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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3 12:00:06 조회 : 129         
안양20190712a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0712a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5장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맹세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왜 맹세를 인간은 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게 아니고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주님의 맹세에 의해서 세상이 주어진 거예요. 성경이 두껍잖아요. 성경책의 모든 내용은 주님의 맹세를 확인하는 책이 바로 이 성경책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주님의 맹세 없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건 그 하나의 맹세를 누구보고 맹세했느냐 라고 궁금해 하실 건데, 히브리서 6장에 보게 되면 13절, 14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자기보고 맹세를 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또는 맹세할 때,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맹세하는 거예요.

맹세하신 하나님과 맹세 받는 하나님이 따로 있겠지요. 그래야 그 둘 사이에 맹세가 성립되니까. 그 맹세가 그냥 흐지부지로 끝났을까요?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자연 전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게 완료가 되는 식으로 주어졌을까요? 어느 쪽일까요? 하나님의 맹세가 무효화된 겁니까, 아니면 제대로 다 완성이 된 걸까요. 완성이 다 됐겠지요. 그 완성됐다는 증거가 니는 맹세하지 말라, 에요. 니가 이 땅에서 더 추가해서 할 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사람은 맹세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 맹세는 불안해서 오는 거죠. 불안, 불안해서 오는 겁니다. 사람이 왜 불안하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이제 불안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맹세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죄 짓는 거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죄 짓는 거고, 죄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거죠.

그래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기 몫에 자기 일을 따로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드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맹세한다는 게. “비키세요. 이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맹세를 하고 대들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자아성’입니다. 인간의 자아성은 대들면서 생기는 거예요.

군대에서 졸병들이 고참한테 시키는 대로 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고참이 한 말을 거부하고 대들 때 그 때 자아성이 생기는 겁니다. 갓 시집온 새댁이 고분고분하다가 언제 자아성이 생기느냐 하면 시어머니한테 대들 때, 시집에 대들 때, 비로소 그동안 미뤄 놓았던 자아성을 되찾는 겁니다. 부딪치고 마주치지 않으면 자아성이 생기지 않아요.

그러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자아성은 이미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순복, 순종은 이미 물 건너 간 겁니다. 순종을 순복하되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순종할 만하면 하고 순종 안하면 나는 순종 안하겠다는 거예요. 순복, 순종은 일종의 믿음의 행동이거든요.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순복, 순종으로 드러나는데 순복, 순종을 내가 알아서 순종하고 순복하겠다는 말은 내가 믿을만하면 믿겠다는 것. 그게 이 믿음은 하나님께 대든 죄의 결과가 뭐다?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은 자아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무슨 믿음이냐 하면 나의 믿음이 되겠지요. 나의 믿음으로 예수 믿어서 천당 가겠다는 것은 이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자아성이 생기게 되면 생겨버린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허세, 또는 맹세, 이것을 계속 하게 됩니다. 하늘을 통해서, 땅을 통해서.

그래서 이 맹세와 이런 가짜 믿음에 대해서 거짓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있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세상은 누구의 맹세대로 됐다 했지요? 하나님의 맹세대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군데, 군데 반란이 일어난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군데, 군데. 우리도 내 목소리 내고 싶은 거예요.

회사 사장이 노동자들 직원들이 순복하고 순종하게 되면 늘 한결같이 순복, 순종하게 되면 이게 월급이 오를까요? 안 오를까요? 안 오르지요. 오를 리가 없지요. 견딜만하구나! 그 정도로도 견딜만하구나! 그 여분의 돈은 지 골프치고 지 사치하는데 다 쓰고 안 주는 겁니다. 반발하고 반항한다면 약간 인상해주고 그러면 이제 노동자는 이거 대들면 이게 오르는구나! 해가지고 또 대들다 그 다음에는 짤리고. 너무 까불다가 잘리고. 우리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 월급 가지고는 다른 초자 둘 쓰는 게 더 훨씬 낫습니다. 잘려버리고 그렇지요. 막 나갈 때 주의해야 되거든요. 잘된다 싶을 때 주의해야 될 일이에요. 이게.

