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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2:36:48 조회 : 3386         
결 론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Ⅲ 결 론

인간은 자기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다 모른다. 뭔가 자꾸만 쏟아져 나온다. 끝없이 나온다. 어디까지 나올지 단정 못한다. 그런데 이것이 밖으로 나올 때는 모방과 모형으로 나온다. 이 모형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게임을 즐긴다. 게임을 하기 위한 모형이다. 각자 세계를 본뜨서 만드는 모형, 이 모형을 수선하고 보완하고 수리하는 방식이 과학이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이런 과학으로 다져진 모형으로 게임을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강한 주체의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 관계는 끊어지고 달리 즐길 만한 것이 없어 사물을 가지고 구성된 게임의 세계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주체의식이란, 모든 존재물을 자기 인식을 통해서 대답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사물은 둘 다 독립된 실체이다. 인간의 게임의 주체이고 사물은 게임의 도구이다. '나'에 대한 의식이 강렬하면 할수록 사물 개념은 더불어 더욱 더 사물적인 것이 된다. 심지어 타인까지 그러하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세계는 곧 독자적인 세계였다. 자기네끼리 즐기는 게임 속에서 쉴새없이 경쟁하여 이기기 위해 힘으로 자기를 무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은 벌어진 인간 관계를 극단으로 치닫게 할 뿐이다.

과학이란, 하나님을 떠나보내고 인간이 홀로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테크닉이다. 물론 그런 다음에 다시 하나님을 초청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아니한다. 어디까지를 자기를 위한 신이요 메시야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자신이 한 노동에서 찾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자꾸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것은 곧 '행함'이다. 그리고 이 행함의 기초를 일단 자신의 정신에다 두고 난 뒤 다시 바깥 사물의 움직임을 살핀다. 그 정신은 그 안에 아무 것도, 돼지도, 사람도, 두꺼비도 포함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관념(즉 차이에 관한 정보 뿐이다) 정신 안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개인을 구분짓는 경계가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공간적 경계가 아닌 집합론의 그림에 사용되는 테두리 또는 연재 만화의 주인공 입에 그려진 거품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경계선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이다. 인간들은 저마다 이 정신적 '행함'을 무(無)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일을 꾸미고 추진해 나간다.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일을 개시하셨다. 예레미야 21:8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즉 이제는 인간의 행함이나 노동이 이 세상에서 전혀 나름대로의 의미나 가치를 찾도록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친히 추진하는 새창조 작업 외에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로 인해 아직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끊임없는 다툼이 있다.

현대 과학은 하나님을 될 수 있는대로 멀리 두려고 한다. 하나님보다 손을 떼라고 한다. 신이 인간에게 남겨주신 정신적 재료를 가지고 신의 경지로 합류해 보겠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성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모든 행함에 가치를 두게 된다. 항상 자기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의 그것의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생각하려 한다.

창조 과학이나 신과학도 마찬가지다. 창조론은 종교적 충동을 과학으로 탈바꿈한 것이고, 진화론이란 과학적 충동을 역사적 종교로 탈바꿈 한 것이다. 모두다 이미 만들어진 게임의 률에 순종해서 좀더 인간 친화적으로 다듬어려고 한 것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독자성이 확보된다. 이것은 객관성을 우선하는 과학의 본연의 속성에도 맞지 아니한다.

뿐만아니라 유신론적 관점도 마찬가지로 바른 인간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한쪽을 신으로부터 출발시키고 다른 한 쪽을 인간쪽에서 출발시켜도 결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마중 나온 그 신마저 지나쳐서 극복해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인간들이 너무나도 미약하고 불실해서 같이 합세할 수 있는 연결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만든 률에 빠지지 않는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통일이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통일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 중심성을 철거해야 한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중심점을 만들어 고정시키면서 살아가게 된다. 견고한 중심, 변동되지 않을 중심,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중심, 언제 되돌아와도 편히 쉴 수 있는 중심, 늘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중심을 꾸준히 조립한다.

그리고 단단히 닻을 내린 중심점에서 더욱 더 자기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제일 큰 비극은 육이 영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육는 육으로 끝난다는데 있다. 비록 영을 생각해도 자신을 먼저 염두에 둔 영은 영이 아니라 육으로 흉내낸 사이비 영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이 되어야 될 자에게는 복음을 주시려고 한다. 그 복음 안에서 인간의 지혜와 전혀 상관없고 무관한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창세기 41:39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친히 내려주신 것도 인간에게 있어 제일 큰 비극은 육이 영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육는 육으로 끝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영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이 된 자에게 영이 되기 위해 복음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였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런데 이 지혜가 요셉만의 지혜가 아니라 이 인간 세상의 중심되는 지혜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아니받았던 상관없이 그 당시 애굽의 임금이나, 백성이나 심지어 애굽 땅에 살지도 않았던 야곱의 가정까지 모두 요셉이 가진 지혜 쪽으로 끌려 당기게 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7년 대 풍년이나 대 흉년이라는 자연 현상까지 요셉의 지혜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즉 세계는 이미 중심점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역사의 흐름 안에서 미완성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신의 지혜나 이성으로 새삼스럽게 세계를 정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통일되겠금 되어 있을 뿐이다.

이 통일 작업은 복종치 않는 것에 대한 심판도 필히 병행되는 작업이다. 고린도후서 10:3-6에 보면,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라고 나온다.

고린도전서 3:20-23에 보면,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받은 것보다 더 근원적인 지혜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요셉도 세상 중심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안 것밖에 안된다. 요셉의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 자리가 결코 진리의 최종치가 아닌 것이다. 빌립보서 3:20-21에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지혜를 의지하고 붙잡는 것은 전혀 중심점으로 무가치하다. 고린도전서 1:20-23에 보면,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의 지혜를 아는 자는 사실상 세상 전부를 알게 된 자이다. 빌립보서 3:8-9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의인, 즉 세상을 제대로 아는 자가 되는가? 그것은 온 우주 전부가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15-17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피조물이나 땅에 사는 피조물이나 모든 것이 이 범위 안에 놓여져 있다. 이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죄요 악이다.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이라고 우기는 세력을 말한다. 이것이 과학의 정체이다. 우리 인간이 이 과학 행위를 계속 하느냐 마느냐의 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는 반드시 이 과학 방식을 따라 지향된다.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과학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이런 심령 상태로 보고 그 마음을 십자가 앞에 놓아야 한다. 그러면 제 실체들이 드러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로마서 1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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