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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1:56:31 조회 : 5779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2)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2)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는 표현하는 의도는, 구약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주어지는 모든 거룩과 속됨의 개념이 새 언약에서 몸을 중심으로 자기 반복되고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린도후서 6:14-7:1)

이 본문의 특징은, '배척'에 있다. 성전은 배척하는 기능을 한다.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라는 구약의 말씀이 신약 때의 성령의 기준으로 새롭게 정리된다. 구약 때에 부정했던 그 부정은, 신약 때에는, 육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인간 몸을 두고 말한다. 즉 성령이 들어 있지 않는 몸, 아직 성령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육, 이것이 더러운 것이고 속된 것이다. 새 언약과 말씀이 아직 적용되지 않는 육체를 말한다. 성령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은 인간의 선행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히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 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인간의 의로운 행위와 성령님의 행위가 날카롭게 상호 맞서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디모데후서 1:9/ 에베소서 2:8 참조)

인간들 자기 몸 위주의 사고 방식과 예수님 몸 위주의 사고 방식이 쉴새없이 씨름을 벌리는 영역이 성전으로서의 교회이며 새 이스라엘이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죽여야 되는 원칙 사이의 씨름이,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인식 아래서 항상 벌어지는 곳이 교회이다. 이 씨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자는 생겨나고 그 고난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같은 연장선 상에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사도 바울의 고난은 성도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처지를 쓰레기에 비유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린도전서 4:9-13) 사도를 이 지경으로 만드신 분은 성령이시다. 왜냐하면 오직 약속이 이미 지상에 와 있음을 고난을 통해 배태하기 위해서이다. 이 성령의 고난의 영이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성령이 있는 자는 이러한 성령의 탄식 소리에 귀기울이고 사는 자이다. 왜 성령께서 탄식하며 친히 간구해야 하시는가를 아는 자이다. 그것은 성도의 몸을 거룩한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예수님의 영에 의해 주도권을 쥐게 된 몸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된다. 하나님의 법이란, 그것을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도의 몸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2-25) 끊임없이 성도의 몸을 타고 올라오는 죄의 법을 계속 정복하고 다스리고 조절하고 억압하고 죽이는 분이 따로 계신데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9-11)

'그의 영'이 없으면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에 굴복 아니하고 할 수도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7-8) 성령이 계신 몸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몸은, 거룩한 한분의 주도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시되고 유지되는 상황이다. 그러면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더불어 계속 거룩을 유지할 수 그 근거는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이 점을 명쾌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7:22-25)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9:11-15)

히브리서에서의 성전의 모든 기능은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8:5) 이 모형 중에는 건축 구조물로서의 성전도 포함된다. 성전이라는 공간적 요소와 희생 제물이라는 문화적 요소와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적 요소가 결합되어 하늘의 실체를 모형을 담아 구약 역사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전과 제물과 대제사장이 실은 모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흡수 통합되어 온전함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5,9-10) 이 본문에서 '첫 것'을 폐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모든 근거가 사라졌다.

그리고 '둘 째 것'은 그 자체로 '첫째 것'에 대한 영원한 배척 속성이 담고 있다. '첫 째 것'은 인간의 몸이 관여되는 법이라면 '둘째 것'은 오직 한 몸, 그리스도의 몸만 관여된다. 이 뜻은 곧 여타의 인간의 몸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또한 '첫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는 바였지만 '둘째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따라서 이 '둘 째 것'을 세워서 언약의 중심체로 새 언약을 이루었다면 이 새 언약 안에는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요소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 모형과 그림자를 붙든다고 해서 의와 거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필히 새 언약의 완성을 무시하고 거부하게 되는 심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브리서 10:28-29) 여기서 '언약의 피'란 소와 염소나 양의 피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다. 이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이 피만으로서 거룩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완전성에서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이 계신 곳이 왜 새 성전이 되는가?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 내용 중에 성전 완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드러나는 계기로서 존재한다. 이는 성도 행위의 완벽성 때문이 아니라 새 언약을 이루어 내신 주님의 완전한 공로 때문이다.