우리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맹세를 남발하게 됩니다. 남발하면서 이 맹세를 통해서 내 믿음이 그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 믿음인지를 모르지요. 이 진짜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확인하려고 하면 필히 뭐가 생기겠습니까? 불안감생기지요. 확인하면 불안감 생기는 겁니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그 애들 놀이에 여러분들이 해봤습니까. 자기는 눈 감고 친구의 손을 잡고 등어리에 푹 숙이고 가고 친구는 자기 손을 잡고 앞서 갑니다. 그럼 뒤에 애가 묻지요. 어디까지 왔나? 묻지요. 어디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자꾸 묻잖아요.

확인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 목표 지점에 다 왔는지를 자꾸 불안해하기 때문에 하게 되고, 그 확인하는 테스트 방법이 맹세를 해보는 거예요. 맹세하는 방법은 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하면 기도를 통해서 하지요. 이런 기도는 꼭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빠트리지 않습니다. 야무지게. 주문이니까. 주문 같은 거니까 예수 이름으로 빠트리면 새로 다시 해야 돼. 아이~ 귀찮아 죽겠어. 이게. 다시 예수이름으로 해가지고 못을 딱 박고 부적 붙이듯이. 예수 이름으로 부적을 붙이듯이 꼭 해가지고 시험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1장5절,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서 기도 응답 방법은 뭐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는 주시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러니 이 말씀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왜, 그 말 자체가 인간의 행위에서 이걸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의심하지 말고 구할 때 의심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의심하지 않는 자체가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기도하면 주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게 하셔서 이미 너에게 응답된 상태에 니가 놓여있음을 주님 쪽에서 알려주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키려면 일단은 의심을 안해야 되거든요. 응답을 받으려면 의심을 안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의심을 안 하려면 의심하는 경우와 안 하는 경우를 둘을 본인이 상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이미 뭐냐, 두 마음을 품은 게 돼요. 내가 지금 의심 안하는 것이 의심일까, 의심 아닐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것이 의심이고, 어떤 것이 의심 아니지.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의심이에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말씀은 전체가 하나님의 맹세로 된 책입니다. 맹세로 된 책이에요. 맹세로 된 책은 그 말은 오늘 본문과 연관시키면 내가 맹세로 내가 알아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니가 거기서 니 자아성에 입각한 나의 것을 따로 챙길 이유는 전혀 없다. 맹세하지 마라. 니가 여기서 압력을 가한다던지 어떤 니 뜻을 거기다가 집어넣을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은 자꾸만 맹세하고 기도하고 의심하지요. 거기서 주어지는 것이 붉은 걸로 해야 되겠지요. 이렇게 시험하고 테스트하게 되면 여기서 생긴 게 대자연은 그 인간에게 뭘 주느냐 하면, 위기를 주는 겁니다. 위기. 기도의 응답이 안됐다는 자체가 뭔 뜻이냐 하면 나 지금 위기가운데 있다. 이런 뜻이에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게 의심이거든요.

니가 왜 마음에 불안해하는고? 불안하고 싶어 불안합니까. 불안은 내 자아성에서 나오잖아요. 근심과 내 자아성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꾸준히 내 안에서 자꾸 뭔가 나오고 있어요. 계속해서 뭔가 나오고 있으니까. 그것이 주님의 이루신 맹세와 잘 이게 타협이 안 되고 불화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말씀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그야말로 순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이거든요.

옛날에 집안에 한 가정이 잘되면 순종, 순복하라고 이름도 순종, 순복이라 이름을 옛날 사람들은 많이 지었다 말이죠. 어디가도 니가 순종하고 순복하면 밥은 먹고 산다는 겁니다. 먹을 게 없을 때는 밥만 먹으면 그게 내 평생 얻은 것 다 얻은 것 같지요. 일단 밥을 먹게 됐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다음에 챙기는 것은 뭐냐, 그러면 나는? 내 자아성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늘 이렇게 불안해서 확인하고 확인해 놓고 또 불안하고. 이것은 누구를 테스트하느냐 하면 인간이 날마다 신에게 테스트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태복음4장에서 악마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주 일이 뭐였던가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테스트하지요. 그 악마의 하는 일이 지금 대를 이어서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계속 테스트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아직도 전봇대다. 어디까지 왔나? 우리 집 언제 오느냐 이 말이지요. 계속해서 확인해가지고 내가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로도 땅으로도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큰 홀 또는 체육관 엑스포같은 그러한 전시회장, 이처럼 거대한 빈 공간에 우리는 거기에 이미 놓아져 있는 인물입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맹세를 자꾸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는 주님의 맹세로 되어가는 주님의 약속으로 언약으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자꾸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다른 노선, 맹세라는 그걸 테스트하듯이 자꾸 맹세를 해대니까 주님께서 위기를 줬다고 했지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맹세하지 말라할 때 그냥 말만 맹세하지 말라하면 안되잖아요. 그럼 맹세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리 할 때는 반드시 뭐가 온다고 했습니까? 위기가 오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위기가 오는 겁니다. 그럼 이 위기에 대해서 2가지 설명할 수가 있어요.

