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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11:39:27 조회 : 149         
197강-창 50장 22-26절(몸의 이중성)19072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197강-창 50장 22-26절(몸의 이중성)1907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 22-26절입니다. 구약성경 80페이지입니다.

창세기 50:22-26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110세까지 살다가 죽는 대목입니다. 죽어버리면 요셉은 이제 사라지는 겁니다. 요셉이라는 인간은 사라졌지만 요셉을 요셉 되게 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활발하게 일을 하실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본질은 뭐냐? 어떤 일을 하시고자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후손들에게, 요셉의 남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두 종류의 땅입니다. 현재 이들은 애굽에 거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처럼 애굽에 거하는데 그 애굽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살기 힘들다, 어렵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너희들이 어떻게 편하게 사느냐가 원래 하나님이 너희들 찾아온 목적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자기 백성을 특정 공간에 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 계획은 요셉이 죽는다 할지라도 일관되게 계속 추진되어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사는 그 공간이 여기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24절에 보면,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끄집어 내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쉽게 해서 약속의 땅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없는 땅, 없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는 없는 땅, 없는 세계입니다. 약속되었기에 비로소 그런 땅이 있는 줄을 제대로 아는 거예요. 약속되었기에 비로소 아는 거지요. 그러면 약속이 없는, 약속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고 믿지 않는 사람한테는 그 땅은 없는 땅이에요.

그 땅이 없어져버리면 땅은 두 종류가 아니고 달랑 한 종류가 되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서 살다가 내가 죽는다. 끝. 그게 전부지요. 우리는 어느 쪽에 익숙해져 있느냐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조상대대로 우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족보를 들춰보자는 말이지요. 어디에서 출생해서, 어디에서 사시다가, 어디에서 돌아가셨다. 끝.

그런데 그 사신 것이 화성일까요? 달나라일까요? 금성일까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다 끄집어낼까요? 아니에요. 그들은 지구에서 태어나서 지구에서 마감되는 겁니다. 지구라는 단일 땅, 오직 하나의 땅 뿐이에요. 그리고 그 이상 다른 땅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외계인 같으면. 안드로메다에 묻힐 수가 있겠지요. 외계인 같으면.

그러나 족보에 ‘이 사람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안 씨다. 안드로메다에 묻혔다.’ 그렇게 되는 족보는 없고요. 전부다 이 지구 안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민족, 우리도 이방민족이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민족은 누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민족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땅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하나의 땅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른 땅이라 하는 것은 애초에 입 밖에 끄집어내면 안돼요.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땅이니까. 그런데 여기 보니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한테는 약속의 땅이라는, 다른 민족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약속의 땅이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땅의 이중성이지요. 땅은 땅인데 이 땅 말고 가자. 갈 때 어떻게 가는가? ‘너희들은 가지 못한다. 너희들이 알아서 나오너라.’가 아니라 내가 지시해서 하나님과 동행해서 가야 비로소 그 땅에 도착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지요.

너희들의 지혜와 그리고 너희들의 협력으로 정복되는 땅이 아니라는 거지요. 가 봤자 그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목숨 바쳐서 가도 그 땅에 갈 수가 없어요. 그 땅은 주님이 친히 이끌어줘야 돼요. 그러면 이끌어준다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가 25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해골을 메고 올라간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은 죽었지만 요셉을 죽여서 요셉을 살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땅의 이중성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몸의 이중성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고 다른 민족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몸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중첩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몸이 죽으면, 흙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지 어떻게 몸이 이중성을 갖고 있느냐? 이 몸 말고 딴 몸이 있느냐? 이 몸 말고 딴 몸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죽여서 요셉을 살리는 겁니다. 요셉의 몸이 두 개가 되어버렸어요. 원래 눈에 보일 때는 겹쳐져 있어서 몰랐는데 요셉이 죽고 나니까 요셉을 죽여서 요셉을 살려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보통 사진 찍을 때 보면 원판이 있고, 인화지에 현상을 하게 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진이 되지요. 원판을 현상을 하니까 우리가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사진이 나오는 거예요. 사진은 사진기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사진기에는 원판이 들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하나님의 언약의 대표자로서 주께서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찾아온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원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시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뒤끝이 있어요. 인간은 잊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창조의 원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원리가 뭐냐? 나무가 두 종류였어요. 그것도 중앙에. 하나는 선악을 아는 나무, 또 하는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가 에덴동산의 중심에 박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일단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 나무의 들러리에요.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아담과 하와의 빌라가 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에덴동산 중앙에 나무 두 개가 있어요. 그것도 특별한 나무지요. 다른 나무도 많지만 거기에 특별한 나무 두 개가 있습니다. 나무의 이중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지요.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 때부터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일관된 일에 말려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죽은 자가 되고, 인간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큰 문제 아니에요. 인간이 죽었든 살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은 계속 추진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하면, 그 이중성을 통해서 왜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중앙을 차지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개의 나무가 다 있어야 하나님이 만든 동산의 취지를,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느냐?

