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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2:40:47 조회 : 4919         
과학의 정체 질문게시판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과학의 정체 질문게시판



 


시간은 없다? - 시간에 대한 언약의 공격

신현복 2003-04-17 15:56:26,

- <과학의 정체> 4장 4절을 읽고 -

“뉴턴은 세계의 체계에서 태양계를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고 하는 견고한 준거틀 속에 자리 매겨 놓았다.

절대 공간은 외부의 것과 어떤 연관 없이도 존재하며 언제나 유사하고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있다. 또한 절대 시간은 외부의 것과 어떤 연관 없이도 한결같이 흐른다.”

종교심이 강했다는 뉴턴은 자신의 성채인 물리 과학에서도 절대적으로 의존할 시공간이 필요했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의 20세기 초 이 대선배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후학들의 이론들은 분명 도전적이고 패기가 넘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그것이지요.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역설은 시간(뉴턴의 시간)을 불변의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과거로 흘러가는 것으로 또한 공간과 시간을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그린 상투적인 서술이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공간을 지나는 데 다른 경과 과정을 거침으로써 여행 중인 쌍둥이는 시간을 지나는 데도 다른 경과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분명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1908년 헤르만 민코프시키가 공간과 시간은 고립적인 차원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시?공(時?空)이라 부르는 4차원의 연속체를 형성한다는 견해를 최초로 주창하였다.”

절대적인 시간에서 상대적인 시간으로 진화하던 이론은 20세기 말 양자론에서 다시 새로운 옷을 갈아 입습니다. 이른바 다차원 우주론이지요.

“스티븐 호킹은 공동연구자인 캘리포니아 대학의 짐 하틀과 함께 무경계 가설을 사용해 양자우주론 분야의 새로운 개념을 개발했다. 호킹과 하틀은 초기의 양자상태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우주를 검토하기 위해 복소 시간이라는 수학적 기술을 사용했다. 시간은 허수 시간과 실수 시간이라는 별개의 두 성분으로 나뉜다. (그 결과로) 우주는 단지 우연히 생겨난 여러 세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속에서 또한 우리도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정리해 보니 어지럽습니다. 과학자들이란 사람들은 세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처럼 보이네요. 실수의 시간, 허수의 시간, 5차원의 우주, 9차원의 우주…… 어쨌든 수백 년 동안 시간의 패러다임은 역사와 같이 요동쳐 왔지만 그들이 한결같이 믿는 신념은 하나입니다. 시간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 시간의 존재성을 어떻게 해서든 규명하고 증명하겠다는 것이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일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근호 목사님의 저서 『십자가를 아십니까』에서 충격적인 명제를 접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란 관념일 뿐 실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주일 성수를 무슨 대단한 신율법인양 떠받드는 한국 교회를 질타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시간은 인간의 인식 본능이다. 시간은 인간 안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자연은 노아 언약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라고 하셨지요.

불치의 병 속에서도 휠체어에 앉아 초인적인 의지로 오늘도 연구에 전념하고 있을 호킹 박사가 들으면 “뭬야!” 하고 벌떡 일어날 소리인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에겐 이것이, 물리학자들이 시간을 증명하기 위해 쓰는 수학미분방정식보다 난해합니다. 시간에 대한 말씀 언약의 입장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어차피 복음은 세상과는 다른 길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복음(福音)에 대해 인간이 기대하는 기쁜 소식 대신 우주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소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명제는 너무 급진적인 것이 아닌지요? 오늘도 태양은 뜨고 지고, 달과 해는 바뀌는데 시간은 없다? 나이 서른인 내 육체는 지난날의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중년,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데 시간은 없다?