성령은 새 언약을 유지하지 위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간의 몸을 다루신다. 성전이란 무엇인가? 에스겔 37:27과 고린도후서 6:16을 서로 비교해 보면,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바로 하나님이 들어 계신 몸이 성전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0-22) 예수님이 친히 모퉁이 돌로서 이미 성전에 참예 하셨다. 이 모퉁이 돌이 어떤 돌인가?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2:6-8) 성전의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성전 짓기 작업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버림을 당한 돌이다. 이같이 오직 예수님의 새언약 때문에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만이 주님의 몸된 성전에 참예 될 수 있다.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증거는 바로 십자가이다. 따라서 그 십자가와 같은 체험의 십자가 경험 속에 놓여 있어야만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6-27,33)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는, 모든 것은 버리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나라에 있는 본래의 성전에 들어가는 성도의 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신 영원한 왕과 그리고 성령이 계시는 성전에 들어가려면 기존의 몸을 포기해야 하고 주님의 몸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주님의 몸만이 유일무이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옛 몸과 새 몸의 교체는 성령 안에서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하여 적용시키므로서 이루어진다. 성도의 몸이 어떻게해서 성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육의 몸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하다.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다.(요한복음 1:32) 이 영과 몸의 관계가 어떻게 성사되며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가?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서 예수님의 몸을 약속을 성취하게 하시는 몸이 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성도의 몸도, 새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하고 당하신 것과 동일한 상황을 맞게 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한복음 15:19-20) '약속'을 위한 고난의 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약속'이라함은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곧 성전이다.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넘겨진 자만 통과되는 곳이 교회이며 성전이다. 그 문지방에는 새언약의 피와 살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을 거기에 함께 묻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곳이다. 너무나 거룩하기에 그러하다. 성전이 온통 거룩한 피로 뒤범벅이 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하심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성령께서는 이처럼 피 안으로 감추어진 교회만을 참된 성전으로 본다. 이런 교회는 고난을 드러낸채 숨겨져 있다.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고난을 담고 있지 않는 자는 이런 교회가 발견되지 않는다.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로 역사 안에서 계속 발생되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자기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죄의 몸 때문에 처참하게 살해된 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어찌 자기 것 달라고 요구할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참된 십자가 피가 묻혀 있는 성전의 문지방은 이 세상의 모든 육적 생각들이 침범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성령의 보호 속에 성전은 이 시대에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형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선악으로 논해서 이해될 수는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한 그 영역은 악마의 세력이 감히 공격할 수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계속 승리하는 곳이요 영원히 승리하는 곳이요 모든 것이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그 뜻을 한치의 오차 없이 일을 진행시키는 곳이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에베소서 3:10-11)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 버리신 그 분에 의해서 이미 죽임을 당한 자들 가운데만 주님이 계시다. 따라서 교회도 부활 안에 숨어 있다. 전면에는 늘 십자가로 내비쳐지는 교회이다. 만약 누구 하나를 붙들고 십자가 앞에 그 구성원들을 세워두게 되면 이는 유사 교회가 된다. 인간 사회의 속성을 지닌 집단으로 풀이되고 해석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 집단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경영적 술책이 곧 신의 계시 역할하게 되고 창녀처럼 자기 집단을 위장하고 곱게 화장하여 전도나 선교를 외치면서 회원 모집에 나설 것이 뻔하다. '오직 예수만'을 내세우며 부지런히 전하지만 이는 배후에 자리잡은 '오직 자기 집단'만을 겨냥한 목적 달성용 '오직 예수'이다. 자체적으로 사교적인 애정과 화기애애한 친교과 경제적인 혜택을 상호 공급해주어서 마치 이상적 사회를 연출해 내게 된다. 이러한 교회상은, 사회가 피곤할 때마다 민중들에게 적절한 환상을 펼쳐주기 위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이 이해하는 복음(기쁜 소식)이란, 육의 썩어질 것으로 삶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 배만 위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실시하는 예배와 봉사와 교제와 교육과 전도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예수님은 , 이러한 인간들의 사회성과 연대성과 공동체 인식을 정죄하기 위해서 비밀히 오셨다. 성경을 통해 사도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아무리 탐색해 봐도 진정한 교회의 정형은 정립될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가 제대로 외치는 '오직 예수'는 늘 '오직 교회'와 상호 충돌을 이르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 자들의 세계에 있어 교회란 손에 집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우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이 이 시대에 누굴 보고 누구를 겨냥한 편지들인가? 이미 세상에서 죽은 자가 사도의 편지를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미 자신을 세상에서 죽은 자라고 믿는 자들만 읽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누가복음 17:20-25)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나타나신다. 교회는 이 악한 세대를 심판하기 위해서 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 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느니라"(마태복음 12:41-42)