인간만으로는 왜 안,되고 나무가 왜 인간을 대신해서 그걸 보여주느냐? 그 뜻이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기에는 선악과나무가 없고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23절에 “다시 저주가 없으며” 다시는 저주가 없다고 요한계시록 22장 3절에 나온 것은 하나님의 하는 일에 그 뒤 배경, 세팅된 연극의 무대장치는 항상 하나님의 생명이냐, 저주냐, 그 사실을 하나님은 치워본 적이 없어요. 저주냐 아니면 생명이냐? 생명이냐 저주냐? 항상 그 환경 속에서 인간을, 왜 저주는 저주여야 되고 왜 생명은 생명이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활용함으로서 나무의 이중성이 이제는 땅의 이중성으로 되었지요. 땅의 이중성에서 이제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몸의 이중성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몸의 이중성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 하면, 땅의 이중성 또는 나무의 이중성이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땅의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몸의 이중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보내서 그 사람을 언약 맨, 언약사람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가 나오는데 노아하고 그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누가복음 17장 26절에서 27절에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고 되어 있어요.

28, 29절에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 관점을 이렇게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노아 입장에서 그들이 멸했다고 보지 마시고 그들 입장에서 노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그들 입장에서.

그들이 각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으니까 그들이 각자 직업이 있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직업 중에는 의사도 있고, 판사도 있고, 전당포 주인도 있고, 고기 잡는 사람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까, 또 대장간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그 직업을 통해서 노아가 만들고 있는 그 방주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연결점이 있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나는 의사인데 옆집의 노아아저씨는 뭘 하지?” “뭘 만들고 있대.” “뭘 만들지?” “글쎄. 잠수함 같기도 하고. 핵잠수함 만드나? 배 같기도 하고. 유람선인가?” 도대체 연결이 안돼요. 이쪽 세계에서 노아가 하는 일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적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이미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방주를 만드는 순간 그 다음부터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몸의 이중성은 죽음의 이중성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해요. 구원 받은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한 번 죽어야 되고, 그 다음에 진짜 늙어죽어야 되고, 그 두 개의 죽음을 거쳐야 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은 몸의 죽음밖에 몰라요. 죽어서 장례 치르고, 화장터에 가서 벌건 불에 집어넣어서 다 태우는 것, 그것밖에 몰라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어떤 근거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노아가 뚝딱뚝딱, 배인지 잠수함인지 뭔지 구분도 안 되는 이상한 배, 그러니까 노아 당시에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것, 실용성이 뚝 떨어지는 것. 배 만들어서 어떤 놀이동산을 만드는가요? 아무데도 쓸모없는 거예요.

쓸모없는 것에 노아는 몰두하고 있고 거기에 자기의 목숨과 자기의 미래를 다 걸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의사도 있고 판사도 있을 것인데, 농사짓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은 어디에다 자기의 정욕과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정열과 열정을 쏟아 붓습니까? 내가 하는 직업에다 다 쏟아 부은 거예요.

