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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7 16:12:38 조회 : 5499         
05 고대 신학 4 이름 : 관리자(IP:220.81.176.151)

05 고대 신학 4

이근호 2004-02-29 18:17:09, 조회 : 339, 추천 : 61

그러므로 그들의 우연적인 결합을 통해서 삶 혹은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플로티노스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영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쩌면 억지로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았다'고 말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속성은 산산히 흩어져버리고 또 지나가 버리는 것이 때문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이루졌었다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앞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육체란 도무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영혼이 전체적인 것들(우주만물) 안에서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아가 그 어떤 질서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세상만물의 로고스(형상인)는 영혼 이외에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물질에 다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육체적인 것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어떤 본성을 설정하도록 어쩔 수 없이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영혼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혼의 형상은 그 모든 육체적인 존재 바깥에 그리고 그 너머 저편에 자리한다. 곧 육체적인 것들에 앞서 혹은 그럼에도 육체적인 것들 곁에 있다. 이는 영혼이 모든 육체적인 부분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육체적(혹은 물질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을 근거짓거나 스스로를 근거짓고자 애쓰는 사고는 오히려 '본래적인 자아'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물질세계 내에 저마다의 존재는 하나의 장소를 점해야만 하는 반면에, 영혼은- 정신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공간을 초월한다- 그 본질상 도처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자체가 양적인 연장성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다고 단언 할 수만 없다. 오히려 공간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육체적인 것이 공간에 무제한적인 영혼에 의해 이해되어야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만일 영혼이 육체적인 어떤 것에 지니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모순이 자리한다.

왠고하니, 만일 영혼이 그때마다 느끼는 육체의 모든 부분에 존재해야 하고, 그것은 동일한 장소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감각행위 중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양적이지 않는 정신-영혼이 그 자체로 (물질적-육체적인 측면서, 예컨대 하나의 일정한 신체적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무(無)는 아니다.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낳는 원천적인 실체로서 이해된다. 정신-영혼의 양적이지 않으며, 크기로 측정되지 않는 특성 따라서 우리는 정신-영혼 곁에서 어떤 '초연할 수 있는 능력(거리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활동에 의해 파악되는 다양성 안에서도 그러한 감각적 의미의 통일성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정신- 영혼에게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한편 (우리가) 눈으로 보고, 다른 한편 귀로 듣는다면, 그 두 가지와 관련된 어떤 통일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적인 현상들을 따라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곧 여러 가지 감각들로 받아들여진 것들 곁에서 동일한 어떤 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일한 어떤 것이 다양한 감각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드러나는 감각적인 현상이란 마치 펼쳐진 원주로부터 마침내 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그어지는 무수한 반경과 같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서로 상응하는 것이 결국 그 중심에 '하나'로 존재한다.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러한 과정이 혹시 만일 그렇게 감각을 수용하는 정신-영혼이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되거나 혹은 거기에 머물러버린다면,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적인 요소와 객체적인 요소 사이에 '만남'을 주선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곧 감각은 육체의 도움으로 감각적인 대상을 영혼이 수용하는 활동수단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물체 안에 자리하는 형상들에게서도 정신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게서 '구별되는 것(형상)'이 '구별하는' 정신(곧 추상화하는 주체)으로 간주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하는 (추상화) 작업 안에서 그리고 그 도움으로 인간의 자기 및 세계에 대한의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과 관계하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로서 사고활동은 육체적인 사물에 두루 작용하는 원인에 대한 파악과 같이 '육체없이도 포착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정신적인 활동의 실현과정은 육체적인 활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정신활동은 비록 외적이며 감각적인 충동을 계기로 시작하지만, '육체에서 깨어남'을 필요로 하고, 어쩌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에게 실상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로서의 전체적 정신세계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고무시킨다.