이 질문을 하면서 새삼스럽게도 복음은 참 어렵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아니 복음은 실로 단순한데 그것을 영접해야 할 내가 참 복잡한 사람이라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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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시간은 없다? - 시간에 대한 언약의 공격

이근호 2003-04-17 15:57:45, 

> 예문 중에서, '복소시간'이란 '복수시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전력을 다하면서 '과학의 정체'에 대해서 계속 교정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새로 고쳐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시간론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와 상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원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골로새서 1:16-17를 면밀하게 찾아보신다면 모든 창조가 언약 안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고 있는가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언약 상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성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시간성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성과 대조해 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들의 시간의식 (이것마저 없다는 것은 말도 아니됩니다.)은 이 땅에서 이 시간의식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찾아 시간의식에 의해 재정립시키므로서 자신의 시간성의 가치를 존속시키려고 합니다.

자신의 시간성 존속이 실체성을 지닌다고 자신감이 생기면 이제 그 시간의식과 그리고 눈에 띄는 공간 의식으로 '진리 만들기'에 나설 것이 뻔한 절차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안식일 지키기 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런 핑계를 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주신 것은 이 시간관과 공간관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믿는다. 즉 하나님은 진리를 그냥 하늘에세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진리를 우리에게 개입시켜 주신다. 따라서 인류의 유구한 문명과 문화를 결코 죄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 의로운 열매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시간성에 대해서 자신의 영원한 시간성으로공격해 버립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내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요 1:15)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시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십자가 자심은 바로 이런 생각 자체가 땅의 것에서 시간의 내용을 채우려는 인간들의 원초적 죄악성을 지적하기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효력 적용은 시간성을 초월해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처럼 언약이란 결코 인간의 협조나 참여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오로지 성부와 성자만의 언약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언약의 증인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 과정은 인간이 왜 언약을 못지키느냐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출발해서 결국은 예수님의 공로의 몫으로 귀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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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병아리도 다시 살린다?

신현복 2003-04-18 10:42:45,

<과학의 정체> 5장 정신과 파장의 관계를 읽고 드리는 질문입니다. - 우리 교회 홈에 질문된 것 퍼 온 것입니다. 또 다른 분들이 똑같은 질문을 예상하여서 이렇게 옮겨 두었습니다.



“현대 중국에 어떤 초능력은 몇 가지 신기한 기 능력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물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들은 부서진 물품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시키며 뚜껑이 닫힌 병 속의 약을, 병을 깨지 않은 상태에서 감쪽같이 밖으로 꺼내기도 하고, 갈기갈기 찢긴 나뭇잎을 원래대로 복원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또 몸 안에 있는 종양을 들어내 병을 고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염동(PK)능력으로, 이는 수천 리 밖에 두고 온 서류 봉투를 순간적으로 이동시키거나 자동차를 다른 지점까지 공간 이동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또 하나는 소생 능력으로, 죽은 병아리를 원래 상태로 살려내는 것, 군밤을 다시 생밤으로 되돌리는 것, 삶아서 붉게 익힌 새우를 투명한 생 새우로 다시 살려내는 것, 볶은 땅콩을 생 땅콩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볶은 땅콩으로 되돌리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첫 번째 질문. 이것은 목사님이 읽은 책에서 그런 사례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요? 아니면 목사님도 이런 일이 실재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올리신 것인지요?

텔레파시, 염력 따위의 초능력이 과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실체를 인정 받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죽은 병아리를 다시 살린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게 느껴지는군요.



두 번째 질문. 소생술의 사례가 있다는 예상 답안을 가정하고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생명에서 죽음으로, 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은 하나님만의 권한이라고 배웠습니다. 복음서에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부활 자체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죄로 인해 죽을 목숨, 나사로가 살든지 죽든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 새 창조의 능력으로 이 땅에 임하신 그 분이 누구이신지 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이런 기쁜 소식,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복음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소생술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멀리 중국의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할렐루야 기도원 같은 곳에서는 불치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린다는 광고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귀도 이런 소생술로 장난을 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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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죽은 병아리도 다시 살린다?

