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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2:30:20 조회 : 4342         
7-1 데카르트의 유신론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1) 데카르트의 유신론

데카르트는 고중세에서 근세로의 자연 이해의 변천되는 지점에 와 있는 사람이다. 그는 관념과 사물이 탄생하는 원초적 층을 신(神)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연장적 실체'에서 나타나는 근세 자연 과학적 자연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고중세의 자연 이해와 구분지어 볼 필요가 있다. 고중세에서 자연은 '그 스스로 그러함, 스스로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연이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운동은 자연물이 자신의 본성 따라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물, 흙, 공기, 불이 각기 자기 자신의 고유의 자리를 가지며, 자기 자리를 찾아 운동하는 자연물은 자기 자리에 도달하면 그때 비로소 정지할 수 있다. 자연물이 각각 자기 자리가 다른 것은 그 각각의 본성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자연에서의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상계와 천상계의 질적 구분이다. 자연물의 운동 과정을 그것이 미래에 위치하게 될 자리, 운동의 목적지에 따라 목적 지향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곧 운동의 힘이 자연물 자체의 목적인으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의 변화 및 성장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의 능동적 운동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켜 가는 생성적인 운동이다. 우리는 이런 자연관을 자연의 운동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 자연관이라 부를 것이며 다시 그 목적이 외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본성적으로 내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 내재적 자연관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아가 자연은 목적으로 나아가는 운동의 힘뿐만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 운동의 끝, 즉 죽음도 그 본성 안에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세로 들어오면 자연은 더 이상 그 각자의 본성에 있어 질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을 포함해서 모든 종래의 질적인 구분, 존재의 계층적 다양성의 의미는 사라지고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차이는 다만 양적인 차이로 환원된다. 따라서 사물 자체가 본래 속해야만 하는 본래적 자기 자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의 운동은 더 이상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자발적인 운동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운동은 더 이상 최고선의 궁극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이 지닌 획일적인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기계적 움직임일 뿐이다. 즉 가야 할 바가 없는데도 사물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이다. 도달하여 멈처 서고자 하는 자기 자리가 없으므로 한번 움직여진 것은 스스로 멈 줄을 모르고 계속 관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머무르고자 하는 바가 없는데도 사물이 멈추는 것은 스스로 멈추고자 해서가 아니라 남이 밀 때 밀려가고 남이 막으면 멈춰 서는 생명력 없는 수동적인 기계로 이해될 뿐이다. 이처럼 자연을 자발적 활동이 없이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처럼 이해하는 자연관을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고 하자.

데카르트의 실체화에서 어떻게 실체 이원론으로 나아갔는지를 알아보자

스스로 성장하는 자연에서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자연으로 그 이해가 바뀌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그 정당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은 전체성, 동일성, 무차별성에서 벗어나 분리, 대상화, 고정화하는 경향의 인간 사고 논리 구조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움직이는 힘과 움직여지는 것, 활동하게 하는 힘과 활동하게 되는 것, 이들은 분명히 하나의 운동, 하나의 활동 안에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움직이게 하는 활동적인 것은 의식 작용이고 사물은 단지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물질 뿐이라고 정신과 사물을 이분화해서 이해한다. 즉 주-객 미분의 봄의 활동을 놓고 보는 자(주)와 보여진 것(객)을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차별성의 논리이다. 이처럼 사유 주체와 물질 객관을 이분화함으로써, 결국 시공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들은 활동성이 없는 죽은 기계일 뿐이라는 근대 자연 과학적 자연 개념이 성립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연 개념의 철학적 확립을 살펴 볼 것이다.

'사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로서 데카르트가 직관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고의 활동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있음을 의식할 때 내게 직접적으로 확실한 것은 그 말을 듣는 활동성이다. 그 활동성 안에서는 어떠한 분리도 아직 일어나고 있지 않다. 들음의 활동이 확실한 것이지, 말을 듣고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거나 말을 듣는 나의 귀(신체)가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들려진 말이 따로 객체로서 존재한다거나 말을 하는 타인의 입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무분별의 확실성 안에 머물러 있지를 못한다. 사고 활동,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언어 논리에서는 불완전하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 논리는 그 활동이 누구의 활동인가 하는 활동의 주체를 묻는다. 그저 활동이란 것은 불완전하며 활동하는 것(활동 주체)이 활동의 기반인 실체로서 전제되어 그것의 속성으로 설명되어야만 납득이 간다. 그저 빨간색이라는 것은 불완전하며 빨간 꽃, 빨간 종이의 속성이 되어야 비로소 납득이 간다. 이것이 곧 '주어'-'술어' 관계의 우리 언어 구조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의 관계이다. 속성이 변화하고 달라질 때 그 속성의 담지자인 실체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그 변화의 기저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체화의 논리는 어떠한 분리를 가져오는가?