좀더 자세히 살려보자면, 인간에게는 기억(記憶)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외적인 부재(不在)'를 내적인 현재로 되돌리는 작용을 한다. 기억 곳에서 공간적-물질적인 것을 초공간적-비물질적인 방식으로 특별하게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에 힘입어 공간적으로 연장되는 세계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이때 하나의 순수 정신적인 '세계'가 확보되며, 거기서 다양한 감각활동을 우리는 경험으로 곧 인식을 위한 원리적 소재로 이끌어낼 수 있다.

저 정신세계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표층적인 구조의 제한성을 넘어선다. 경험 안에서 내면화된 기억내용은 오히려 더 이상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심층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이 구조 안에서 공간적인 제약은 극복되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그들의 초감각적인 동일성을 따라 완성되어 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시공간 안에서 그저 단편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이며 부분적으로 표출된 감각적 존재들의 본질-내면적 원인구조를 그의 전체성 안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외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들 곁에서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는 본질로서 기억 덕분에 밝혀지는 정체성이다.

이러한 자기 신원에 대한 확인은 실상 이 세상의 우연적 조건을 능가하도록 이끈다. 근본적으로 또 내적으로부터 세상의 사물로서 외화(外化)되어지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자기실현과정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자기실현과정을 시공간을 초월하는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권고한다. 물질세계의 상황 및 조건들을 넘어서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인식내용들의 정신적 의미가 우리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라 바라보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권고한다.

곧 영혼이 우리 자신에게 덧붙은 낯선 무엇이라면 우리의 변화하는 몸체처럼 한편으로는 떨어져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덧붙는 것을 볼 때, 그 몸체 자체에 고유한 무엇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도대체 부단히 영혼 자체의 동일성을 활용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는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고, 어떻게 우리는 낯익은 서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비육체적인 존재의 공유적 특성은 이제 플로티노스의 관점에 합당한 이해를 제공한다.

즉 느끼고 생각하고 삶을 대비하는 인간내면의 종합적인 태도가 인간 외적인 육체적인 태도와는 다른 실체(영혼)을 요구한다는 관점 말이다.

예컨대 이 세상의 물질 자체에는 기억과 통찰과 사유의 힘이 자리하지 않으니 지나간 것을 붙잡고, 다가올 것을 앞서 예견하고, 현재하는 것을 포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이 모든 능력은 단지 신적 존재에 의한 것이니 신(神)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영혼은 육체 안에 자리잡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존재함이 취해지는 것이라, 과연 이러저러한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은 다시 말해, 육체가 아니며 나아가 육체의 감정도 아니다. 영혼의 실체성은 오히려 육체적인 행동에 앞서 취하는 또 다른 실천적 행위이지 그에 앞서 전제된 질서요 작용이며 창조적 능력이다.

이를 다시금 설명하자면, 물질적인 것들, 예컨대 흔히 '외형(外形)을 수용하여 보여주는 것들'과는 달리 영혼은 가장 먼저 그런 '외형을 부여하는 무엇'으로서, 혹은 그 스스로 물질적인 것에 앞서 존재하는 형상으로서 곧 물질의 형태를 꾸며주는 무엇이다.

이러한 영혼의 활동은 외적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적인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혼은 모든 움직임의 시원이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영혼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영혼은 그로써 함께 하는 육체에 무엇보다도 생명을 부여한다. 그 생명은 영혼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따라서 결코 외적인 강요로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그 자체로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체적인 모든 것은 그때마다 생명을 계속하여 번창시킬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생명은 끝없이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존재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살아있는 어떤 본성이 이어야만 하는데, 그 본성은 필연적으로 파괴되지 않으며 불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생명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서 신적인 모든 존재와 복된 존재가 몸소 살아가며 존재하듯 거주해야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처음부터 그러하다.

그들은 나뉨없이 존재하며 계속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결코 되어가지도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도대체 그들이 자신 외에 그 어디로부터 생겨나서, 그 무엇으로 사라져버린단 말인가?

