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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18:55:00 조회 : 7201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1998.3.2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에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인해 백성과 하나님 만나기가 차단되어 있었다. 바로 그 제사장의 실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 성전 내부에서 휘장이 쳐져 있는데 이는 차단용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 그리스도(휘장)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뜻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처사이다. 디모데전서 6:15-16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여기서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이라는 대목 때문이다. 바로 이러 이러한 점들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가 살아나지 않는다. 즉 단순히 예수님을 하나님 만나는 수단이나 매개체로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은 죄를 갖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 뵙고 구원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은 더욱 더 인간과 하나님과의 단절을 철저히 하시는 분이다 는 뜻이다. 즉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만나 뵐 그 어떤 자격도 없음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정지어진 것이다. 인간 쪽에서 올라오는 모든 구원 욕구와 하늘에 관한 지식 확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거부당한다. 메시아의 오심은 죄인들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대책을 세운 결과가 아니다. 오로지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분이다. 이러한 하늘 나라의 건설은 닫혀진 구원의 문은 더욱 분명하게 고정하는데서 그 본질을 구현한다. 즉 세상 나라와 하늘 나라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 나라가 하늘 나라로 침투하는 일이 없게 한다. 오히려 하늘 나라가 세상 나라를 공격한다. 단지 주님의 능력으로 (세례 요한 시절까지의 인간 능력이나 행위에 이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에 침노해서 구원 얻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마 11:12 참조)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과 단절된 그 세속성과 죄악성에 놓여 있음을 세상 끝날 까지 완전히 폭로시켜 놓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단절성은 이미 모세 때부터 이스라엘 내부의 율법의 정신으로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 올려놓고서는 끝내 하나님의 얼굴만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형상의 최종면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셔서 친히 거행하시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전까지의 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과 형성된 단절이 갖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인간의 죄 속에서도 누그러지거나 훼손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9-20)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다른 선한 형상과 다른 형상과는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얼굴은 심지어 모세라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드는 속성을 함유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이 공개되면 그것은 모든 것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과 죄와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죄가 참으로 죽음이라는 사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즉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의 얼굴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얼굴을 모세에게 공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참 긍휼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그것도 최종 심판을 배경으로 해서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고도 무사히 산을 내려 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배려를 한껏 품에 안고서이다. 단 하나님의 긍휼과 배려는 어떤 조건 안에서만 유효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이름'의 반포이다. 하나님의 얼굴과 산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모세가 받은 긍휼이 개재되어 있는데 이 긍휼은 곧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살려주는 긍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늘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어야 하는 조건하에서이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과 인간들의 죄악성 사이에서 긍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는 하나님의 최종 심판성과 인간의 죄악 이 두 가지 양상을 다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얼굴― 죽음'의 연관성은 '하나님의 이름 ― 긍휼'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스라엘 내에 상주하는 것이 되었다. 시편 44:3-5에 다음과 같은 말씀에 나온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3-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이 긍휼과 심판을 양쪽 다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긍휼은 오직 '우리'라는 부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연 '우리'는 누구를 두고 말하는가? 위의 본문대로라면 '야곱'을 지칭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의 후손이라고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 야곱성(性)'의 생성은 인간의 종교적 희구를 넘어서는 일이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선택해서 가입될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혈통적으로 히브리인 소속이라고 해서 선택된 야곱 자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긍휼의 대상인 '우리'에 속한 자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 창조 때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의 나타남은 곧 창조의 지속성을 반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름의 반포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실시하시는 창조가 긍휼에 의해서만 성사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창조의 토대로 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한 새창조이다. 단순히 개인을 살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의 심판성을 담아 내는 창조 활동으로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역이다. 무에서 유의 창조요 죽음에서 삶의 창조이다. 바로 이러한 역할은 순전히 하나님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다. 구약 이스라엘 제사 제도가 이러한 하나님 이름으로서의 활동을 말해 준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여기에 보면 '번제'와 '화목제'가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심판성이 지상에서는 번제와 화목제의 형태로 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름이 담아 내고 있는 번제와 화목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일이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세상은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접촉한 것이 되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심판이 된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는 긍휼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를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제 그분의 창조력으로 새로운 심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5-16) 세상의 피조물의 본래 가치는 그 존재성 그 하나로 이 희생 제물이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8-12) 이러한 창조물의 가치는 그 하나님 형상의 지탱해야 하는 사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0-22) 결국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만물을 창조하기 위해 기반이 된다. 그러한 조치로서 본인이 먼저 희생 제물이 되셨다. 따라서 자기 안에 있는 자들은 이와 같은 긍휼의 가치가 고스란히 들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의 얼굴 ― 죽음'이라는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 ― 긍휼'이라는 틀 안으로 함축된 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얼굴 ―죽음' 관계는 결코 무효화 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몸 안에서 새 창조의 근거가 된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7-18) 이 본문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대목이 나온다.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나셨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에 대해서 심판을 중지하고 취소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하나님의 얼굴로서의 심판을 자신의 창조 사역을 근거로 하여 이미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 ―죽음'의 관계가 본격화된 양상에 돌입된 것이다. 이제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몸이기에 주님과 더불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바로 그 몸이 된 것이다. 교회라고 불리우는 이 몸은 곧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물이 된다. 이 몸에서 나타나는 기능들은 곧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기능이다. 이 안에서 만물은 긍휼의 계통 질서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3-13) 이 본문에 있어 남 여 사이에는 희생 제사적 견지에서 보면 각자 구분되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 남자는 여성에 비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위치에 있다. 즉 가정에 있어 긍휼을 제공하고 주도적 계통을 유지하는 틀의 역할이다. 하지만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출산시키므로서 자신이 출산한 그 존재에 다시 종속되어 구원이 받는 역할을 하게 된다. 디모데전서 2:12-15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2-15) 이 본문에서 보면, 여성의 상대적 저위성과 여성의 구원됨이 상호 관련 있음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자신에게 구원을 가르치는 그 대상을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 해산하므로 서 하나님의 창조 구조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의 머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긍휼의 질서 체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된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여인이 결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긍휼의 범주 안에 생겨날 수 없는 일로 보는 것이다.

희생 제물로서의 삶이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삶이다. '하나님의 이름― 긍휼'의 삶은 '하나님의 얼굴― 죽음'을 노골적으로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나는 삶이다. 새로운 창조 질서는 이처럼 희생 제물의 운명에 자기 백성을 예속시키는 질서이다. 바로 이러한 운명을 나타내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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