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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5 11:05:20 조회 : 1750         
축복과 저주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축복과 저주

인간들의 타고난 죄성은 거꾸로 된 가치관을 유발시켰다. 축복을 저주로 여기고, 저주를 도리어 축복 받은 것으로 간주할 지경이다. 저주로부터의 탈출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그런데 무엇이 저주인가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강력하게 더욱 저주를 고수하는 것이 구원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마치 애굽에 노예로 살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의 의식과도 같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박하는 애굽의 권세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구출하려 온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했다.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에게 저주스러운 상황을 유발시킨 자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뒤집어 생각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들 히브리인들을 건지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도로 뒤집는 식으로 구원의 방식을 마련하셨다.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서 죽음의 세계 밖으로 옮겨 놓는 방식이다. 흠없는 어린 양을 잡으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의 세계 안에서 통하는 저주와 축복의 관점이, 생명의 세계 안에서의 저주와 축복과 뒤바뀌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압정 가운데서도 어쨌던 자신들이 살아 있어야 그것이 생명과 축복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달랐다. 그 세계의 틀, 자체를 벗어 던져 버리는 것이 생명이요 축복으로 본 것이다. 약속된 택한 백성들은 약속의 나라에서 살아야지 비약속 나라에서 살아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 자체에는 저주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저주받을 상황에 하나님의 약속민이 같이 동참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만큼은 이 저주의 나라인 애굽의 실상을 충분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죽음 상황'이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라 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현 사태를 미리 담아 내는 형태로 다가왔다. 저주받을 이 나라의 최후의 상황을 히브리인들의 가정을 통해서 명백하게 증거 되고 하고 또한 히브리인들은 그 증거를 자신의 고백으로 삼게 했다. 이러한 처참한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죽음의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고 또한 저주스러운 최후에 같이 동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현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오히려 흠없는 거룩한 죽음에 동참하여 같이 생명의 나라를 향하여 발길을 돌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내려 준 약속 안에는 현 애굽 나라의 실정이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분명하게 담겨져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은 같이 동참되어야 한다. 흠없는 양의 죽음 속으로 자신의 목숨을 실어야 한다. 구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저주 나라 에 떨어진 심판 속에서도 약속 안에 몸을 실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축복인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6:25-2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본문에서, 온 천하와 목숨이 상호 대비되고 있다. 온 천하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건지겠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온 천하를 얻는 소위 왜곡된 축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목숨 잃는다는 소위 저주스러운 상황을 도리어 축복으로 간주하겠느냐를 독촉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될 자들의 입장을 양보 없이 표현한 것이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모든 것이 혼돈과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다. 신들의 세계의 실상을 모른다. 계속 살아가야 무조건 축복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만큼은 이 세상에서 달리 사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20:22)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저주 세상에서의 탈출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온 천하를 과감하게 떠나는 생활을 신앙 생활의 기본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다. 따라서 이것과 반대되는 모든 상황이 바로 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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