더 이상 연소될 무엇이 남지 않는다면 불은 꺼져 사라져버리겠지만 영혼의 생명은 꺼져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는 결코 연소되어 사라져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혼의 실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플로티노스가 말하기를, '생명을 따라 자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그 영혼 실체로서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영혼의 정체이다. 그로써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도 능히 불리어질 것이다. 혹 그렇지 않고 육체와 다름없이 사멸한다면 다시금 분해되어야 할 것이며, 영혼에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불멸하는 존재원인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운명을 전제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로티노스가 영혼 개념을 가지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혼( 혹은 식물의 혼이나 동물혼)과 같이 개별영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관점을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영혼들은 저마다 그 과제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론적 구조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두 영혼(세계영혼과 개별영혼) 모두 움직임의 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두 스스로 길러내는 생명과 관계하며 그러한 움직임의 원인은 하늘 아래서나 하늘 저편에서 동일하게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추구하고, 그런 한에서 첫 번째 원인을 알기까지 계속 노력한다.

영혼은 이제 '정신'과 만난다. 곧 지적인 활동 안에서 순수 정신적인 생명을 지니기에 언제나 저 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통하여 이제 영혼은 자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산고의 고통'을 느끼지만 또한 그에 따른 창조적인 결실의 기쁨을 얻기 위해 영혼은 부단히 애쓴다.

이러한 욕망을 취하는 모든 영혼은 정신세계 안에서 바라본 것들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아 그로써 갈망하는 아픔이 생겨나 서둘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꾀한다.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곧 참된 존재적 존재는 여기서 다시금 영혼에 의해 물질세계 안에 앞서 전달된 생명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과 뒤섞여 가장 훌륭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장애를 갖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하는 것의 본성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기에 놓여 있는 순수함에 유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외적으로 덧붙여진 것은 언제든 그 이면에 자리하는 순수한 것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덧붙여진 것을 추려내어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더 이상 감각적인 것이나 그런 감각적인 사물들로부터 현혹되지 않고 진정 영원한 의미 안에서 영원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대한 본래적인 통찰에 의해서 불멸하는 신적인 세계에로의 상승이 실현될 것이요, 그렇게 참여관계 안에서 곧 참여하려는 우리는 참여를 허락하는 그것에 의하여 성사될 것이니,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 우리 영혼 안에 거처하는 가장 주인다운 주인에게 그의 자리를 내어준다면, 참된 의미에서 앎이라고 불리는 깨달음의 지혜가 영혼 안에 자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플로티노스는 조언한다.

이러한 완전성 실현의 이해와 관련하여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 뒤따른다. 예를 들자면, 완전성 실현의 의미는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그때마다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고도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듯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동일성을 잃지 않게끔 저 완전성 실현의 의미가 도처에 개입한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 그것은 모든 그때마다의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서, 곧 순수 동일성의 실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가운데 시공간적인 한계를 그때마다 넘어서 오히려 매번 그들 앞에서 전제는 한, 시공간적인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능력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마감될 우리의 운명이 실상 불사하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만일 도대체 존재한다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때는 존재하다가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암시하는 바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탐구의 원칙에 준하는 것으로서. 무엇인가가 존재한해서,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고, 그 원인적으로 되새긴다는 기본적 입장을 재삼 확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을 일컬어 움직임의 시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과연 앞서 존재하는 것을 마주하고 소급하여 생각한 나머지 처음 존재하는 무엇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라고 명명한다면 거기에 이미 '셋'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는 암호처럼 은폐된 소위 '삼차원적인 기본 도식의 존재론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플로티노스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그것이 존재하기 위하여 앞서 고려되어야 할 존재근거 및 원천으로서는 그는 '절대적인 하나'를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하나는 완전성 실현과정을 위한 첫 번째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하나가 자체로 고정되듯 머물러 있지만은 않고, 운동, 곧 자신을 내어주는 -다른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로서의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면, 이미 절대적 하나 안에서 우리는 역동적인 요소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이를 두고 그는 운동과 정지, 혹은 다름과 같음에 따른 존재의 역동적인 실현과정을 함께 생각하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도덕을 무엇보다도, 원(혹은 구)의 형태를 통하여 예증하고 있는데, 저 절대적인 하나는 마치 하나의 원처럼 역동적인 구조를 따라 자신의 완전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이 원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든 중심과 반경 그리고 원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이들 세 가지 구성요소는 서로로부터 구별되지만 동시에 서로로부터 무관하지 않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 두 가지 구별과 연관성이 동시에 고려되지 않다면, 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하나의 원을 이루는데 필연적인 것으로 함께 작용함을 뜻한다.