장사꾼들은 사고팔고, 신혼 같으면 시집가고 장가가고, 농사짓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양파 농사짓고, 생강농사 짓고, 강냉이 농사짓고, 고기 잡는 사람은 고기 잡고, 공무원들은 공무에 열중하면서. 그게 사는 것이고 그게 바로 이 몸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노아를 볼 때 노아는 이미 격리당한 상태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대화가 안 통하니까. 언어가 안 통하니까 죽은 자지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이미 그들은 갈라섰다. 갈라선 것을 성경에서는 거룩이라 하는데 그걸 제 설교로 하면, 이미 그들은 갈라섬으로서 각자가 스스로 저쪽 세계에서는 이 쪽이 죽은 자가 되고 이 쪽 세계에서는 저들이 죽어야 될 세상에 살고 있는 겁니다.

땅의 이중성이 몸의 이중성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홍수가 나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홍수가 나니까 그들은 아까 누가복음 17장에서 본대로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언약 안에서 노아가족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볼 때에 노아가 산 것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서는 노아가 일찍부터 이미 죽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에 의해서 일단 먼저 죽은 사람이 언약에 의해서 산 사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찾아와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으로 미리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생명나무,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이중성이거든요. 나무의 이중성을 주께서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나무의 이중성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은 몸의 이중성으로 그걸 인식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류의 역사는 뭐냐?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이러한 언약에 의한 죽음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지요. 창세기 4장에 아담에게 자식이 두 명이 있는데 하나는 가인이고 또 하나는 아벨입니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요. 오늘날의 정의로운 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죽인 자, 살인을 한자는 죽이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찾아왔으면 아벨 죽인 가인을 죽일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데,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은 죽어도 죽인 당사자 가인은 하나님이 죽이지를 않습니다. 오래오래 살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땅의 이중성 때문에.

너는 이 땅에서 오래 살아도 그것은 이미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 돼요.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처지라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것이 돼요. 그러면 가인은 왜 살아야 되는가? 죽은 아벨의 죽음을 살려내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 이 땅에 살려내야 되는 겁니다. 그 땅, 가인의 땅 자체가, 인간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찾아온 진정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를 살려내고 그것을 영원히 고정화시키겠다는 계획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그러한 삶일 뿐이라는 겁니다.

문장이 굉장히 어렵지요? 이걸 설명하면 더 어려운데 감당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취지뿐이에요. 두 개의 나무가 갖고 있는 취지, 그 취지를 살려내는 것, 그 취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살려내기 위해서 가인의 민족, 인류의 역사를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그 취지가 살아나는 것과 인간의 역사가 살아나는 그 틈새에서 죽음이라는 것,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죽었던 그 죽음의 흔적을 그들은 계속해서 유발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인간의 역사는 진행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하나님의 취지는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이 돼요. 뭘 로?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 받은 자의 억울한 죽음을 그 안에 계속 심어두는 겁니다. 계속 그걸 끌고 가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요셉의 해골을 하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겁니다. 요셉은 죽었지만 요셉의 이중성, 육의 몸의 죽은 것 말고 언약에 의해서 살아있다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는 요셉의 해골에 하나님께서는 집중 거기에 주목해서 하나님의 일의 핵심, 구심점으로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해골을 포기를 못하는 양상으로 역사 속을 긁어가고 있는 겁니다. 흠집을 내고 있는 겁니다.

애굽사람들 입장에서는, 저들이 살다가 우리나라에서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땅이 두 군데에요. ‘땅이 두 군데라면, 우리는 애굽 땅에 살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겠지.’ 애굽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기들은 여기에 있고 그들은 저기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땅의 이중성이 아니에요. 그것은 같은 평지의 연속성이에요. 바로 옆 동네다 그 말이지요.