하나의 위기는 뭐냐 하면, 개인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현대인들이 잘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존적이다. 실존적. 제가 실존적이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실존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돌멩이를 가지고 실존이라 하지 않습니다. 돌멩이는 그냥 존재라 해요. 있다. 선풍기가 있지요. 선풍기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손자가 있다. 그건 손자보고 그냥 있다, 하면 그 며느리나 아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손자가 그냥 있으면 안돼요. “그럼 우리 애가 돌멩이입니까? 아버님은 돌멩이로 보입니까?” 이런다고요. 손자가 이리 노는데, “야야, 애를 치워라.”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그렇지요.

손자한테는 치우라하면 안되고 좀 치워줄래, 하는 손자한테 물어야 되잖아요. 대화의 상대가 실존입니다. 아무리 뭐라고 이야기해도 그쪽이 죽은 물체가 아니고 살아있는 거라면 대화를 해야 돼요. 대화를. 그래서 본인의 의사가 따로 존재할 때 그걸 실존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존이겠습니까? 아니면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는 실존이겠습니까? 존재겠습니까? 실존이지요. 악마가 바보등신 아니거든요. 욥기1장에 보세요. 바보등신 아닙니다.

악마는 지금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말은 하나님도 실존이고, 악마도 실존이에요. 그런데 욥은 뭐냐 하면 본인은 실존이라고 우기지만, 막상 높은 레벨, 높은 단계에서의 악마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졸지에 욥은 실존이 아니고 뭐가 되었어요? 존재가 되고만 거예요. 돌멩이와 똑같이 되어버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욥은 강렬하게 반발하지요. 나를 개무시하다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나옵니까. 나도 한 인간입니다. 반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실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존을 내거는 인간 쪽이 아니고 위쪽이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데서 이곳으로 옮겨온 거기 때문에. 다른 데서. 이쪽으로 옮겨온 거예요.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9장에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했고요, 없고요. 지금. 존재가 없어요. 존재가 없는데 실존이 먼저 있어요. 무형의 형태가 없는 실존이 먼저 있어요.

에서는 미움 받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했다. 두 실존 사이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아까 제가 맹세는 누구보고 한다고 했어요? 이 세상을 만든 맹세는 누가 누구보고? 하나님이 누구보고? 자기보고 맹세한다 했지요. 히브리서6장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맹세가운데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맹세했지,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데려놓은 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아까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에서는 창세전에 미워하기로 되어있고, 야곱은 사랑하게 되어 있잖아요. 지금 예수의 존재는 없어요. 실존은 먼저 있고 나중에 야곱, 에서를 태어나게 하고 존재로 태어나게 하고 준비된 실존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이렇게. 붕어빵 앙꼬 넣듯이. 밀가루 부어놓고 실존을 집어넣는 거예요.

야곱은 이 땅에, 야곱의 몸은 범죄한 아담의 몸을 지니고 왔잖아요. 야곱의 몸은 악마의 몸이기 때문에 이게 자기 독자성, 자아성을 포기를 못하지요. 야곱이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내가 얼마나 챙기느냐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생각한다고요. 그게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의 실존이 자기의 존재를 넘어서는 거예요. 하나님과 결부됐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나를 보기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장차 오실 하나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미리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야곱과 이스라엘 중에서 누구 하나는 죽어야 되지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 설교한 거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제대로 산다고요.

야곱은 죽을 때 죽은 게 아니에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천사와 만날 때 이미 죽은 거예요. 야곱으로 죽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야곱을 계속 죽이는 그 작용, 그 죽이는 작용이 바로 생명의 작용이에요. 하나님의 맹세의 덤태기를 씌운 거예요. 맹세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덤태기를 씌워지는 겁니다.

야고보서4장 한 번 봅시다. 4장 14절, 이거 20번도 넘게 한 거 싶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물으면서 너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생애라는 게 말씀과 관련해서 한시적이다. 순간적이고 임시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말씀과 관련해서.