교회의 등장 자체가 육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육을 뭉쳐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교회요 성전이다. 이렇게해서 교회는 철저하게 육으로부터 숨겨져 있고 또한 육을 끊임없이 배척하고 공격하는 입장에 서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 무결한 의에 기초한 능력이기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려내는 능력이다. 동시에 없는데서 있게 못하고 죽은 것도 생명을 줄 수 없는 것과는 상종을 하지 않고 타협을 하지 않고 심판하는 심판의 능력이다. 육을 죽음의 세력 안에 있다고 아예 단정하히고 그것을 염두에 둔 채 나타난 것이 교회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시도는 육의 대한 심판성과 공격성을 이 말세 때에 노골화 하기 위해서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6:15-20) 이 본문에 보면, '경계'라는 단어가 나온다.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예수님 자신은 어떤 세력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음부의 세력'이다. 이 음부의 세력을 경계하라고 당부하신다. 이 음부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혈육'이 아니다. 하늘의 복이어야 하는데 그 하늘의 복은 천국이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사건, 즉 야곱이 돌을 취하여 하나님의 전을 세우려하는 행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 그 돌의 위치에다 베드로(반석)를 놓고 있고 그 돌을 쥐고 계신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 자신을 놓고 계시다. 즉 그 다음 구절에 이런 내용이 나오게 된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태복음 16:21) 이 본문은, 음부의 권세에 대해 예수님이 우선해서 이기신다는 내용이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육은 오직 예수님의 육밖에 없으며 천국의 복은 오직 이 육 위에 실릴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야곱이 생각했던 그 '하나님의 전'은 예수님 육 위에서 비로소 성취를 본다. 이 성전을 가지고 이제부터 음부의 권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이 작업은 아직도 자기 육에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모든 육적인 행동들을 공격하게 된다.

인간들에 의한 교회에게로의 초대는 있을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이다. 오직 공격뿐이다. 교회의 이질성은 복음의 심판성과 공격성으로 외부로 드러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23) 이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전파하는 식이 된다. 자유자이면서도 종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자의 종이 되나? 유대인들에게 종이 되고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의 종이 된다. 어떤 식으로 종이 되나? 유대인이 지금 지배하고 뒤덮고 있는 율법 아래로 사도가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식으로 종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복음에 의한 자유이다. 즉 종으로 들어갔다고 나중에서 율법의 종이 된 자를 율법과 무관한 복음의 종으로 해서 해방시켜 내고야 마는 것이다. 교회의 공격성이 승리의 열매로 끝나는 순간 순간을 복음의 능력으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새로 구원받은 교회의 공격성이 얻어낸 전리품이다.

즉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려내는 복음의 능력은, 그 어떠한 굴레로 벗길 수 있는 능력이다. 이번에는 율법이 없는 자 속에도 들어간다. 그들도 역시 율법이 없는 채로 죄의 종이 되어 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들고 들어간다. 또 하나의 역설적 행위이다.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이번에는 율법을 통해 복음을 선포한다. 그들을 그 법 앞에 세워, 율법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가증된 행위인가를 알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율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초월한 복음을 준다. 이것이 또한 역설이며 모순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안겨 주면 그들은 기껏 유대인으로 전락한 것이고 여전히 율법 아래 종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복음을 전하는 하도 자신은 괜찮은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을 맺는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6-27) 즉 전도하는 자신조차도 자신이 전도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늘 전도의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복음 세계 안에서의 역설이요 모순이다.