500킬로 정도 떨어져 있지만 옆 동네라 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제가 설교 처음에, 땅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한테는 없는 땅이에요. 없는 요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셉은 살아 있는 겁니다. 요셉이 없어졌다고 다들 여기기 때문에 유일하게 요셉은 살아 있는 거예요. 물론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노아 당시의 사람들의 일상은 먹고 마시고 굉장히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입장에서 노아는 이미 내놓은 사람이에요. 그는 이미 죽은 거예요. 있으나 마나한 거예요. 무슨 일을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기 때문에. 왜 저런 짓을 하지? 자기 돈 들여서 왜 저렇게 잣나무 끊어서 배를 만들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기 때문에 땅의 이중성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무엇이 진정 살았느냐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누가 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를 표현하고 발현할 수 있는 몸을 지녔느냐? 그게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성도는 몸의 이중성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도바울의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아, 참, 이런 대목 읽을 때 마다 목사가 교인들에 큰 실례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아닌데 다른 교회들, 그 사람들 복 받으러 온 사람들이에요.

성경 알려고 온 사람들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사업이 안 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있다든지, 애가 수능을 앞두고 있다든지 자기 앞에 중차대한 무슨 일이 있으면 절에 가서 비는 것보다도 가까운 교회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 어릴 때 교회 가서 크리스마스 때 빵 한 조각 얻어먹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죽어서도 천당 가는 것이 낫지 도까지 닦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교회 가서 고대하고 기대하는 것이 뭐냐? 사주팔자 보듯이, 관상 보듯이, “저 앞으로 장래가 어떻게 되겠어요?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아니면 지옥 가겠습니까?” 부채도사에게 찾아오는 것처럼 그런 것이 궁금한 거예요. 성경이 궁금한 것이 아니에요.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시겠나이까, 하나님이여.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헌금하라면, 십일조 하라면 할 테니까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겠습니까?” 하는데 로마서 7장에서 너는 이미 율법으로 죽었다는 거예요. 율법으로 죽지 아니하면 너는 영생은 없다는 겁니다. 네 몸은 지옥 가서 살 것이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우리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유일한 세상, 즉 이것뿐이라면 우리는 사기를 당하고 진짜, 쌩깐다고 하지요, 진자 뒤통수 제대로 맞은 거예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예수님 부활이 없다면 사기를 당해도 엄청난, 치명적인 사기를 당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사기를 당했으면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바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아니고 땅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이 땅은 뭐냐? 눈에 보이는 땅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보이는 증거를 품고 있는, 그것을 품어내고 그것을 보여줘야 될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존재하는 거예요. 아벨을 죽인 가인을 살려놓은 이유는 가인이 살아서 민족을 퍼트리고 역사를 이루어야, 그 역사 한 가운데 그 역사가 결국 노아에 의해서 심판받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벨을 죽였던 가인, 그리고 그 가인의 품성을 닮은 그 후손들의 생각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무엇이 중요하냐? 하나밖에 없는 이 몸이 어떻게 죽고, 죽어서는 어디에 가느냐는 그것이 관심사에요. 그러나 몸이 하나밖에 없을 때는 그 생각이 맞는지 모르지만 몸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언약으로 준 몸이 있고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몸은 하나가 아니고 하나님의 기능상 내가 어떤 몸이 두 개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으로 다가가게 되면 내 몸은 이중으로 기능하게 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 만약에 성령이 와서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요, 라고 세상을 향하여 외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언약을 받은 노아가 “여러분, 지금 내가 만드는 배가 결국 우리를 살려낼 겁니다. 왜? 결국 마지막 심판에서 이기는 것은 이 배에 올라타는 것뿐입니다.”라는 말을, 노아가족 외에는 아무도 못 알아듣는 그 말을 노아가 배를 만들면서 증거 해야 되는 것처럼 똑같은 기능을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입니다. 로마서 7장 4절. 그리고 우리에게 또 하나의 몸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성령에 의해서 살았습니다. 그걸 듣는 사람이, 만약 그걸 듣는 사람이 물리학 교수고, 화학교수고 그걸 듣는 사람이 철학박사라면 뭐라고 하겠어요? “살았어, 죽었어?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그렇게 하겠지요.

만지면 “너의 이 몸이 지금 죽었다는 말이야, 살았다는 말이야? 왜 헷갈리게 만들어? 같은 인간의 말인데 왜 못 알아듣게 만드는 거야? 약 올리려고 하지? 결론적으로 말해서 죽었다는 말이야 살았다는 말이야?”라고 하지요. 그러면 성도는 “함부로 만지지마. 이 몸은 이중성이 있어.” 그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어요.