말씀이 떨어져나가면 우리는 내 인생 내거라고 내가 열심히 살아주지만, 말씀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안개처럼 주님의 반짝 폈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되는 거예요. 있었나? 없네. 없잖아. 아~ 조금 전에 있었는데. 없잖아. 지금. 이리 되는 거예요. 조금 전에 있어야 했었고, 조금 전에 있던 그것이 없어져야 될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맹세가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인간의 육은 풀이고,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말씀과 맹세의 영원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 일시적인 실체, 또는 일시의 물체, 사물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럼 우리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요.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하지 말고 처음에 우리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몸을 입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리 돼요. “예수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 바깥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혜택 안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저주 안에 있었습니까?” 질문이 그리 되어야 되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인생을 논하다가 갑자기 확대돼요. 범주가. 확대되어가지고 창세전부터 있었던 계획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럼 그동안 그것을 그러한 숙명의 지혜를 누가 방해했느냐 우리의 육적인 아담의 몸인 내 자아성이 그걸 극구 반발하고 대들었지요. 그 대들은 게 뭐라고 했습니까? 대들은 게 우리가 오늘 본문에 맹세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러면 맹세하지 말라 해도 맹세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하나님께 대들기 위해서.

왜 대든다 했지요? 대들면 무엇이 생긴다 합니까? 자아성이 더욱 더 공고히 되는 겁니다. 나는 나다가 공고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체 하늘이나 땅이나 어느 것도 맹세하지 마라. 니가 권여할 일이 아니다. 니 인생이 니가 권여해서 될 인생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의 맹세가 듬뿍 주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가.

여러분, 빙수 같은 거 한 번 보세요. 빙수를 탑으로 해서 함빡 주지요. 빙수에다가 팥 넣고 여러 가지 떡도 넣고 초코렛하고 연유도 붓고 하는데 그것이 주어진 빨간 주스, 노란 주스, 파란 주스도 전부다 빙수 알갱이 속에 녹아져 나가잖아요. 녹아져 나가지요.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빙수 속에 있는 하나의 팥 알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우리의 자아성이라는 것이 그게 의미가 있겠어요? 없지요. 전체 빙수를 위해서 그냥 참여한 거잖아요. 먹으시는 분의 맛있게 먹기 위해서 참여한 거다 말이죠.

그러면 그 빙수가 녹아진다면 같이 녹아져야 되는 거예요. 제가 빙수라고 했는데 그 빙수에는 얼음조각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시간으로 봐요. 우리한테 시간이 잔뜩 주어졌고 그 시간은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약속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에 우리는 거기에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우리는 매일 이별해야 돼요. 우리는 매일 이 자아성과 조금씩 내가 나로부터 빠이 빠이 해야 돼요. 헤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늘 이별이에요. 늘. 요거 제목 괜찮다. 조금씩 이별합니다.

여러분, 어제까지 산 인생 어디 갔습니까? 어제 어디 있어요? 어제. 헤어졌습니다. 내일되면 오늘과 헤어져야 돼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어제와 헤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아까워요. 스톱이 안 되고 계속, 계속 죽음 쪽으로 이렇게 내가 망가지는 쪽으로 허물어지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우울증 걸릴 정도로 힘든 현실이에요. 이 세상이.

오래간만에 옛날에 드라마나 영화에 나왔던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한 20년 만에 그 사람이 새로 등장해 보세요. 제일 화면에 나오면서 우리가 하는 말이 저 사람 왜 이리 늙었지? 오랜만에 나오면. 다들 그런 이야기해요. 아이, 많이 늙었다.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자신도 같이 늙어가잖아요.

하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니가 맹세한다고 해서 니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니가 무너지는 것을 니가 안개의 꼴이 나는 것을 그걸 취소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을 제대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허망한 니 자아성에 입각한 니 허망한 꿈은 너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뭐를 초래한다 했습니까? 이 위기를 초래해요. 위기를 자꾸. 왜냐하면 이 현실하고 안 맞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맹세와 싸우시는 하나님이 주님이에요. 우리의 맹세를 자꾸 하니까. 싸우니까 위기를 자초하게 되지요.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제가 위로삼아 이야기하는 건데 이렇게 맹세하고 위기를 당하는 그 자체가 맹세의 완성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맹세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곱게, 곱게 가는 법이 없어요. 반발과 반항을 온몸으로 받아내시면서 그걸 강제로 안 들어주면서 말씀은 말씀대로 성취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 맹세의 마지막이 뭐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맹세의 마지막은 뭐냐,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표정들이 궁금하지 않은 표정들인데, 맹세의 마지막은 이거에요. 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정답을 알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최종 죽음이에요. 이 죽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냐 하면 이게 ‘처벌’입니다. 처벌. 니 죽는 걸로 처벌 끝내자. 우리 그런 것으로 합의보자. 니 몸 없는 것으로 너는 너한테 물을 게 없다. 우리 그리 가자. 응?