플로티노스는 이를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길, 저 중심은 정체성을 고수하는 능력으로서 마치 아버지와 같아서 그로부터 무수한 구별을 시도하는 변경과 그렇듯 구별된 시도를 다시금 묶으려는 원주가 생겨난다고 소개하였다.

이를 가리켜 플로티노스는 '존재한다고 하는 모든 것의 삼차원성'이라고 표현하고, 이 삼차원의 '셋'이란 수가 프타고라스에게서 가장 으뜸하는 수로 취급되었던 점을 상기하면서 그 의미를 밝혀고자 하였으니, 이를 다시 설명하지면,

이 존재적 삼차원성의 역동적인 구조는,

첫째, 중심에 한결같이 머무르도록 작용하는 내존재

-우리는 이를 언제는 순수 동일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요,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존재, 곧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근거, 혹은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둘째, 중심으로부터 반경을 그리며 밖으로 작용하는 외존재

-우리는 이를 가리켜 저 내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운동, 혹은 표현하려는 움직임이라 이해하고, 두 번째 존재, 혹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셋째, 중심 및 반경에 의해 전개된 활동들을 다시금 하나로 모르도록 작용하는 합존재

-우리는 이를 두고, 저 내존재와 외존재를 물질세계에 해명하고자, 곧 실제적으로 내보여주고자 하는 관점에서 '행위'요, 그 때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물질 세계와 만나 정지된 단면을 보여주는 세 번째 존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같은 존재의 근본구조는 삼차원적으로 동시에 하나됨 안에서 전체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첫째 이미 자기다움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항존적인 동일성 안에서 '존재'로서 포착됨을 가리킨다.

둘째,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 언제든 능동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기에, 정신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존재한다는 것은 가만히 머무르거나 그저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따라 존재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곧 영혼은 살아있는 몸 안에서 그 운동의 출발점, 그것이 나아갈 목적지, 그리고 그 본질적인 형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세 가지 원론적인 설명과 함께 존재의 능동적인 측면에 대한 단서로 작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운동과 정지, 다름과 같이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이 아니라 부단히 서로의 관련성을 확인하며 '하나된 완전성'을 이루려고 하는 점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뒤에 스콜라 학파의 전통 안에 스며들고, 삼위일체적인 신론을 부각시키고 마침내 세계관과 인생관을 해명하는 보편적인 활용되었다.

어거스틴 역시 플로티노스와 유사한 취지에서, 반육체적인 태도의 무지한 측면을 경계하도록 고무시킨다. 다만 플로티노스가 이 지상(물질) 세계를 벗어 던져 버려야지만 할 어떤 것으로 강조하고는 그로써 인간 영혼이 순수 지적인, 더 나아가 초-지적인 세계로서 동경하는 에로의 길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어거스틴은 지상에서의 충실한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어쩌면 본질적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따라서 영혼이란 그 육체가 관계하는 지상적인 삶에 봉사하는 무엇이라고 이해했다. 이로써 육체는 일찍이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본연의 삶에 제약적이고 짐스러운 무엇이라고 여겼던 생각에서 벗어나, 성경적 창조론에 따라 모든 것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의지해서 살기를 권했다.