'봄'의 활동 자체에서는 보는 자와 보여진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둘을 포함하는 미분의 전제이다. 그런데 실체화의 논리는 활동에 앞선 존재를 욕구함으로써, 즉 활동성을 하나의 활동적인 것의 활동으로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활동이 지니고 있던 포괄적 전제를 깨고 그 한쪽 끝인 보는 자(주관) 쪽으로 가져가며 따라서 보아진 것은 그 활동 밖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활동은 더 이상 주-객- 미분(포괄)의 활동이 아니라 보는 자의 실체의 속성이며 그에 대해 보아진 것은 봄과 독립적인 그 자신에 실체를 가지는 것이 된다. 결국 주-객 포괄의 동일적 전체성의 출발점은 깨어지고 오히려 보는 주관과 보아진 객관이 각기 분리된 고정된 실체로서 출발점을 이룬다. 즉 사고적 실체의 연장 실체의 실체 이원론이 성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의 근세 철학은 계속 이와 같은 이분 속에 머물러 있는가? 그렇지 않다. 데카르트 정신-물질의 이원론에 따라 정신이 배제된 물질적 자연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이 아니라 근세 이후의 자연 과학과 그 자연 과학에 의해 세계받은 실증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여기서 실체화의 논리는 정신과 물질을 서로 대립되는 주-객의 관계로 이분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체의 활동성을 구분되는 주-객의 관계로 분해한 후에 다시 그 관계에 있어 한쪽 끝을 작용하는 실체로 다른 한쪽 끝을 작용의 부산물로 일원화한다. 즉 데카르트의 주-객 대립의 이원론은 결국 실재하는 것은 시공 안에 위치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연장적 사물리고, 그에 반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사고는 그런 물리적 실체의 부수현상일 뿐이라는 자연(물리)주의적 일원화의 길을 가게 된다. 실증주의 전통에 이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물리주의적 일원론에 따르면 주관성, 심리성, 내면성보다는 객관성, 물리성, 연장성이 더 실제적인 것이며 진리에 가깝다. 실체 이원화를 통해 사고와 정신이 배제된 기계적 연장성만으로 특징 지어진 자연물, 수학, 물리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객관적 사물-그것만이 본래적이고 1차적 의미에서 실재라는 유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존재하는 것, 자연은 자발적 활동이 없는 수동적인 죽은 기계이며, 시공적인 연장성을 본질로 하는 대상물일 뿐이다. 오히려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은 그와 같은 이원적 사고에 의해 잊혀지고 상실된 전체성과 동일성을 되찾아 주-객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 사고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서의 주-객 대립의 오성 차원을 넘어서는 이성의 이념으로서의 전체성의 추구, 헤겔에서의 주-객을 통일시키는 매개자로서의 전체성인 절대 정신의 추구가 곧 그것이다.

그렇다면 분리시키는 우리의 사고가 왜 또한 분리 이전의 동일성 역시 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동일성과 전체성을 무시한 분별성과 차별성의 실체 이원론적 사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사고와 물질이 절대적으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고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공통성이나 매개성이 없다면 인간 사고가 어떻게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물질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한 정신과 물질이 각각의 실체로서 각자의 원리에 따르는 무관한 것이라면 어떻게 구체적 인간에 있어서 그 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신체로서 서로 관계하며 화합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신이 인간이라는 신체를 세계 속으로 던졌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신체를 탐구하는 것이 실재적 통일성을 갖추는 방식이다. 신체가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은 공간과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이다. 공간에는 운동이 흐르고 있다. 여기서 신체는 정박지(碇泊地)를 고수하게 된다. 고정된 지점을 통해서 운동과 정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미래에 대해 미리 반응하는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느낀다는 말이다. 객관적 대상으로서 세계는 너무 꽉 차 있어서 시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 시간이 성립하려면 항상 결여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물에는 시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의식에도 시간은 없다. 시간이란 신체가 세상과의 갖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늘 변한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한 의미에 있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객관적 사고가 시간 이해에 실패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간화해서 시간을 세계 진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시간이란, 늘 솟아올라오는 세상의 과거 그림자에 대해 반응하는 신체의 기능이다. 신체를 시간을 통해서 세상과 교류하는데 이것이 신체의 역사성이다. 하이덱거는 주장하기를, 현존재는 미래를 미리 가지고 존재의 흩어짐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스스로 탈자성(脫自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시간 안에서 그 탈자성을 모아 시간을 영속성으로 이해한다. 이로서 우리의 신체는 시간의 용출이다. 인간이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 알려진 시간은 신체를 통해서만 파악되는데 그것은 지난 존재가 현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현재 신체의 시간화 운동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이것은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해명한 것이 된다. 이로서 인간의 본질은 신체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존재를 사고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수동성과 능동성은 그대로 세계 안에서도 통용된다.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세계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세계와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의식은 언제나 이미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세계는 과학이 보는 자연 세계가 아니라 신체에게 빛을 비추는 자연 그대로의 세상이다. 과학은 신체의 해체를 용납한다. 그러나 신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존재한다. 세계로 열려 있는 것이다. 객관적 사고로 인해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신체는 더 이상 신체라고 말 할 수 없다. 세계를 바라 볼 때, 사물의 총합으로서만 본다면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만을 가지며, 거부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 진리만을 가진다. 초월성이 막혀 있다면 이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란 세계와의 공존이 불가능하다. 이렇듯 인간을 경험의 조각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경험 과학은 죽음을 지향하는 사고 양식이다.

하지만 신체가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에서 인간의 신체가 곧 영원한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지닌 실체 이원론을 비판 극복하며 차별에 앞선 동일성과 전체성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 스피노자의 동일 철학에서 자연이 어떠한 의미로 이해되는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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