이 몸을 가지고 살았다는 몸도 되고 죽었다는 몸도 되고, 그렇게 양쪽으로 사용해줘야 그래야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지옥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땅이라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체포될 때, 십자가로 가기 전에 미리 당국자가 빌라도에게 부탁한 것이 있어요. “저 예수라는 작자의 발언에 의하면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는데,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겠지만 혹시 제자들이 그 말을 조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시체를 훔쳐갈 가능성 있기 때문에 예수의 무덤에다 파수꾼을 세워놓아라.” 하고 당부를 했어요.

아주 치밀하게 단속을 잘한 거지요. 유언비어가 퍼지지 않도록 사전에. 왜? 그들은 몸이 하나도 땅도 하나기 때문에,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중성을 이야기했다고요. 내 몸은 이 땅에서 죽지만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했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부활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완전히 사기꾼들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사기꾼의 집합이에요.

박사들이라는 사람들, 물리학 박사, 화학박사, 철학박사, 우주천문학박사,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영재발굴단>에 나와서 공부 좀 하고, 수학 잘하고, 과학에 관심이 있다 하면 다 물어봅니다. “너 커서 뭐할래?” “저는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 박사가 될래요.” 지옥이나 가라. 마태복음 28장 11절에 보니까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입을 단속시키는 거예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것도 밤중에. 어떻게 말을 맞췄느냐 하면, 13절에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그러니까 “근무태만으로 밤에 잠을 잘 때 깨보니 제자들이 도둑질을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과연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퍼뜨려라.”

돈을 받은 이유는 이게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받은 거예요. 진짜 사실 같으면 돈 안줘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자는 척 하다가 실눈 떠 보니 제자들 두 명이 와서 시체 낑낑대면서 끌고 간 것 다 아는데 이것은 돈 안 받아도 제자들이 가져갔다고 이야기했을 거예요.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이중성을 모르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언약이 안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이 역사는 뭐냐? 예수님의 빈 무덤이 이 역사의 실체를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똑똑해도 예수님의 무덤이 왜 빈 무덤인가를 설명할 길이 없는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 갔느냐? 그들이 설명할 수 없지요. 항상 우리 입장 말고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야 돼요. 그들 입장에서 봤을 때 예수 십자가 부활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설명은 안 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그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성령 받은 성도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미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라고 나서니까, 너희들은 지금 율법에 의해서 죽은 시체를 보고 있다고 하니까 그들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시체가 말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말이 안 되지요.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도바울은 또 다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게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입니까? 이걸 요양병원에 가서 이야기해보세요.

여러분, 병원에서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 때만 죽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태어나서 살았던 모든 경우들이 그 병원에 집결해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린 거예요. 왜? 죄 값은 사망이니까. 사람은 죽으면서도 죄로 죽었다는 것을 몰라요. 본인은 이중성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왜 죽었느냐 하면, 브레이크가 파열되어서 파 캐러 가다가 죽었다. 음주운전에 치어죽었다. 세월호 물에 빠져 죽었다. 연탄가스에 죽었다.

죽은 이유가,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그 쪽 입장에서는 기껏 그것밖에 내놓을 것이 없어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어요. 이게 창세기 2장, 3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악과의 취지, 먹으면 죽는 선악과의 취지와 따먹으면 사는 생명나무의 취지, 그 두 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의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살리고 죽이고, 하나님께서 맘대로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 이중성을 성도만이, 언약을 아는 사람만이 알고 있지요. 요셉은 이야기합니다. 죽기 전에, 내가 죽어도 약속의 땅으로 너희들이 떠날 때 내 뼈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이 구성될 것이다. 내 뼈 중심으로, 내 죽음 중심으로. 애굽은 살아 있는 바로 왕 중심으로 굳혀진 나라에요. 북한은 김 정은 지도자 중심으로 뭉쳐진 나라에요. 한국은 태극기 중심인지 촛불중심인지 모르겠지만. 양분되어 있고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은 요셉 뼈다귀 중심으로 뭉친 나라에요. 왜냐하면 그 뼈다귀가 아니면 그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거든요. 가나안 땅은 존재하는 땅이 아닙니다. 거기는 이미 주인들이 있어요. 그 주인이 추방되어야 추방되고 난 뒤에 등장하는 나라가 약속의 땅이거든요. 무슨 힘으로 추방합니까? 요셉의 뼈로 추방하지요.