그로 인해 그 육체를 조정하는 불멸하는 정신영혼의 힘입어 선(善)에로 나아갈 수 있는 성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을 뒤따르던 이들, 곧 지상에서의 육체적인 삶으로 인해 더 이상 천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서 어거스틴은 그의 새로운 동기들, 곧 인간적인 능력을 정화함으로써 다시금 신적인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관점을 지목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할 것이요, 정신은 오로지 정신만을 위하거나 오로지 몸만을 위하여 안일한 곳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신적인 원천은 -끝이 없는 끝에서- '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설명이 의도하는 바는, 모든 감각적인 것이 모조리 타락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요, 또한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장애요소로 작용하지만은 않고, 단지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헬라의 교부들은 주로 두 개념을 중심으로 은총을 이해했다. 이 두 개념은 창세기 1:29절에 나오는 모상(模像, 형상) 개념과 신약성경에 분산해 있는 참여 개념이다. 이 모상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닮아가고 있다는 사상이며, 참여 개념은 수동적 태도, 즉 하나님께당신 생명에 참여시킨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어떻게 보면, 인간 본성의 고양(高揚)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고양은 말씀의 강생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그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안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서방교회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적 지향의 차이에 기초한 것이므로 서방교회와 반대되기보다는 강조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헬라의 전통적인 철학사상 때문인지 교부들은 참여 개념을 이용했다. 즉 교부들은 보편화된 철학 사상에 따라 속성을 지닌 본성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존재로 간주된다.

다른 존재들은 존재이긴 하나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면서 참된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겨우 존재하게 된다. 또한 존재들의 서열 사상이 지배적이다. 모든 존재들은 형편대로 완벽한 존재에 참여하긴 하나 정도가 다르다.

각 존재는 우선 하나님의 이성에 위치하는 개념에 따라 존재하는데 이 존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과 결합하여 하나님이 가지신 개념들을 구체화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모든 존재들의 전형이시고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들은 겨우 그 전형에 참여할 뿐이다.

존재들의 참여의 강도에 따라 큰 차이는 보이지만 다같이 겨우 하나님의 모상을 드러낼 정도이다. 즉 각 계급의 존재들은 많지만 다같이 유일한 본성에 참여한다. 따라서 인류의 일관성과 단일성이 헬라교부들, 즉 동방의 은총론의 통념이다.

또한 동방의 은총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이 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모상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의 동방 은총 사상의 특징은 인간의 신화(神化) 개념이다. 안디옥의 이레네우스Irenaus of Lyons (130-202)이 되도록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라는 명제를 동방교회 구원론의 기본 관념으로 보게 된다.

헬라 교부들에게 있어 이 신화는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특별히 불멸성의 생활 상대 안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신적 생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신화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전형적인 인간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존재를 신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인간 존재를 벗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함을 통해서 정의된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동방의 은총론은 근본적으로 특별한 은총론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적인 철학 명제를 사용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전체 구원역사가 은총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동방신학은 신화(神化)를 통한 인간의 최종 지복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의 수행을 강조하였으며, 인간 존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현현에 관한 인간의 관념을 강조하면서 인간에 대한 보다 신비적으로 종교적인 관념을 가져왔다.

서방세계 기독교는 처음부터 동방세계 기독교와는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 있었다. 전체적인 특성을 볼 때 동방과의 두르러진 차이점은 동방의 은총론이 인간이 이상형을 제시하는데 비하여, 서방 은총론은 특정한 개인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은 실질적인 은총을 강조했다. 서방세계의 사람들에게 은총은 본성의 상처를 고치는 치유의 작용을 하였으며 인간이 하루하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 안에서 이러한 행동은 정욕을 치료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방 기독교의 은총 이해에는 법률 준수를 통한 신학 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기독교는 자신을 신법의 종교로 드러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법적 관계의 근거 설정과 구현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서방신학은 개별 인간, 그리고 그의 과실, 책임과 자유에 큰 비중을 두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자기 자유와 자립 능력의 힘으로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이룩 할 수 있는 개별적인 개인이 어떻게 자기 존재의 완성을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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