이근호 2003-04-18 10:47:50,

그 대목을 실은 것은, 과학이라는 것이 결코 합리성에 머물지 않고 언제든지 들석거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자체적인 규칙조차 위반하기를 (혹은 신과학자들 말대로라면 '초월하기를', 실험과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현 '패러다임을 추월하기를') 항상 요청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들에게 묻는거나 혹은 검증에 나서는 조차 저는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재현에 실패에 나서도 그들은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할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대는 곧 그것이 현실화된다는 그들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소생술을 믿습니다. 마치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듯이 말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과학적 검증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그런 사례를 들면서 실증과학이든 무슨 신과학이든 결코 과학 운운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며 항상 그 자체로 절대적 종교로 만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채 오늘날 고등학교에서 이과 공부에 열중하는 장래의 공학도의 심성에도 이런 기운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기만의 종교'를 이미 지니고 인간은 출발합니다.

그들도 나중에 대학이나 기업 실험실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릴 것입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고 경배합니다. 하지만 이곳 실험실에서 과학적 작업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과학을 통한 거룩한 문화사명을 수행중입니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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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2절 스피노자의 유신론을 읽고

신현복 2003-04-18 18:07:46,

7장 2절 스피노자의 유신론을 읽고 어려운 철학 용어들이 있어 이에 질문 드립니다.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라는 개체적 실체를 부정하며 그들 개체의 존재를 유일 실체인 신의 존재를 통해 설명하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사유와 연장은 그 유일 실체인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해명된다. 즉 사유와 연장은 각각의 다른 실체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속성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되는 두 실체로 보는 데카르트적 실체 이원론에 대한 비판으로 스피노자 동일 철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사유체와 연장체는 존재론적으로 보면 하나이다.”

첫 번째 질문. 문맥으로 본다면 ‘사유’는 ‘정신’에 대응하듯이 ‘연장’은 ‘사물’에 대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장'이란 뜻이 '사물'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물질의 본질이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견해를 거부하였다."(7장3절 라이프니츠의 유신론)와 같은 주변 진술을 보더라도 이 개념이 꽤 중요한 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 의미를 알 수 없군요. 철학 사전 따위를 뒤져 보아도 명확한 설명을 찾을 수없어 연장의 의미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이와 같은 자연 안의 생성의 힘, 능산적 자연은 전개된 자연인 소산적 자연의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산적 자연 안에서 그것을 생성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거듭해서, '신은 자연에 대해 그 초재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고 강조한다.”

두 번째 질문. ‘초재적 원인’ 이라는 용어가 궁금합니다. 문자 그대로 초월(超越)적, 내재(內在)적 원인이 함께 어우러진 것을 뜻하나요? 그렇다면 이런 이중성은 신에 대한 어떤 속성을 지칭하나요? 아니면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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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7장 2절 스피노자의 유신론을 읽고

이근호 2003-04-18 19:09:25,

>물리학(1)를 다시 한번 보세요. 무엇 때문에 데카르트가 사물의 연장성(확장성)을 사물의 기본적인 본질로 삼았는지를 압니다. 만약 사물이 연장성이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물과 사물 사이를 연결시켜 줄 관계성(힘들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즉 왜 사과가 무슨 마음을 품고 나무에서 떨어지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양 사상에서도 사물의 연장을 주장합니다. 즉 음과 양 사이에는 서로 친밀해주려는 습성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물을 단독적으로 떼놓고 설명해서는 사물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스피노자는 신의 초재성(초월하신 분이 모든 사물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자,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아무나 붙들고 (과학을 알든 모르든, 신학자 이든 성가대원이 되었든 상관없이) 다음과 같이 물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물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십니까? "

자, 어떤 답변이 나올까요?

"특별한 섭리 능력으로 다루십니다"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또 물어보세요.

"그 특별한 섭리 능력이 그 사물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거기에 대한 세 분(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답변이 실린 것입니다.

귀하께서는 나름대로 질의에 마음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과연 이 세 분의 철학자 답변의 범주 밖으로 나가는지 아니면 안에 들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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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에 대한 세 철학자의 입장, 그리고 성경

신현복 2003-04-20 23:35:59,

신의 섭리는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유신론은 이에 뭐라고 답하는가?

데카르트의 신은 세계에 대하여 분리된 신이다.