즉 상은 받되 이 상은 다시 하나님께서 돌려지도록 되어 있는 상을 받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린도전서 9:16-17)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 4:10-11)

지금의 교회는 하늘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이 하늘의 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히브리서 12:22-23) 성도는 하늘의 집에 하나님과 같이 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요한계시록 13:6) 따라서 이 지상에서는 이 세상적인 방식에 의해서 포획되지 않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원래 그러하다.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나라이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브리서 11:27) 믿음은, 내용 자체가 은폐성과 은밀성에 들려 싸여 있다. 증거라고는 단지, 믿음 그 자체뿐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히브리서 11:1-2)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우상 숭배이다. 왜냐하면 땅의 성질로 제조했기에 땅과 연결 고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끊임없이 땅의 것을 부정하는 성질이다. 땅의 힘, 땅의 윤리, 땅의 지혜를 부정해야 하는 나라이다. 의가 없고 거룩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땅을 저주해야만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상호 심판과 투쟁의 관계에 놓여 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한일서 4:4-6) 이 믿음의 비밀의 최종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며 이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또 다시 은폐된 채 성령으로만 계시되는 비밀의 사건이 되어 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로마서 16:25-27) 믿음을 오로지 비밀만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미 믿음 안에 있는 교회는 비밀 단체로서의 교회이며, 세상적인 윤리와 힘과 질서와 체계를 일체 부정하는 단체이다. 그래야 계속 비밀만이 교회의 본질로 세상에 터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6-27)

비밀은 아무리 공개해도 그 비밀성은 닳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 지닌 비우호적 정죄성과 심판성 때문이다. 비밀이 더 이상이 아닌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사랑과 우호적 대상이 된 택한 자들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것도 인간들 고유의 신에 대한 우호적 성품이 접촉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정함과 의 앞에서 기존 지니고 있는 자신의 몸과 생명의 파멸성을 인식케 하는 성령의 심판적 기능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 종교성에 기초한 양식 있는 성품은 지닌 자는 모두 다 영생을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지정해 놓은 자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사도행전 13:48) 이 본문에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영생은 작정된 자에게만 돌아가도록 되어 있기에 여전히 그 비밀성을 유지하고 있다. 복음 전파는 더욱 더 이 비밀성을 확산시켜 나가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더 세상에 대한 정죄성과 심판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마지막 진노의 날에 그들이 핑계치 못하기 하기 위함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사도행전 13:46)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이런 속성으로 뭉쳐져 있다. 아무런 무기나 힘도 없이 오직 성전과 성막이 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여타의 민족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의 타고난 이성과 감정과 의지로서 구원될 수 없도록 극구 방지하므로서 인간들의 원초적 죄악의 심층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 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13:10-15)

성전 없는 자들이 성전이 되고 언약 밖의 자들이 언약민이 되는 것은, 언약 자체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약속 구현을 위한 언약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에베소서 2:12)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없음을 말하므로 말미암아 약속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이 약속이 지향하는 바는 오직 한 '몸'에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6) 하나님 앞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는 몸은 오직 그리스도 몸밖에 없다. 그 분만이 약속대로 십자가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성전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라디아서 6:14-15)

이 본문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말이 나온다. 십자가 안에 같이 죽은 자만이 새롭게 창조된 자들이다. 이들만이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안다. 같은 체험이 그들에게도 찾아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그 현장으로 인도된 것이다. 이런 자들만이 십자가 죽음의 내막을 아는 증인이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무엇이 예수님을 죽게 했으며 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현장을 함께 하는 경험으로 인하여 제대로 모든 비밀을 제대로 알게 된 자들이다. 따라서 오직 십자가라는 비밀만 자랑하고 다른 것을 병행해서 첨가할 마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결론 맺는다. 세상이 그 밖에서 놓여 있고 자신들은 십자가 그 안에 놓여 있어 서로가 서로를 죽은 자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 2:15-16) 서로가 서로를 미련하게 보고 있다.(고린도전서 1:21)

