에는 크게 성공했다. 창대했다’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어떻게 공격하겠습니까? 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중보자 알아놓고 막상 내 자식을 내가 공격하려고 하니까 ‘우리 자식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나중에는 창대했어요’라고 하게 되면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지 못한 거예요.

거기에 더더욱 정당하지 못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자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바뀌었어요. 바뀐 하나님이 아니고 옛날 으레 남들이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우겼던 그 잘못된 오해한 하나님 가지고 자기 자식 출세한 곳에 바로 연결해 버렸습니다. 욥도 그랬던 사람이고요. ‘제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셨다’

이런 이야기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이야기나 여러분은 이게 칭찬이 아님을 아시죠. 칭찬이 아니면 남들을 공격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이러한 본심을 한번 공격해보란 말이죠. 정답은 이것입니다. 같은 노선에서는 시작할 때 창대를 노리고 들어가요. 그러나 다른 노선이 와버리면, 예상 밖의 다른 노선이 와버리면 이것은 기존 노선에서 내가 생각했던 문제와 열쇠는 폐기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나중에 성공할 거라는 그 노선, 그 노선은 중보자의 관여 없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적절치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예수님의 복제물이고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무엇을 날마다 떼 내야 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것을 이제는 여지없이 떨쳐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이 이야기해도 우리에게 유리하면 진리라고 오해했던 저희들, 주님 십자가 생각해보면 어리석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문에 보초 세웠던 그런 양상으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부활, 십자가가 내가 나를 지키는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드는 이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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