그는 관념과 사물이 탄생하는 원초적 층을 신(神)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물질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는 서로 독립적이고 그 중 하나가 나머지 하나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는 이원론을 견지한다. 즉, 운동은 고대 철학에서처럼 더 이상 최고선(또는 신)의 궁극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이 지닌 획일적인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기계적 움직임일 뿐이다.

사유 주체와 물질 객관의 이분화는 결국 실재하는 것은 시공 안에 위치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연장적 사물이고, 그에 반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사고는 그런 물리적 실체의 부수현상일 뿐이라는 자연(물리)주의적 일원화의 길을 가게 한다. 이것은 유한한 세계와 무한자, 즉 자연과 신을 분리시키고 그 무한자는 결국 유한한 세계로부터 추방당해서 유한한 것이 절대화되는 오류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여전히 신을 ‘모든 사물의 원인’ 이라고 정의함에도 불구하고, 이 신조차도 인간이 신의 관념을 가져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인간학적인 개념이 된다는 얘기이다. 데카르트의 유신론에서 신의 섭리를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어불성설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세계에 내재된 신이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의 개체적 실체를 부정하며 이것들은 각각의 다른 실체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속성이라 이해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되는 두 실체로 보는 데카르트적 실체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다. 개체가 그 본질 및 존재 근거를 자기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처럼 탈실체화된 개체는 그 궁극적 기반을 어디에 두는가? 스피노자에게 이것은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이념으로서의 신이다. 피조물(자연)과 창조자(신)는 실체적으로 분리되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은 실체인 신의 자기 전개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신=자연'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자연은 신을 통해 활동성을 갖는 유기체적 자연으로 이해된다. 이 영혼의 힘이 자연 안에서 자연을 자연이게 하며 자연이 스스로 자라고 변화하며 성장할 수 있게끔 생성시키는 힘이다. 자연에 발생하는 모든 것이 신 안에 그 관념을 가지므로 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세계 자체(엄밀히 말하면 세계 자체의 가장 실제적 측면)가 신이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 신의 본질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비자연적인 원인을 사용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겐 “신의 의지라는 비진리의 도피처로 도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유신론에서 신의 섭리는 자연의 섭리, 또는 인간의 뜻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간의 욕구와 이성은 자기 실현 능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모두 현실적이고 자연적이며 또한 (스피노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신적이고 신성하며 불가침적이다. 결국 스피노자의 신론은 범신론이고, 무신론적 유신론인 셈이다.

