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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5 10:59:01 조회 : 119         
[몸을 지키는 자아]-송민선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2.165.48.239)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사람은 하나님같이 지혜로워진 것이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워졌다. 사람의 지혜는 결국 사단이 인간의 몸이라는 거처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통제하고 지시하는 정신 구조이다. 뱀처럼 지혜롭기에 아담과 여자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응하는 주체로 인식했다.(창3:10) 아담이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는 그것이 이미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고, 죽었다는 증거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는 그것이 곧 죽은 모습이다.

아담이 죽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는 그 아담은 누구일까. 아담은 자신을 호출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두려움을 느끼며 숨었다. 그 두려움은 아담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아담아, 누가 너에게 나를 상대하라고 하더냐?”(창3:11)

본래 아담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가 만들어낸 관계망을 통해 그가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통되었다. 뱃속의 태아는 엄마를 인식하지 않아도 엄마가 먹는 것을 동일하게 먹고, 엄마가 행하는 것이 동일하게 끼쳐진다. 엄마만이 뱃속의 태아를 인식한다.

어느 집을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이상한 화장실 문을 보았다. 고장 났지만 고장 나지 않은 양면성을 가진 문이었다. 바깥쪽에서 보면 손잡이도 없고 고장 났기에 쑥 밀면 그냥 열려서 자유롭게 들어가면 된다. 들어갈 때 약간 걱정은 든다. 아무나 막 밀고 들어오면 민망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고 안쪽은 문이 멀쩡해서 내가 스스로 그 문을 통제할 수 있었다.

마치 아담이 자유롭게 선악과를 따먹은 듯이 보였으나, 선악과가 아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담은 선악과 안에 도리어 갇혔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누구나 손이 닿는 곳에 무방비 상태로 있어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지만, 막상 따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완벽히 갇히게 된다. 누가 갇힌 것일까. 악마는 인간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것이다. 아담의 몸은 하나님의 원수가 받을 형벌이 왜 타당한지를 발견해 내는 증거 채취실이 되었다.

일단 선악과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인간의 눈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기에, 주변의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을 수 없는 것이 지당하다. 고장 났음을 경유할 재주가 없어서 ‘나’를 열고 나갈 일이 없다. 나에게 쓸모없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다. 변기에 레버가 있어도 내 자아가 필요치 않으면 물을 내리지 않고, 이동식 좌변기에 레버가 원래 없어도 내 자아가 필요로 하면 끊임없이 찾는다. 나는 자아가 필요로 하는 것만 원하고 찾는다.

하나님을 대신 상대해 주실 분이 안으로 들어와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갇혔음이 드러날 수 없다. 갇혀있음 자체가 죄만 만들어지는 구조인 것을 알지 못한다. 갇혀있는 자들은 진짜 죽음의 의미를 모르니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이 모든 일조차 제대로 죽으신 분의 대신하심이 없이는 지금 이것을 알고 말하고 쓰는 것이 마귀이다. 말하는 자는 본인이 주체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지혜와 지식은 마귀에게 통제받는다. 십자가, 말씀, 복음도 마찬가지다. 사단의 복제품이기에 불순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엡2:2~3)

마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성령의 계시는 인간의 머리를,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마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머리에서 알고 있다는 모든 과정을 무너뜨리는 것부터 시작하신다. 고린도후서 10장의 말씀대로 정말 무너지고 있으니,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현상에 기뻐하면 되는데, 그 기쁨이 나를 경유하면 불가능이 된다. 저주받을 자리로 먼저 옮겨주시는 것이 주의 사랑인 것을 아는 일은, 문을 열고 나가는 것만큼 쉽지만, 자아는 결코 스스로 문을 열지 않는다.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다면 인간은 마귀 하수인으로 모조리 지옥행이다.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내가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원래 닫힌 문 사이로, 문고리 사이로 비집고 흘러들어온 끈적끈적한 예수님의 보혈이 이미 안에 있기에, 문밖에서 생명이 두드리는 소리에 안에서 동일한 생명이 반응하는 것이다.(계3:20)

스스로 열어주지 않는 원수같은 자아의 문을 여시는 방법으로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사람에게 가장 큰 믿음의 장애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다.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장애물도 역시 ‘나’라는 사람이다.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만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전도가 불가능함을 깨우쳐줄 수 있다. 그 첫 전도자가 바로 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만 전도하신다. 주님의 전도방식은 주의 몸에 붙은 지체인지 악마의 지체인지를 말씀으로 갈라내는 것이다.(요15:4~7)

에덴동산에서 아담 이전에 하나님의 율법이 먼저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라고 선포되었을 때, 아담은 “정녕 죽는다”라는 벌칙이 무서워서 선악 실과를 따먹지 않은 것이 아니라, 따먹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그 의지를 가질만한 ‘나’가 인식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아담에게 자신을 ‘나’라고 인식할 타인이 등장했다. 바로 여자이다.