서로 미련하지 않기 위한 타협과 대화와 설득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복음의 미련함을 교회가 스스로 포기하고 지혜로움에 세상과 접촉하려 하면 이미 그 교회는 구원의 능력이 이미 빠져 나가 버린 단체이며 사설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전도를 위하여 도를 변경하는 오류는 십자가 사건 안에서 용납이 안된다. 이러한 영원한 대치가 천국과 지옥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복음 전파이며 이 시대에 있어 교회의 존재 양식이다. 마치 구약 때 성전 안의 세계와 성전 밖의 세계가 차단된 것과 같다. 성전에서 계속해서 죽음 의식을 반복하듯이 초대 교회도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반복하여 자체적으로 세상과 격리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1:23-32)

이 격리된 형식도 고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형식이나 제도를 통해 내용을 고정시켜 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손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장갑을 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손을 잘라지면, 장갑은 더 이상 쓸모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십자가 복음은 인간쪽에서 제시되는 종교 아이디어나 기술을 끊임없이 정죄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양파 껍질 벗기는 식으로 형식적인 면을 끊임없이 벗겨낸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을 계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고 그 안에서 자기의 살아있음을 재확인하려 한다. 이 경쟁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다.(고린도후서 5:14) 이런 십자가를 내용으로 가득찬 것이 새 언약이다. 따라서 새 언약은 인간 몸의 사망과 관련되어 실시된다. 예수님은 죄를 안은 인간의 몸으로서 언약의 대상자 자리를 차지하셨다. 이 언약이 영원히 고정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언약적 위상도 오직 하나 '사망해야 될 몸' 이것 뿐이다. 사망해야 될 몸이 점차 사망해 가는 그 자체가 언약의 실현의 증거이다. 이미 산 자가 되었기에(로마서 6:11) 더 이상 미련두지 말아야 한다. 그냥 버려야 한다. 죽게 되도록 방치해야 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1) 성도가 자기 몸을 통해 보여줄 계시는 이것뿐이다. 고맙게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회개하기 위하여 살아있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은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안다. 즉 용서받은 몸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성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약속대로 그 성도를 죽이신다는 사실이다. 죽어가고 있는 몸들이, 죽이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게 된다. 자기를 통해서 죄의 본질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다(시편 51:17). 그동안 죄에게 장악당하여 죄에 깊이 빠져 있던 자아가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그곳에서 벗어나면서 죄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마감되고 있음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도록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하고 그 죄를 극복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부할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의 위력에 감탄한다. 동시에 그 부활의 영을 보증금으로 죽어가는 몸에 남기신 하나님께 찬양한다(고린도후서 1:22). 이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이 스며나온다. 이런 일로 모인 곳이 교회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 자만이 자기의 죽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증언하려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후서 5:14-15) 사망해야 될 자기 몸으로 참된 그리스도 몸에게 자리를 내어줄 줄 알아야 참된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몸만이 거룩함을 보이기 위해 그들의 몸은 늘 죽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로새서 2:10-12) 육적 몸을 벗는 작업이 멈추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가득찬 곳이 교회이다. 이것은 거룩만이 충만한 세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살리기 위해 인간의 몸을 죽인다. 육은 결코 영이 되지 않는다. 영의 몸은 따로 있다. 성전인 우리의 몸이 죽어 간다는 것은 눈으로 나타나 보이는 모든 상징적 성전의 소멸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모든 언약의 핵심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있다는 뜻이다. 구약의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무너지지만 신약의 성도의 몸된 성전도 무너진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4)