왜냐하면 옛 몸은 없어져야 새 몸이 주어지니까. 몸이 둘되면 안 되잖아. 그지? 그러니까 있는 몸 폐차하고. 이만원줄게. 이만원. 폐차시키고 새 차 뽑자. 응? 우리 그리 가자. 그렇게 하고 가도록 하자! 그러니까 맹세하지 마. 내가 그렇게 일이 잘되고 있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뭡니까?” 이리 나올게 아니냐 말이죠. 하도 이해타산이 예민하니까 우리는 하나님 대놓고, “그렇게 해서 맹세해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게 뭡니까?” 하면 주님께서 뭐냐 하면, “니 본래 있던 자리로 데려가줄게.”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어떤 동네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잠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이동해 온 거예요. 자리를 이동한 거예요.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니까. 이 자리에서 후딱 은퇴해가지고 다시 원래 갔던 자리로 창세전에 예정된 그 자리로 다시 보내줄게. 그게 니 실익이야. 니가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그거야.

그런데 거기 가는 코스를 주께서는 그냥 위로만 하는 게 아니고 실제 온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나는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베드로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너 못 와.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을 너한테 보내줄 테니까 성령 따라서 오게 되면 내있는 곳에 너희도 나와 같이 있으리라.” 그러면 이제는 우리는 너희들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하나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성도는 목표는 뭐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우리가 한 패밀리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천국이에요. 그게 하나님 맹세한 바의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도 있고, 거기에는 이삭도 있고. 거기에는 누가 있고, 야곱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그리고 다시 부활한 사람들은 이 땅의 몸이 떠났으니까 이 땅의 몸 같지 않고 그 때는 천사의 몸과 같을 것이다. 주께서 친절에 친절의 극을 더하시면서 친절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셨는데 왜 우리는 그것이 화들짝 감사하지 않지요. 왜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자아가 있으면 자아에서 내뿜는 게 있어요. 내 뿜는 게 억지인데, 억지스러움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고 일종의 고슴도치가 가시를 뿜는 것처럼 계속해서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찌르고 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예수님도 하나님도 같이 찌르고 하지요.

이러한 모습이 될 경우에 여기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이게 없어요. 감사가 누락됩니다. 감사가 없어져버립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뭐냐, 맹세를 하게 되면 감사가 없어져버려요. 감사가 없고 미흡함과 동시에 불만이 여기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맹세 안에. 그래서 맹세는 감사를 제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것으로나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인간 자체가 거대한 공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설친다고 공간에 취지가 달라지거나 변동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어떤 자기 영역을 자기 창고 같은 걸 만들어놓고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계속 싸대니까 설쳐대니까 여기서는 뭐냐 하면 밀폐된 메아리 속에 스스로 자기가 놓여있어요. 자기 공간이 밀폐돼 있을 때는 여기는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걸 몰라요. 늘 떠난다는 것. 내 존재의 몸과 이별해야 된다는 것을 이걸 자꾸 잊어버려요.

나는 나를 놓아줘야 된다는 사실을 이게 분명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자꾸 놓쳐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가 자아성이 있으면 자아성은 결국 무얼 유발하느냐 하면 소유권을 유발해요. 자꾸 소유하려합니다. 그런데 자아성의 반대말로 하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으면 소유권이 아니고 뭐냐 하면 사용권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유재산 소유권을 주려고 한 게 아니고 사용권을 준다는 거예요.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살게 하겠다. 이리 되는 거예요. 주님이 있는 곳에 살게 하겠다, 이 말은 주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주님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마련한 인생에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인공은 따로 있고, 주인공은 따로 있는 데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그 안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조건하에 거기서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거. 그러면 이 세상에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뭐냐 하면 자기의 소유권을 자랑하게 되어있어요. 소유권을 갖게 되어있다고요. 소유권을.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보이지 않는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소유권이 아니고 사용권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땅 사용은 대를 위해서 물려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대질해보면 완전히 차이가 나지요. 완전히 차이가 확실히 나면서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은 왕이 없고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지파중심이라 해요. 지파중심. 지파중심인데. 지파중심이라고도 하고 아니면 지파평등주의라 할 수 있어요. 지파평등주의에요. 그런데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이 지파평등주의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군주제로 바뀝니다. 군주제. 군주제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왕을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왕이 등장해요.