라이프니츠의 신은 세계에 대해서 초월한 신이다. 세 철학자의 신들 중 제일 그럴듯한 신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실체관을 부정한다. 하나 혹은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폐기한 라이프니츠가 보는 실체는, 신이 만들어낸 단자('單子, monad) 이다. 그는 합성된 물체들의 근저에는 통일적인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분리 불가능한 토대, 즉 단자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각 단자는 자신의 특수한 방식으로 우주를 반영하며 맹아적인 형태로 무한자를 포함한다. 단자들의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결과 또는 현상이 우리의 세계이며, 물질과 정신은 단자라는 실체의 상이한 현상태이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보는 중요한 원리가 된다. 세계는 어디까지나 디자인된 존재이다. 신이 머리(오성) 속에서 수많은 세계들을 디자인했고 그 중 하나가 지금 이 세계로 구현된/현실화된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우발이란 순수 우발이 아니라 신에 의한 선택이다. 때문에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도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여러 가능성 중에서 이 세계가 가장 최선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소위 '최적화(optimization)' 원칙을 사용하신 것이다. 창조의 순간에 신은 형이상학적 완성과 도덕적 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가능성들만을 현실화시켰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신이 단자들을 창조할 때 단자들 각자가 통일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병렬적인 작용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정 조화’ 이다. 정신과 물질의 조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이 개념으로 해결한다. 이것은 세계의 통일성을 입증하고 세계의 통일성 가운데 작용하는 합법칙성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이런 유신론에서 나올 수 있는 신의 섭리란 밝고 낙천적일 수 밖에 없다. 라이프니츠는 점진적인 인류의 발전을 믿는다. 그는 인간의 윤리가 발전하여 각자가 직접적인 보상을 포기하고 이제 더 이상 죄 짓지 않는 것이 형벌의 두려움 때문이 아닌 시대가 도래하리라 확신한다. 또한 그는 악에 대해 매우 관대하여 그것을 발전의 추동력으로 여긴다. 그는 악과 불의를 극복될 수 있는 불완전성으로 본 것이다. 즉,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이며, 설사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도 인간이 다른 대안들을 안다면 신에게 크게 감사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라이프니츠는 실수를 했거나 명백한 왜곡을 저질렀다. 라이프니츠의 신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신에 비해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고 조화로운 신일지 몰라도 그는 그러한 신을 변호하기 위해, 세상의 악과 죄로부터 고통 당하는 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무식한 바보(그냥 해 본 말이 아니고 정말로 언어적 장애가 심각한 사람이라고 한다)가 악의 축, 십자군 전쟁 운운하며 이라크를 침공해도 라이프니츠의 신을 믿는 교회 집사라면 이렇게 말할 공산이 크다. “비록 모양새가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이슬람에 대한 선교의 효과도 있겠고 어쨌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십자가의 피 맛을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섭리란 인간의 죄악에 의해 희생당함으로 승리하신 어린양의 노선만을 고집한다. 그 섭리는 세상에 대해 무능력하지 않고(데카르트), 세상의 일부로 전락하거나(스피노자), 세상에 대해 전능하지도 않다(라이프니츠). 그것은 비천하고 어리석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가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써 세상의 죄악이 온 우주에 고발되었고 세상에 대한 종말이 선포되었다. 하늘과 땅이 불타 없어지고 새로 창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이 입을 다물고 인정하게끔 만드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와 같이 기이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 32)

모든 사람을 가두어 두시고,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고......

어느 피조물이 그분의 섭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며, 관망하거나 예측하거나 비판하거나 협조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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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의 섭리에 대한 세 철학자의 입장, 그리고 성경

이근호 2003-04-21 06:37:08,

잘 지적하셨습니다.

즉 이들 철학자들은, 왜 이 세상이 반드시 멸망해야 하느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 1:10-11)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 신과학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이나 일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현 하늘과 땅이 왜 '새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에 대해서 무지하고 따라서 자기네들의 사고 방식이 언약 위반에 해당되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서 이 세상이 닳고 노후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언약에 따라 하나님과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그리고 새언약에 의해 심판받습니다.(고전 16:22)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그것으로 심판이 다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죽은자에 대한 심판도 감행됩니다.(요 5:28)

왜 죽은 자까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창조과학자들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진리는 과학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아우르는 그런 법칙을 제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진정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살고자 하지 방식을 용납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이나 십자가 복음이나 언약이나 교회 같은 것을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 살고자 하는 자는 아직도 진리 밖의 인물입니다.

그들은 거룩과 성화의 꾫을 운운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 제발 이 세상에서는 살아 남게 해주세요."라고 간곡히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얼마전에 LG 생화학연구소에 근무하면서, 한국 최초로 FDA에서 신약으로 인정받은 약 개발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과학자가 (교회에 잘 다님) 과로인 인해 쓰려져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가 개발한 약은 숱한 환자와 그 가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입가에 웃음을 되찾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리입니까? 그리고 만약 진리가 아니라면 아예 신약 개발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했습니까? 그 과학자는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희생된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순교자이십니까? 아니면 그저 고정된 제 운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까?

그가 신약 개발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했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 가운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파악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했는지 아니했는지 본인만이 아는 일입니다) 즉 "누구든 십자가 공로없이는 지옥행이다"는 마음을 평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 과학자가 이런 성도라면 그 사람은 신약 개발보다 더 위대한 것을 증거하는 순교자일 것입니다.

즉 신약 개발을 증거하는 자로 쓰려지기 보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남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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