여자의 등장은 아담을 나로 깨어나게 하는 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나’의 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 남자와 여자는 나와 너가 아니고 나와 나였고, 둘이 아니라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상태였다. 그 결합의 증거는 이러하다. 한 몸이기에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훤히 비치지만, 투명하게 다 드러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창2:25)

이러한 최초의 연합은 장차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그리스도의 한 몸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보이다가 깨어질 표상이었다. 이 교회의 비밀(엡5:31~32)이 창세기 속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완성 또한 창세기에 미리 비쳤다.(창3:15,21) 하나님은 모형이 실상이 되는 그 지점까지 한순간도 희생의 피를 잊으신 적이 없었고, 아담과 하와에게 나무이파리나 털을 사용한 옷을 입히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를 봐야 하는 가죽옷을 입히셨다.

이렇게 뱀과 인간의 대립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이었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대립구조를 표현할 모형으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눅17:21) 이미 마음 안에 담긴 예수님의 완성된 사건을 비추는 도구로 영사기처럼 사용된다. 사람이 홀로가 아니라, 두세 사람이 각자 역할을 맡아서 사건의 구조가 형성되면서 그 사이에서 교회의 비밀이 포착된다.(마18:19~20) 눈으로 보이는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현장에서 쓰이는 몸들이 그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중계하고, 전쟁에서 발생 되는 피뿌림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기적이다. 주의 이름은 표면적으로 부르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때 비치는 낯선 광경은 분명 둘이었는데, 나와 너였는데, 서로가 부정되면서 단 한 분이신 ‘나’가 ‘피’로 함께하신다는 고백의 등장이다.(엡2:13,16) 한 몸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는 감사가, 어떤 모습으로는 기쁨이, 어떤 모습으로는 찬양의 기도가 나온다.(살전5:16~18) 이 모든 감사의 출처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서로의 안에 담겼던 말씀의 알갱이들이 ‘나’와 분리되어 주님의 한 몸에 결합하는 그곳이다.(고전10:16~17) 사람은 ‘나’가 아니고 그저 육체이고, 육체의 근본은 흙이다. 모든 말씀이 주님에게 집결될 때, 말씀에 달라붙은 흙들이 함께 딸려가고 주님의 손에서 분류될 뿐이다.

한 몸에 참여하는 모습은 마치 쪼개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는 횃불처럼(창15:17) 두세 사람이 투입되어 대립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의 발현지에서, 말씀이 쪼개진 사이를 발생시켜서 스스로 지나가고, 참여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만 비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 어느 정도로 기적인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미리 보여졌다. 얼굴만 잠시 들어서 장대 위에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너무도 쉬운 일을 그들은 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자아를 살리고자 하는 완악함이 하나님의 자비를 이겼다.

그러니 오늘날 십자가를 표면이 아닌 이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린양의 상처가 홍해 바다처럼 갈라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기적이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도록 만드시는 주님의 사건이 고마운 줄 아는 것이 기적이다. 이 기적에 함몰된 자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되는 마음에 지배당한다. 내가 어떠하다가 있을 수 없기에 남도 어떠하다는 판단이 생길 수 없다. 그저 이미 죽은 시체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는 말씀의 능력이 스스로 분별한다.

이 복음의 현장성에 말려들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고 누구보다도 나를 낫게 여기는 자기 자신이 원수로 발각되고, 부끄러워서 속히 복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마귀적 속성까지 발각당한다. 어느새 쓴뿌리처럼 자라난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는 사건을 만난다.

그런 자가 바로 나인 것을, 내가 원수인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몸서리친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피해를 입힌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로 발견되며 참담해한다.(마18:24~34) 나의 완악함이 주의 긍휼을 이긴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그리고 이런 자아의 쌩쑈에 종결을 고하는 말씀이 날아온다.

“네가 뭐길래 주님을 화나게 했다고 스스로 자책하느냐, 네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2) 이미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 있는 자들은 모든 게 가하다. 이건 되고, 이건 안 되고는 없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면 그건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으나,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주께서 친히 알곡과 가라지를 판단하시고 구별하실 일에 피조물은 손을 댈 수 없다.

모든 손을 떼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을 전하는 용도로 써주시는 주님의 사용하심, 그 자체만으로 피조물은 무한 감사만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이상의 분량을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다. 한쪽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쪽은 버려둠을 당한다. (롬1:24, 마24:40~41) 피조물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당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말씀에 붙들려 그물망으로 쓰이면서 여기저기 숨겨진 죄가 끌어올려질 때, 그 마지막 종착점에서 사람의 모든 행함은 썩어지는 자리로 가고(슥14:12), 약속이 잉태한 생명들은 말씀의 완성체인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집결되는 교통정리가, 십자가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함을 버리고 구리뱀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불가능한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이근호(IP:112.♡.48.239) 24-05-25 11:01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문이 열리는 것과 문이 박살나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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