모든 상징적 성전의 소멸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있어 인간 죽음이 지니는 바로 그 원인을 바로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은 어쨌던 죄인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은 참된 성전의 거룩함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파괴하므로 그들의 세계를 파괴했다. 성전 파괴는 곧 자신들의 파괴였다. 동시에 모든 인간들의 몸들의 파괴이다. 인간의 육에서 발생되는 모든 문화와 종교와 의식은 인간들의 '흉내내기'이며 '모방 작업'이며 결국에는 상징물로서 최종적 표징(Sign)을 보여준 것으로 종결된다. 인간은 교회까지 모방하고 천국까지 훙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가도 가도 죽음 뿐이다. 죄의 삯으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23)

성전이란, 거룩에 포위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마지막 때에 성전은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아내의 등장도 엄청나게 극렬한 심판이 벌어지는 것 가운데서도 대조적인 양상으로 보석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9-10) 하나님의 의가 장엄하게 실시되는 그 위기 앞에서도 눈부시게 찬란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름의 주님의 신부는 공개된다. 처참한 심판 행위는 아름다운 신부의 가치를 더욱 높여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11) 이 신부가 있으매 성전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구약 때의 율법 개입은 바로 이런 최후의 정황을 보다 실제에 가깝게 접근케 하기 위해서이다.

성전 안에서 이스라엘은 늘 심판에 직면해 있었다. 끊임없이 정화와 정결 작업 앞에서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그들은 따로 자신의 의를 부각할 수 있는 방도를 시도했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기도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하거나 찬양을 하거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영광 고수에 치중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3:10-18)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율법에 근거한 성전은 그들 눈 앞에서 악인들에게 불 타서없어져 버렸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6-7) 이런 점에 그들은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고 돌아와야 한다.

심판의 하나님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세기 4:5) "이곳이 성전이 아니다!"로 가로지르는 예레미야의 손짓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예레미야 7:4) 옛날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교인들이나, 하나님이 다른 몸으로 성전을 만들 줄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다. 거룩한 성전과 처소는 오직 그리스도 몸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거하신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만이 유일한 몸이요 유일한 성전이다. 제사로 성전 안의 정결과 거룩을 유지하던 그 성전이 이제는 십자가 사건의 현장성으로 인해 거룩과 성결을 유지한다. 성령께서 성도의 몸을 늘 십자가 현장 안에 놓여 있게 만들므로서 십자가가 보여주는 새 언약에 흡수되어 사라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언약적 절차이다. 사람이 거할 곳이 아니라 자기 몸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몸이다. 거기에만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무엇이 성전인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다. 성령을 통해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하시게 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십자가 관계라면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도 십자가 관계이다. 이 십자가 언약 완성을 통해 거룩과 영광이 온 우주에 넘친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성전이요 참 교회이다. 이 성전 안에는 오직 주님이 주신 의의 선물만이 가득찰 뿐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7-18) 이 본문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은혜의 왕노릇이란, 주님이 의를 선물로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시는 사역을 말한다.의가 성도의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로 주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의 왕노릇의 본질이다. 즉 죄가 왕노릇 할 시절에는 좋든 싫든 죄의 권세가 인간에게 주어졌는데, 성도에게는 이제 의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의 선물이 여러 가지 다양함을 가지고 교회 내에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6-13)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에베소서 4:7-8) 이 모든 의의 선물들은 오직 그리스도 홀로 이루어내신 능력의 크심과 충만함을 이해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공로를 돌리고 그 분의 하시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은사이다. 그리스도의 행함의 깊이와 높이 넓이와 길이와 충만함에 대해서 증거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따라서 같은 그리스도 몸 내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든지 더 훌륭하다든지 하는 차별적 대우를 해 줄 수는 없다. 누구든지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전서 12:21-27/1:31/3:21) 그리스도 몸이라는 호칭은 교회가 단순히 위계질서를 가진 힘의 조직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 다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성령을 마신 자들이라서 오직 공동적으로 누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게 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성은 그들 각자 나름대로의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주님 안에 소유됨을 확인케 하는 작업이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아니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에베소서 1:7-9) 성령께서는 이 점에 초점을 모으고 성도들이 알도록 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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