왕이 등장하게 되면 백성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데 왕만 하나 뽑아서 우리를 위해서 봉사할 것이다. 이렇게 순진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사무엘상8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왕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아무 다친 게 없고 그냥 왕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너희의 자녀와 너희의 좋은 포도주와 그리고 너희의 포도원과 십일조 이런 것을 다 강탈해 갈 것이다. 라고 미리 이야기했거든요.

그럼 강탈해 가면 평등주의가 뭐로 바뀝니까? 평등주의가 깨지겠지요. 깨진다는 말은, 평등주의가 뭐냐 하면 사용권이 날아가 버리고 소유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아까 위기 준다고 했지요. 이게 집단적 위기인데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을 때는 위기가 찾아오고 이 위기는 자연적인 가뭄과 기근으로 찾아오고 전쟁으로 찾아오는데 가뭄이 되어버리면 이거 농경시대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일반백성들이 가뭄이 되어서 소출이 없으니까 소출을 못 내겠지요.

그러면 군주제라 하는 것은 군주제 밑에 왕만 있는 게 아니고 곧 한 그들의 패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전쟁하는 귀족들이에요. 군인들. 군인들이 땅을 차지하게 되면 그걸 가지고 왕이 거기서 니 땅 해가지고 세입자 되어버려요. 그러면 땅이 넓어지겠지요. 땅이 넓어지게 되면 이건 뭐냐 소유가 늘어나겠지요. 소유가 늘어나게 되면 이 소유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농민들이 여기에 부자의 곡식을 빌리러 오겠지요. 고리로. 이자 맞춰서. 그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빈부격차가 심화되겠지요.

이게 왕제도가 되면서 왕은 또 왕제도하면서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건축을 많이 해요. 토목사업. 하다보면 여기서 토목사업하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인부들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인부들이 수당을 받고 임금을 받고 일하다보면 자기는 토지를 떠나버리고 간다고요. 또 전쟁할 때 군인들이 가요. 그러면 토지는 누가 짓습니까. 소는 누가 키울 거예요? 소는 제대로 못 키우지요. 못 키우니까 소출이 없지요. 소출이 없으면서 여기 이 땅의 진짜 주지들, 그걸 부재주지라 하는데. 부재주지 같으면 소득세가 60% 띱니다. 도시에 있는 주인은 도시에 있고 농촌에 임대차해서 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떼어가 버리면 그럼 점점 더 가난해지겠지요.

이 자체가 집단적 위기에요. 위기가 온다했지요. 이스라엘이 세상나라처럼 되니까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그러면 위기가 찾아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우상. 우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맹세가 빠진 게 우상이에요.

자꾸 우상하니까 전에 제사지내고 부처섬기고 점치고 그게 우상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한 그 맹세가 빠진 게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상이 뭐예요? 기독교가 우상이고, 교회가 우상이지요. 그러면 인간들의 한 맺힘이 오잖아요. 내 자아를 키워주세요. 하고 오잖아요. 내 자아를. 그리고 금요일 되면 방석 딱 깔아가지고 커피 딱 준비하고 뭐해야 됩니까? 맹세할 준비하잖아요. 맹세.

자, 맹세라 하는 것은 뭐가 생긴다? 자아성이 생기는 거예요. why me? 하필이면 저를 이렇게 이따위 식으로 인생을 꼬라박게 하시겠습니까? 펴놓은 대드는 시간을 마련한 건데. 하나님 앞에 데모하는 시간을 마련한 거예요. 최저임금 인상하라고. 이리 못살겠다고. 솔직히 말해서 니가 뭔데 내 인생을 조지느냐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이면 다냐? 그걸 이제 순화해가지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노골적으로 깨놓고 “니 왜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내 인생 조저 놨잖아요. 내 인생.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항의할 데 없어서 주님께 항의합니다. 빨리 기도응답해서 원상회복하라고요.” “그리고 주님의 기도응답조건으로 내 압니다. 야고보서1장 안양공부 때 했습니다. 의심치 않고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그거 내 의심 안합니다.” 그 자체가 벌써 의심이에요. 의심 안하겠다는 자체가 의심이라. 꿍꿍이속이 딴 데 있어요.