다시 말해서 요셉의 뼈는 이 세상 보기에는 죽은 뼈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살아 있는 일의, 활동의 흔적이 되고 유일한 증거가 요셉의 뼈입니다. 처음에 나무의 이중성에서 그 다음에 땅의 이중성을 설명했습니다. 애굽 땅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몸의 이중성 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미리 죽은 자만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지금 살아 있다. 몸의 이중성이에요. 그 다음에 이중성이 뭐냐 하면, 역사라는 이중성이에요. 역사라는 것이 뭔가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된 것 같지만 그 속에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억울한 죽음의 흔적을 증명하기 위해서 역사는 파멸의 길을 가고 있어요.

그 역사의 이중성에 의해서 그 다음에 있음과 없음의 이중성이에요. 다른 말로 있음의 이중성, 있음과 없음의 대조,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미 죽어 없는 요셉이 바로 애굽을 이기잖아요. 애굽의 권세를 이긴다고요. 하나님의 유월절의 죽었던 어린양의 피가 바로왕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이지요. 이미 죽어 없어진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이기고 죽었던 우리의 몸을 다시 부활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작업을 위해서 이 땅에 율법을 주셔서 어떤 인간도 율법 앞에 살았다 할 수 있는 아무도 없게 만들었어요. 이미 이 몸 자체가 율법에 의해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율법이 따라와서 ‘너 죽인다’하고 따라오니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십계명에 의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건덕지가 전혀 없어요.

어떤 법도 죽어 마땅함뿐이에요. 그런데 그 죽어 마땅한 것을 누가 사용하느냐? 그 율법을 주신 분이 우리를 사용하다 보니까 죽어 마땅함을 위해서 우리는 안 죽어야 될 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영생토록 살아야 될 몸이 되는 겁니다. 문장 어렵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 나오는 거예요.

자, 여기 이 땅에 교인들 많은데 전부 다 복 받으러 가는 교인들이에요. 하여튼 2장 11절, 그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할 거예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인간이 복을 받겠다는 것은 이 하나밖에 없는 몸을 복되게 만들겠다는 시도로 교회 온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 몸 포기하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내 몸을 살리겠다는 그 몸을 포기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쓰실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평생 살면서 얼마나 출세하고 성공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율법에 죽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살게 하는 그 기능에 참여케 하는 이것보다 더 큰 승리, 이김이 없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내가 내 인생 손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내 인생 관리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용도로 사용해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를 끝내면서, 오늘 끝나거든요, 창세기를 끝내면서, 창세기 1장을 다시 보자는 말이지요. 인간이 먼저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었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기의 창조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만든 동산이 에덴동산이잖아요.

창조의 뿌리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인간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창조는 두 나무, 생명나무를 위해서.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 그 생명나무가 어디 있느냐? 어린양,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나무가 살아나잖아요. 창조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창세기는 1장부터 50장 이 시간까지 계속 이어져 온 겁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뭐냐? 요셉의 뼉다구. 요셉의 몸의 이중성. 언약으로 죽은 자만이 이렇게 하나님이 계속 활용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속 활용하시는 대상자로의 요셉은 죽어서도 일한다. 아니 요셉은 주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다시 지금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중성이니까, 이 몸은 후딱 죽어도 언약에 의해서 다른 준비된 몸이, 주님의 부활의 몸이, 사망을 이긴 몸이 바로 영원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살면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식으로 하나님의 힘이나 이용해 보려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 예수 찾지 않았습니까? 주여, 주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약속을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활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7강-창 50장 22-26절(몸의 이중성)190724-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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