“주여, 맹세라는 그러한 무빙, 그러한 움직임에 그러한 홍수에 내 몸을 던집니다.” 이게 아니고 내 것 다시 찾아주세요. 내 인생 찾아내놓으라는 거예요. 주님의 목숨이라 하는 것은 잠시 허락한 거잖아요. 잠시. 잠시 허락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고, 니는 없어질 말씀에 비해서 비현실로 계속해서 사라져야 된다는 것을 대비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잠시 목숨을 준 거예요. 내 목숨 자체가 없습니다.

주께서 내일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로서 끝이에요. 여러분, 마트에 계산할 때 앞에 손님하고 뒤에 손님하고 뭐로 막습니까? 막대기로 딱 놓고 이 쪽 사람 저쪽 사람 물건 구분하잖아요. 그게 매일 매일 우리 구분 짓는 거예요. 오늘은 오늘치의 말씀에 허락한 인생, 내일은 내일치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허락한 인생이 따로 있어요. 섞어버리면 니거 내거 분간도 안 되잖아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주님의 맹세에 흠집 내지 말라는 거예요. 니 오기와 니 독선과 니 자아성 때문에 흠집 내지 마라. 흠집 낸다고 흠집 날 나도 아니다. 오히려 니가 힘들어질 뿐이다. 이 말이지요. 맥시코 선인장 맨발로 한 번 뒤로 차보지요. 가시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니까 하나님이 하신 비유가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뭡니까? 니가 가시채로 니가 그냥 맨발로 하면 니만 아프지, 내가 아프냐 이 말이죠. 니가 왜 그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느냐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떠났어요. 하는데 주님을 떠날 수가 없어요. 구원 아니면 저주, 그 주님의 품을 주님의 맹세에서 못 떠난다고요. 그들이 그 예수 복음 안 믿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못 믿게 한 거예요.

마태복음11장 한 번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를 안다는 거, 예수님을 안다는 거, 그것은 창세전에 이미 야곱처럼 사랑받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을 지금 제대로 하고 계신 거예요. 자꾸 성도라는 이름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교회는 뭐 달랑 3가정 돼가지고 이제 한 가정도 달랑 달랑 이제 나중에 헤어지겠다 하는데, 무슨 교회가 그런 교회라 하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집합이기 때문에 니 교회, 내 교회 없어요. 교회는 오직 몸이 하나요, 몸이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가 한군데 밖에 없는데 무슨 내 교회가 또 있겠어요. 그 내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좌석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자꾸 내가 설교해서 얼마 몇 명 더 오는가 하는 것은 테스트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과연 신자인지 아닌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자꾸 측정을 하다보니까 마귀처럼 자꾸 주님한테 기도하고 맹세하고 맹세한 거 기도응답 됐나 들춰서 확인해보고 계속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모든 실없는 짓 이유가 뭐냐, 떠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정들었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지옥 가는, 지옥가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주님은 지옥 가는 나를 선악과 따먹고 지옥 가는 나를 생명나무로 나를 건지려하는데 우리는 어디에 정이 들었느냐 하면 선과 악을 논해서 내가 착한 인간이 되는 게 그게 버릇이 들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 되는 거, 착한 사람 되는 걸 놓지를 못해요.

지난 수요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수요설교 때, 젊은 애들이 지는 안착하면서 착한 아가씨와 착한 총각원한다고요. 지는 안착하면서. 착할 마음 추호도 없으면서. 무조건 착한 남자, 착한 여자를 찾고 있다 말이죠. 왜 그래요? 자기한테 순복, 순종하라고. 자기한테. 자기는 주님한테 순복 안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아버지의 아들과 아버지의 계시 외에는 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못 보고 못 오게 하시는 그것이 이미 맹세 안에 포함됐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함부로 보고 함부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성경 말씀이. 인간은 누구나 자아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 위주를 스스로 자기 위주를 벗겨낼 수 있어요. 못 벗겨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금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반하던 관계없이.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거죠.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90712a야5장12절(맹세) -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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